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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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리아참외 (토론 | 기여)님의 2023년 12월 5일 (화) 19:27 판 (직책 및 주요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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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대한제국의 매국노이면서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호는 벽수이다.

생애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1]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

직책 및 주요활동

1894년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

1895년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

1896년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 1897년: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1898년: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 10월에 농상공부 참서관,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 1900년: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 1901년:

1월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함. 5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 1902년:

9월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 10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 1903년:

9월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 1904년:

3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어 5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함. 7월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 1907년:

4월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 5월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 10월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 1908년:

6월 시종원경과 10월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임. 2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대동학회 회원으로 참여. 8월 기호흥학회에서 찬무부 찬무원 및 특별찬성회원으로 선정. 10월 권상사를 발기하고 한성부민회 산하 한성북부 관진방회 부회장으로 선임.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위촉. 1909년:

1월과 2월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주5.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조문사로 다롄[대련]에 파견. 11월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 1910년:

8월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 이왕직 찬시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2월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하고, 3월 사립 오성학교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에서 찬성원으로 활동. 4월 일성의숙(일성의학습소) 숙장을 맡음. 1912년:

1월 이문회를 창립.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음. 1913년:

7월 귀족들의 식림사업을 위해 조직된 조선임업조합 보식원 창립총회에 참석해 부장으로 선출. 1915년:

7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을 선전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회원으로 250원을 기부. 9월 가정박람회 명예고문으로 위촉. 10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주는 유공상을 받음. 11월 다이쇼[대정] 천황 즉위대례식에 참석해서 대동회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천황부부 알현’을 위해 일본으로 갈 때 배종. 1918년:

8월 경성구제회에 500원을 기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국장 장의괘와 제관부장으로 임명. 2월 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실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을 일선융화의 상징으로 주장.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 10월 이토 히로부미 십년제 발기인, 12월 경성삼종현물매매시장㈜ 발기인으로 참여. 1920년:

2월 조선식산은행 감사에 선출되어 1930년 10월까지 재임. 4월 금배를 받음. 6월 해동은행 설립에 참가해 1대 취체역 사장과 1923년 3대 사장에 취임. 9월 조선협회 고문으로 활동. 1921년:

일선신탁㈜ 발기인. 1922년:

9월 조선식산조성재단 평의원. 1924년:

2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음. 6월 동민회 회원으로 참여하고 10월에는 고문으로 추대. 1925년:

7월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940년 8월까지 연임.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에 임명.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에 참석해 취체역주8에 선임. 1928년: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발기하고 평의원으로 선임. 1929년: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설립한 창복회 위원으로 선임.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 1931년: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1932년: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 7월 만주국 건국기념으로 개최한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 1934년: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 1935년: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 1937년:

3월 조선신궁에서 열

각주

  1.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