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학생항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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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학생항일운동.jpg
사건 정보
사건 이름 광주학생항일운동
한자 표기 光州學生抗日運動
발생 날짜 1929년 11월 3일 ~ 1930년 5월
발생 지역 대한민국 전역, 간도, 미국, 일본, 중국
기타 정보
발생 원인 6.10 만세 운동, 한일 학생 차별 교육, 박기옥 희롱 사건
사건 종류 항의, 시위, 농성
결과 신간회 해소, 학생운동 탄압


간단한 설명

광주학생항일운동

광주학생항일운동은 1929년 광주지역 학생들이 중심이 되어 전개된 학생 항일독립운동이다!


발생 배경

일제의 교육적 억압

일제는 식민지 교육 정책의 일환으로 우민화 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들은 조선 학생들에게 고등교육을 제한하고, 직업을 위한 교육이나 일본어 및 일본사 교육만을 제공하였다.
추가적으로, 학생들이 자유롭게 토론하거나 비판하는 것도, 자치활동에 참여하는 것도 금지하였다.
1920년대 말은 조선 학생들에 대한 억압과 차별, 무시가 상당히 심해졌던 시기였다.

  • 광주학생항일운동 진압 당시 일제는 조선 학생들의 형량을 늘리기 위해 그들의 행동이 우발적이었다고 서술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이미 광주소재 각 고등보통학교에 성진회독서회 등 다양한 비밀학생조직이 존재했다.
    그 이유로 위에 언급된 일제의 조선 학생 차별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국내 독립운동 세력 단일화

6.10 만세 운동 이후 시기에는 국내외적으로 좌우 합작 운동이 활발하게 발생하였다. 신간회 역시 이때 등장한 민족연합전선이었다.
1927년 10월, 광주 지역에도 신간회 광주지회가 설치되었으며, 이와 더불어 1927년 11월 전남청년연맹으로부터 광주청년동맹이 분리되어 결성되었다고 한다.
신간회 광주지회와 광주청년동맹은 그 주요 임원들이 성진회나 독서회 등의 비밀학생조직의 배후 인물인 경우가 많았다.

나주역 사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직접적인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다.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학생들과 한국인 학생들 사이에 난투극이 벌어진다.
해당 난투극이 있기 몇 분 전, 일본인 중학생들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학생이었던 이광춘박기옥의 댕기머리를 잡아당기면서 희롱하는 일이 있었다.
이를 목격한 박기옥의 사촌동생인 박준채는 분노하며 일본인 중학생들에게 항의하였으나, 그들은 오히려 그를 조롱할 뿐이었다.
결국 박준채와 일본인 중학생들 사이에 난투극이 시작되었고, 이에 일본인 학생 50여 명과 한국인 학생 30여 명이 참여함으로써 집단 난투극이 되었다.
싸움을 진압하기 위해 온 일본 경찰들은 한국인 학생들에게만 처벌을 하였고, 이에 대해 광주의 학생들은 분노하며 집단항의를 하였다.

전개 과정

제1차 광주학생항일운동

11월 3일

  • 일본의 경우, 메이지 천황의 탄생을 기념하는 명치절.
  • 한국의 경우, 음력으로 고조선 건국을 기념하는 개천절.


11월 3일 조선 학생들은 국가의 건국을 기념해야 하는 날에 일제 천황의 탄생을 기념하는 의미로 일본 국가 기미가요를 불러야 했다.
그리고 조선인 학생들은 이에 대해 침묵으로 일관했다. 그들의 반일감정은 굉장히 격양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비슷한 시기, 광주고등보통학교의 조선인 학생이 광주중학교의 일본인 학생들에게 테러를 당하는 일이 벌어지면서 폭력사태까지 발생하였다.
이러한 일이 겹침에 따라 학생들은 광주에서 대규모로 항일 시위를 벌이게 된다.


제1차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이끈 장재성

1차 광주학생항일운동을 전개하면서 장재성 등은 다음과 같은 행동 방향을 제시한다.

1. 우리의 투쟁 대상은 광주중학생이 아니라 일본 제국주의이니 투쟁 방향을 일제로 돌릴 것.
2. 광주중학생에 대한 적개심과 투쟁을 일제에 대한 증오와 독립투쟁으로 바꿀 것.
3. 광주중학생과 대치 중인 광주고보생을 해산시키지 말고 광주고보로 집합시켜 적개심에 불타는 학생들을 식민지 강압정책 반대 시위운동으로 돌릴 것.
4. 장재성이 시위운동을 직접 지도할 것.
5. 우리는 앞으로 다른 동지들과 연락하여 다음 투쟁을 준비하고 계획할 것.


제2차 광주학생항일운동

11월 3일의 투쟁으로 많은 학생들이 구속당했다. 그러나 학생들의 의지는 오히려 더욱 강해질 뿐, 전혀 꺾이지 않았다.
장재성은 광주의 학생들을 설득하는 유인물을 작성, 오쾌일과 박기석 등과 함께 1000장 가량의 인쇄물을 만든다. 1929년 11월 12일 오전 8시 경, 오쾌일은 광주고보와 광주농고의 학생들을 통해서 유인물을 배포한다. 당시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의 여학생들도 교정에서 시위에 가담하였으며, 광주고보, 광주농고, 광주여자고보 학생들은 동맹휴학으로 일제에 대항하였다. 일제는 250여 명에 가까운 학생들을 검거했으며, 사회운동단체 간부들도 검거당했다. 일단 경찰에 구속된 학생들에 대해서는 학교당국의 가혹한 처벌이 잇따랐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무기정학, 퇴학으로 광주학생운동 가담자들을 탄압함으로써 중등학교 학교 교실이 텅빌 지경이었다. 일제는 12월 28일까지 언론통제를 단행하여 학생운동의 확산을 차단하고, 전국적 항일운동으로 확대발전하는 것을 막으려고 했지만,오히려 각종 탄압에 대한 소문과 풍문이 더욱 커지면서 그동안 응축되었던 항일활동이 폭발적으로 증가하는 계기를 제공했을 뿐이다.

신간회의 지원

신간회 광주지회의 상무간사였던 장석천은 11월 16일 서울로 올라와 조병옥, 김병로 등 신간회 중앙간부들에게 제2차 시위의 전말을 보고하고, 이어 조선청년동맹 중앙간부 곽양훈, 차재정 등에게 광주학생들의 항일시위를 전국 항일 시위 운동으로 확산할 것을 역설했다. 이 두 모임에서 서울 시내 각 학교에 이미 조직되어 있는 비밀독서회 조직을 통해 시위운동을 서울로 확산하기로 결정하였다. 11월 20일부터 12월 2일까지의 준비기간을 거쳐 1929년 12월 3일 서울의 각 학교의 조선인 학생들에게는 광주학생들의 시위운동에 대한 전말과 독립운동에의 동참을 호소하는 격문이 모두 뿌려졌다.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대해 신간회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관련 대책 회의를 열려고 하였지만, 시위가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것을 두려워했던 일제에 의해 실행에 옮기지는 못하고 지도부의 많은 사람들이 체포 당하게 되었다.

기타

여성들 역시 광주학생항일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주체 중 하나였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이 1929년 시작되자, 허정숙 등의 여성운동 지도자들은 이화여자전문학교, 배화여자고등보통학교 등의 여러 여학교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에 동참할 것을 호소하였다.
실제로 1930년 1월 15일, 허정숙 등은 대규모의 만세시위를 계획하였고 실행에 옮기기까지 하였다.
후에 더욱 적극적으로 항일운동을 주도하던 허정숙은 수 백명의 여학생을 이끌고 다시 한번 대규모 시위를 계획하지만 일제에 사전 발각되어 체포된다.

결과

  • 광주의 학생들로부터 시작된 광주학생항일운동은 후에 서울, 평양, 함흥, 신의주, 부산, 대구, 춘천 등지로 확산되어 약 54,000여 명이 참가하게 되었다.
  • 대규모의 시위에 놀란 일제는 운동에 직접적으로 관여한 학생들과 이를 지원한 단체들을 모두 체포하기 시작하였고, 이로 인해 신간회의 지도부까지 대부분이 체포당하는 일이 생긴다. 이후 지도부의 교체와 새 지도부의 타협적 행각으로 인해 신간회는 분열하기 시작하였고 결국 해소되게 된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흐름 타임라인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기념하기 위해 1954년 지어진 탑
  • 기념탑 후면 비문 : “단기 사천이백육십이년 십일월 삼일, 이날은 광주 학생들이 일제의 탄압에 항쟁하여 일어선 민족정기의 날. 굴욕으로 사는 것보다 차라리 죽엄을 택하겠다는 의기로써 나도나도 뛰쳐나서자 이에 호응하여 전국에서 일어난 학생들이 무릇 오만사천여 명, 혹은 솨시슬에 묶이어 철창 아래 갇히었으며 또 혹은 피를 뿜고 쓰러졌으되 그날 그들이 높이 들었던 정의의 횃불은 그대로 역사 위에 길이길이 타오르나니 어허 여기 흐르듯 고인 그들의 피와 눈물은 천지와 더부러 영원히 마르지 않을 것이며 또한 여기 서린 채 깃들인 그들의 넋과 뜻은 겨레의 갈 길을 밝히 비치리로다. 단기 사천이백팔십육년 십일월 삼일 여기에 온 국민의 열화 같은 힘과 정성을 모아 이 탑을 세우다"[1]
  • 주변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역사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1999년 4월 30일 광주광역시 시도기념물로 지정되었다.
  • 광복 이후 가장 먼저 조성된 독립 관련 기념물이라고 한다. 이를 바탕으로 보았을 때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얼마나 큰 의미가 있는 운동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의의

3.1 운동 이후 가장 큰 규모의 항일운동

  • 광주학생항일운동은 광주에서 학생들을 중심으로 시작된 운동이었지만, 후에 다양한 사회 단체들이 지원을 하고 대한민국 전역뿐만 아니라 일본, 중국, 간도, 심지어 미국에서까지 운동이 진행되었다는 점을 보았을 때, 상당히 큰 규모의 항일운동이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세 가지 의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의의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광주 학생들은 당시 사회운동·청년운동을 포함한 민족 독립운동에 대해서 민감한 수용력을 보여주었고 그것을 체득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다. 우리 민족사가 일제의 강점으로 식민지화되어 있을 때 민족 독립을 위한 역사적 과제를 모색하는 생동력 있는 지성을 추구해 나갔다.
  2. 광주 지역에는 이미 학생들을 대상으로 한 성진회가 창립되어 민족 독립의 성취를 위한 이론을 다양하게 연구하여 대일항쟁요원을 육성, 조직한 점이다.
  3. 일제 강점 하의 한국 사회에서 누구든지 민족적 방향, 그리고 인간적 차원에 선 대일 감정이 있었다. 아무리 소박한 측면에서라도 일제는 침탈자요 수탈자이며, 폭력을 동원하는 압박자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학생의 날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고?


  • 1919년 3월 1일의 3.1 운동도, 1926년 6월 10일의 6.10 만세 운동도, 1929년 11월 3일의 광주학생항일운동도 모두 중심에 학생들이 있었다.
  • 11월 3일 발생했던 1차 광주학생항일운동을 기준으로 하여 학생의 날이 생겨났다!



  • 1953년 학생의 날이라는 명칭으로 처음 국가기념일로 제정되었지만, 10월 유신 시대 계속되는 학생들의 민주화 투쟁으로 인해 1973년 3월 30일에는 폐지가 되었던 날이다. 그러나 이를 다시 부활시키려 노력하는 사람들에 의해 1984년 9월 22일 다시 등장하였다.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라는 명칭이 붙게 된 것은 2006년 2월 9일 국회가 독립운동의 정신을 더욱 잘 드러내기 위해 개칭하면서부터였다.[2]

관련 사이트

광주시청각자료실 광주학생독립운동


관련 매체

작품 사진 작품 이름 설명
이름없는 별들
1959년 김강윤 감독의 데뷔작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을 다룬 항일영화이다.[3]
  • <꿈은 사라지고> <인생복덕방> 등 시나리오 작가 김강윤의 감독 데뷔작으로 최금동이 시나리오를 썼다. 독립지사의 아들 상훈(황해남)은 뜻 맞는 교우와 더불어 항일독립운동체인 성진회 멤버로 활동한다. 이들의 정신적인 지주는 한문선생 송운인(최남현)이다. 어느 날 성진회에 고등계형사 오빠를 둔 영애(조미령)도 가담한다. 거사하기로 결정한 밤 형사에게 발각되어 영애가 오해를 받으나, 죽음을 무릅쓴 영애의 행동으로 동지들은 피하게 되고 다음날 아침 전 광주의 학생들은 봉기한다. 광주 시민들의 적극적인 협조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그린 작품이다. (조선일보 59.11.4)

주인공 상훈을 중심으로 광주학생항일운동이 전개되었던 시절의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역사적으로 크게 주목받는 11월 3일의 1차 광주학생항일운동의 모습을 후반부에 잘 담아낸 점이 인상적인 영화이다.

광주학생운동
메타버스
광주광역시교육시청에서 2021년 11월 3일,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을 맞아 학생독립운동 메타버스 기념관을 공개했다. 제페토 앱을 통해 '학생독립운동'을 검색하면 '학생독립운동기념관 맵'이 나오는데, 이곳에서는 학생독립운동의 역사를 배울 수 있다. 기념관에 나와있는 정보들을 보면, 나주역 사건이나 학생들 주도의 성진회 결성,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등 다양한 정보들을 가상공간에 시각적인 매체와 함께 제시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외에도 광주학생항일운동과 직접적으로 연관이 있는 역사적인 장소들을 3D로 구현해 놓았으며, 학생들은 여러 장소를 돌아다니며 광주학생항일운동의 역사를 즐겁게 체험하는 것이 가능하다.

주석

  1.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탑' 부분을 보면 더욱 자세한 설명을 볼 수 있다.
  2. 실제로 학생독립운동기념일, 혹은 학생의 날이 어떤 날인지 잘 모르는 사람들도 많다. 애초에 이 날이 학생의 날이라는 사실 자체를 모르는 사람들이 더욱 많다.
  3. 1959년은 해방이 되고 겨우 15년 밖에 지나지 않은 해였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