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재홍

dh_edu
레몬밤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11일 (월) 20:41 판
(차이) ← 이전 판 | 최신판 (차이) | 다음 판 → (차이)
이동: 둘러보기, 검색
⁕- 안재홍 -⁕
안재홍.jpg
인물 기본 정보
이름 안재홍
한자 표기 安在鴻
민세(民世)
기타 정보
출생일 1891년 12월 30일
출생지 대한민국 경기도 평택시 고덕동
사망일 1965년 3월 1일
단체 신간회


간단한 설명

독립운동은 물론, 언론인으로도 활동하였으며 민정장관을 역임하고 국회의원으로 당선된 적 있는 인물!


  • 일제강점기 때는 조선일보 사장신간회 총무간사 등을 역임하였다.
  • 역사 연구의 영역에서는, 우리나라의 상고사를 연구함으로써 일제 식민사관을 극복하고자 노력한 바 있다.
  • 해방 이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 민정장관 등을 역임한 언론인이자 사학자, 정치인, 그리고 독립운동가다.

업적

안재홍의 업적 요약 영상

신간회의 안재홍

안재홍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였다.


안재홍 신간회.png
신간회 통합에 힘쓴 안재홍
안재홍은 신간회가 해소의 길을 걷기 시작했을 때에도 마지막까지 신간회의 유지를 호소했던 인물이다!
<비판>[1]이라는 잡지에 올라온 여러 글 중 정동호의 <신간회 해소론>과 더불어 안재홍의 경우 <해소 반대자의 처지에서>라는 글을 쓴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사진에 이상재와 안재홍의 이름이 바뀐 것은 조용히 눈감아 주도록 하자)


신간회 등장 이전

1927년 2월 15일 신간회 결성!

민족주의 계열이었던 안재홍은 3.1 운동 이후 세력 내부에서 자치운동론[2]이 등장하자 이에 반발하며 맹렬히 비난하였다.

신간회 결성에 참여

1926년 겨울, 안재홍은 자택에서 신간회 결성을 위한 비밀모임을 하였다.
후에 1927년 1월, 사설을 통해 신간회는 대일 타협의 우익노선에 대항해 비타협노선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당시 상해에 있었던 신채호에게 편지를 보냄으로써 그가 신간회 발기인으로 참여하도록 장려했다는 사실도 있다.

신간회 창립 이후

안재홍은 신간회에서 총무간사로 활동하며 전국을 순회, 민족대단결의 중요성 강조를 위한 노력을 하였다.
후에 도쿄로 건너가 그곳에 있는 유학생들에게 신간회에 참여할 것을 권유하기도 하였다.
1929년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일어났을 때 안재홍은 다른 지도부 구성원들과 함께 진상조사단 파견 및 진상보고대회를 준비하던 중 일제에게 구속되게 된다.



독도 진상조사단

독도조사단 파견을 최초로 결정한 인물이 바로 안재홍!


일생 이야기

9번이나 감옥에 간 적 있다?

다 합쳐서 무려 7년 8개월을 감옥에서 보내셨다! 그것도! 일.제.강.점.기 에!


시기 번호 자세한 이유
1919년 11월 제1차 옥고 1919년 겨울, 안재홍은 대한민국 청년외교단[3]에서의 활동이 발각되어 징역 3년을 감옥에서 보낸다.
1928년 1월 제2차 옥고 1924년 초부터 <시대일보>의 논설기자로서 활동하였던 안재홍은 그해 후반기 즈음, 신석우의 영입으로 <조선일보>의 주필의 역할을 하게 된다. 당시 신석우는 친일파였던 송병준의 <조선일보>를 사들인 뒤, 이상재를 그 사장으로, 안재홍은 주필로 받아들인 것이다. 안재홍은 <조선일보>를 통해 1920년대 일제의 문화통치와 감옥 내에서의 대우 등을 비판하며 <보석 지연의 희생>이란 논설을 쓰게 된다. 결국 이로 인해 4개월 가량 옥고를 치르게 된다.
1928년 5월 제3차 옥고 4개월 뒤인 1928년 5월, 일본이 중국을 침략한 것에 대한 비판의 사설을 실었다는 이유로 신문이 정간된다. 그리고 이때 안재홍은 다시 8개월 간의 징역을 살게 된다.
1929년 12월 제4차 옥고 1929년에는 신간회의 지도부로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지원하였다가 다른 지도자들과 함께 다시 구속되었다.
1932년 3월 제5차 옥고 만주 동포 구호를 위한 의연금(지원금)을 가로챘다고 의심받아 투옥되는 일도 있었다.
1936년 5월 제6차 옥고 1936년, 민족혁명당의 김두봉과 함께 두 명의 청년을 중국 항주 군관학교에 비밀리에 파견하려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종로경찰서에 구속되었다. 후에 1937년 보석으로 풀려났다.
1938년 5월 제7차 옥고 부인이 별세하고, 장남의 결혼이 며칠 남지 않았을 무렵, 흥업구락부[4] 사건으로 체포되는 바람에 서대문형무소 독방에 갇히게 되었다.
1938년 10월 제8차 옥고 군관학교 사건과 관련하여 형이 확정되어 8번째 투옥을 겪게 된다.
1942년 12월 제9차 옥고 1942년 12월의 추운 겨울,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일제의 탄압을 받아 다시 체포되었고, 함경남도 홍원경찰서에 수감되었다. 이때 가혹한 고문과 추운 감옥에서의 방치 등으로 인해 건강이 크게 나빠지게 되었다.


타임라인으로 나타내었을 때 상당히 자주 감옥에 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주석

  1. 1931년에, 비판사에서 송봉우가 좌익적 입장에서의 사회 고발을 목적으로 창간한 월간 잡지
  2. 자치운동론은 조선이 독립할 능력이 아직 없기 때문에, 독립을 위한 준비는 일제로부터 기술과 학문을 배워 실력 및 자본을 축적한 후에 해야 한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해 안재홍을 포함한 많은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은 이것이 자치운동이 아닌 타협운동이라며 비판하였다.
  3. 3ㆍ1운동 직후 상하이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해 결성된 단체이다.
  4. 이름이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지만 1925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 독립운동단체라고 한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