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간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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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간회 -⁕
신간회.jpg
단체 정보
단체 이름 신간회
한자 표기 新幹會
활동 기간 1927년 2월 15일 ~ 1931년 5월 16일
단체 구성
구성원 수 약 3만 9천 명
주요 인물 이상재, 홍명희, 안재홍, 신채호 등
이념 사회주의, 민족주의



간단한 설명

신간회란?

신간회는 1927년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공동으로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이다!


이름의 유래

'신간출고목(新幹出枯木)'
고목은 마른 나무를 뜻하고, 신간은 새로운 가지를 뜻한다. 즉, 말라죽어가는 나무에서 새로운 가지가 나온다는 말이 바로 신간출고목인 것이다. 이 뜻을 당시의 시대에 빗대어 생각해보면, 말라죽어가는 조선이라는 나라에서 새로운 희망이 나온다는 뜻으로 해석하여 사용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신간회'라는 이름을 고안해 낸 인물이 바로 홍명희다.

신간회의 규모

신간회는 전체적으로 150여 개 지회가 있을 정도로 규모가 컸다. 심지어 일본 도쿄에도 지회가 있었음. 회원의 경우, 대략적으로 3만 명 내외 정도였으며, 가장 많았을 때에는 3만 9000명 정도까지 활동했었다. 이처럼 신간회는 당시 가장 규모가 컸던 항일 단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성립 배경

절대 이어지지 않을 것 같던 두 세력은 어떻게 손을 잡게 되었을까?


신간회의 전체적인 성립 과정을 보자!


국내

사건 설명
민족주의 세력의 분열 1920년대에서 1930년대 사이 항일운동을 주도한 세력은 크게 두 세력이 있었다. 바로 서로 이념적으로 갈라져 있던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었다. 그리고 이 시대는 일본이 문화 통치를 실시하던 시기였다. 강압적인 통치를 하다가 갑자기 문화 통치의 형태로 들어선 그들의 목적은 우리 민족의 분열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로 인해 실제로 민족주의 세력은 두 갈레로 갈리게 되었다. 일본의 통치 형태에 맞춰 자치론을 주장한 민족주의 세력이 있는데, 이를 일컬어 타협적 민족주의라고 한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친일반민족 행위자로 여겨지는 작가 이광수가 존재한다. 그리고 이들에 반대하는 민족주의 세력이었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었는데, 후에 이 세력이 신간회를 결성하는 주요 세력이 된다.
치안유지법으로 사회주의 계열 위축
  • 치안유지법 : 천황제나 사유재산제를 부정하는 운동을 단속하는 것을 목적으로 제정된 일본의 법률.

치안유지법은 전문 및 7개 조항으로 이루어진 법이었는데, 그중 제1조에서 국체의 변혁 또는 사유재산제도의 부인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의 조직 및 가입 그리고 목적 수행을 위한 행위자를 처벌하는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이 내용이 직접적으로 사회주의 세력을 가리키는 내용을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이념적으로 반하는 내용이 있는 점을 부정할 순 없었던 사회주의 세력이 탄압을 받게 되었다.

두 세력의 협력 가능성 확인 대한제국의 마지막 황제였던 순종이 서거한 후, 각지의 독립운동 세력들은 순종의 장례일인 6월 10일에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계획한다. 이는 과거 1919년에 있었던 3.1 운동에 영향을 받은 것이다. 이때 진행되었던 6.10 만세 운동이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의 협력에 어느정도 영향을 주었다고 볼 수 있는데, 여러 세력을 망라하여 진행된 운동이었기 때문에 이를 통해 두 세력이 연합하여도 괜찮겠다는 인식을 양측에 심어주게 되었다는 것이다.[1] 또한, 사회주의 계열의 경우, 이 운동에 참여한 지도부가 다수 체포되는 사건이 발생하였고, 때문에 더욱 민족주의 세력과 힘을 합칠 필요성이 생기게 되었다.

국외

사건 설명
중국의 1차 국공합작
  • 국공합작 : 1924년에서 1927년, 1937년에서 1945년의 2번에 걸쳐서 성립했던 국민당과 공산당 사이의 연합전선

신간회의 성립에 영향을 준 것은 성립 이전에 실시되었던 1차 국공합작이라고 할 수 있다. 이름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 것처럼, 국민당은 민족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었고, 공산당은 사회주의 세력을 대표하는 이들이었다. 이 두 세력이 제휴를 하는 모습을 본 우리나라의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 역시 연합을 고려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코민테른의 연합전선론
  • 코민테른 : 1919년 모스크바에서 결성된 국제공산주의 운동 지도 단체

코민테른은 여러 차례의 회의를 거치면서 연합전선, 혹은 공동전선이라는 개념을 구체화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공동전선을 통해 수많은 비혁명적 노동자들과 협력하고, 그들을 혁명적 정치에 끌어들이는 방법을 제공하였다고 한다.[2]

한국독립유일당촉성회 중국 관내에서 원세훈안창호가 주도하였던 민족유일당운동[3]과 관련된다. 중국의 베이징에서 1926년 10월 28일 결성되었다. 이를 고려하여 한국독립유일당 북경촉성회라고 일컬어지기도 한다. 여러 갈래로 흩어져 있던 단체들을 통합하려 노력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기는 하지만, 주도 세력 체포, 회원 감소, 자금 부족 및 민족주의계와 사회주의계 간의 갈등 악화 등으로 인해 실패한 아쉬운 사례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통합을 위한 노력으로 신간회 성립에 영향을 끼쳤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두 세력의 제휴

위의 여러 배경들을 바탕으로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사회주의 세력이 협력하게 되었다


정우회 선언

  • 정우회는 1926년 4월 조직된 사회주의 단체였다.
  • 정우회에서 1926년 11월 15일 발표한 성명서가 바로 정우회 선언이다.
 민족주의 세력에 대하여는 그 부르주아 민주주의적 성질을 명백하게 인식하는 동시에 또 과정적 동맹자적 성질도 충분히 승인하여, 그것이 타락하는 형태로 출현되지 아니하는 것에 한하여는 적극적으로 제휴하여 대중의 개량적 이익을 위하여서도 종래의 소극적 태도를 버리고 분연히 싸워야 할 것이다.
- 정우회 선언
  • 여기서 말하는 타락하는 형태가 바로 타협적 민족주의 세력이다.
  • 즉, 사회주의 세력은 정우회 선언에 따라 타락하는 형태로 출현하지 않았던 비타협적 민족주의 세력과 힘을 합치게 된 것이다.

창립 포스터

신간회 창립 포스터.png
  • 이 그림은 신간회의 결성을 축하하는 동아일보의 삽화이다.
  • 깃발에 적힌 '대동단결' : 신간회는 대동단결의 기치를 내세워 전국의 노동운동과 농민운동을 지원하고, 야학을 세워 대중을 계몽시키기도 하였다.
  • 대한민국 본토를 그린 그림 위에 깃발이 꽂혀 있음 : 신간회의 지회가 전국 각지에 설치되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신간회 강령

신간회 강령

창립 당시 강령

  • 우리는 정치 경제적 각성을 촉진함
  • 우리는 단결을 공고히 함
  • 우리는 기회주의[4]를 일체 부인함

1927년 12월 동경 지회의 대회에서 제안된 강령 수정안

  • 우리는 조선 민족의 정치적 경제적 해방의 실현을 기함
  • 우리는 전민족의 총역량을 집중하여 민족적 대표 기관이 되기를 기함
  • 우리는 일체 개량주의 운동을 배척하여 전민족의 현실적 공동 이익을 위하여 투쟁하기를 기함

신간회의 행동 강령

  • 조선 농민의 교양에 적극적으로 노력한다.
  • 조선 농민의 경작권을 확보하고 일본인 이민을 방지한다.
  • 조선인 본위의 교육을 확보한다.
  • 언론, 출판, 결사의 자유를 확보한다.
  • 협동조합 운동을 지지, 지도한다.
  • 염색된 옷을 입고 단발을 실시하고, 흰옷과 망건을 폐지하기


활동

신간회가 지원한 여러 활동

원산총파업

원산총파업은 1929년 1월 13일부터 4월 6일까지 원산노동연합회의 노동조합원 2,200여 명이 참여한 한국노동운동사상 최대 규모의 파업이다. 신간회는 이들에게 전국 각지 단체들과 함께 지원을 위한 성금을 보냈다.

광주학생항일운동

1929년 광주 지역 학생들이 주도하여 일으킨 항일운동인 광주학생항일운동이다. 신간회는 이를 지원하기 위해 진상조사단을 파견하고, 대규모의 민중대회를 개최하려고 하였다. 그러나 신간회의 움직임을 파악한 일제는 탄압을 하였고, 이로 인해 허헌을 중심으로 한 신간회 주요 간부들이 구속되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형평운동

형평운동은 1923년부터 백정들이 중심이 되어 진행된 신분해방운동이다. 신분에 대한 차별은 1894년 갑오개혁 때 법제적으로는 철폐되었지만, 백정에 대한 차별은 수십 년이 흘러도 여전하였다. 이에 대해 반발심을 가진 백정들이 형평사 조직을 구축하여 조직적인 운동을 벌인 것이다. 신간회는 1920년대의 수많은 사회 운동을 지원하는 동안 형평운동 역시 지원하였다.

기타 활동

  • 전국 순회 강연
  • 수재민 구호
  • 만주 동포 돕기


신간회 지회

  • 신간회 지회는 굉장히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있었다.
  • 100여 개가 넘는 지회가 한반도에 설치되었고, 일본에도 4개의 지회가 설치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 각 지회가 모두 한 시기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다. 대부분의 지회가 신간회 성립 연도인 1927년에 설치되기는 하였지만, 나머지 지회들은 1931년까지 나뉘어 설치되었다.

관련 인물

  1. 초대 회장: 이상재 (비타협적 민족주의 계열)
  2. 초대 부회장: 홍명희 (사회주의 계열)
    • 홍명희가 부회장으로 선출되었으나 후에 그가 사양하여 권동진이 부회장이 됨.
  3. 안재홍
  4. 신채호


신간회의 영향을 받은 단체

근우회는 여성들이 중심이 되어 조직한 신간회 자매 단체이자 민족협동전선 단체로, 신간회의 영향을 받아 등장하게 되었다!


근우회는 신간회의 자매단체!

해소

해소 배경

1. 내부적 이념갈등
광주학생항일운동 지원 시도 뒤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지도부가 대부분 체포되는 일이 발생하였다. 이후 들어선 새로운 지도부가 일본과 타협하고 점차 친일적인 모습을 보임으로 인해 지도부와 각 지회의 구성원들 사이에 큰 마찰이 생기게 되었다.


2. 코민테른의 노선 변경
코민테른은 국제공산주의 운동 조직으로, 신간회 해소에 영향을 끼친 단체였다. 코민테른은 신간회의 사회주의 계열 세력에게 중국에서 국민당과 공산당이 협동 후 해체하게 된 것[5]을 언급하며 민족주의 계열과 더이상 제휴하지 말도록 명령함.

왜 '해소'일까?

  • 해소해체해산과는 다른 표현이다!
  • 지금은 헤어지지만 언젠가 다시 손을 잡을 것을 기원하는 희망을 남긴 형태의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주석

  1. 6.10 만세운동의 지도부가 제시한 세 가지 투쟁방침 중 첫 번째 내용에 이것이 명시되어 있다. 사회주의·민족주의·종교계·청년계의 혁명분자를 망라하여 ‘대한독립당’을 조직해야 한다는 내용이다.
  2. 중국에서 벌어진 국공합작 역시 아시아에서 만들어진 연합전선과 관련이 있다고 볼 수 있다.
  3. 1920년대 후반 만주와 중국 지역에 분립되어 있던 독립운동 단체들이 하나로 통합되기 위해 전개한 운동
  4. 여기서 '기회주의'란 타협적 민족주의를 의미한다.
  5. 국공합작 운동의 실패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