배화학당

dh_edu
김윤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2일 (월) 10:38 판 (1920년 3.1운동)
이동: 둘러보기, 검색

소개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

독립운동

1920년 3.1운동

배화학교의 학생 조직은 독립선언문을 미리 준비하여 1919년 3.1운동에 참가하려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체포를 염려한 교장은 학생들이 학교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하였고, 그날 오후 일본의 순경이 학교로 찾아오고 휴교령이 내려지며 무산되었다. 학생들은 1920년 3.1운동 일주기를 맞아 배화학당 내부에서 다시금 만세운동을 계획하였다. 1920년 3월 1일 새벽, 40여명의 여학생들이 학교 뒷산 필운대와 교정에서 만세를 외쳤고, 그중 24명이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살이를 하였다. 후에 6명이 독립유공자 훈장을 수여받았다.

출신인물

김명시

남궁억

차미리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