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영
목차
- 1 개요
- 2 생애
- 3 직책 및 주요활동
- 3.1 1894년
- 3.2 1895년
- 3.3 1896년
- 3.4 1897년
- 3.5 1898년
- 3.6 1899년
- 3.7 1900년
- 3.8 1901년
- 3.9 1902년
- 3.10 1903년
- 3.11 1904년
- 3.12 1905년
- 3.13 1906년
- 3.14 1907년
- 3.15 1908년
- 3.16 1909년
- 3.17 1910년
- 3.18 1911년
- 3.19 1912년
- 3.20 1913년
- 3.21 1914년
- 3.22 1915년
- 3.23 1916년
- 3.24 1917년
- 3.25 1918년
- 3.26 1919년
- 3.27 1920년
- 3.28 1921년
- 3.29 1922년
- 3.30 1923년
- 3.31 1924년
- 3.32 1925년
- 3.33 1926년
- 3.34 1928년
- 3.35 1929년
- 3.36 1930년
- 3.37 1931년
- 3.38 1932년
- 3.39 1934년
- 3.40 1935년
- 3.41 1937년
- 3.42 1939년
- 3.43 1940년
- 4 참고문헌
- 5 각주
개요
대한제국의 매국노,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 이칭 : 중덕(仲德), 벽수(碧樹), 복영(福榮)
- 성별 : 남성
- 출생연도 1873녀 12월 27일
- 사망연도 1940년 10월 18일
- 본관 해평
- 출생지 서울
생애
-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2]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
-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
직책 및 주요활동
1894년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
1895년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
1896년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
1897년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
1898년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
1899년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
1900년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
1901년
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
1902년
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
1903년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
1904년
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
1905년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
1907년
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
1908년
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
1909년
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
1910년
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
1911년
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
1912년
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
1913년
1월에 평양 참사 현장에서 조국의 폐허와 민중의 슬픔을 눈으로 확인하면서, 3월에 자유사업소를 창립하고, 6월에 범일문화부시에서 독립예술시단을 결성.
1914년
3월에 목동협회를 설립하면서, 7월에는 목재농가에 국민목재신조를 보급하고, 12월에 목재매점인 ‘목재몰’을 개설.
1915년
4월에 독립농민운동을 계기로 농민들에게 국민목재신조의 중요성을 설명하면서, 6월에는 목재인력지원을 돕기 위하여 목재교육원을 설립.
1916년
3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보험회사를 설립하고, 8월에 목재노동자들의 효행을 기리기 위하여 ‘목재노동훈장’을 창립.
1917년
4월에 목재노동자들을 위한 향년공제회를 설립하고, 8월에는 목재노동자들에게 생활비를 지원하기 위한 ‘목재노동자 생활비보조회’를 설립.
1918년
6월에 평양 ‘목재총동회’를 창립하면서 지방에서도 목재민중에게 농구사업을 확장하고, 10월에는 ‘목재산업센터’를 설립하여 목재민중의 경제발전을 돕기로 결심.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을 기다리면서, 3월 1일 만세운동을 시작으로 4월에는 한성에 통치기관을 효정각에서 광화문시에 위치한 교수원(敎授院)으로 이전하면서 광화문에서 ‘광화문 만세운동 통치위원회’를 세움.
1920년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결방되었던 청와대의 청사를 복원, 개축하여 청와대로 삼음.
1921년
3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피폐화된 교수원을 개축하면서 국민교육과 학문의 기반인 학교로 재건.
1922년
5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폐지되었던 한성도서관을 교수원에 합병하여 학문의 중심지로 발전.
1923년
1월에 한성도서관에서 만세운동으로 인해 침체되었던 학문의 기반을 다시 쌓기 위하여 ‘학문운동회’를 창설.
1924년
1월에 청와대에서 국민들의 통치법에 대한 이해도를 높이기 위하여 ‘통치법학교’를 설립하고, 3월에는 한성도서관에서 학문활동이 침체된 대한민국의 교육수준을 향상시키기 위하여 ‘한성도서관교육연구회’를 설립.
1925년
3월에 통치법학교에서 각종 법률문제에 대한 해설을 통하여 국민들에게 법률교육을 실시하면서, 8월에 만세운동으로 인해 파탄된 평양의 농림건축사업을 기반으로 둔 ‘평양농림건축학교’를 설립.
1926년
4월 순종 승하 후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으로 임명.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 참석, 취체역주8에 선임.
1928년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 발기인, 평의원으로 선임, 300원 기부.
1929년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한 창복회 고문으로 선임.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
1931년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1932년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
7월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
1934년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
1935년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
10월 일제 식민통치 25주년 시정25주년기념표창과 은배 수상.
1937년
3월 조선신궁주10에서 열린 기년제에 참석.
1939년
12월 박영효 사망으로 칙선의원에 임명, 전시 총동원시책에 부응.
1940년
8월 중추원 부의장에 올라 함께 식민통치 20주년을 기념한 경성협찬회를 개최, 부의장으로 활동. 9월 조선총독부 교육심의위원회 위원, 10월 왕공족심의회 심의관으로 임명.
참고문헌
"윤덕영(尹德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
각주
- ↑ "윤덕영(尹德榮)."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n.d.,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42274. 2023년12월08일 접속.
- ↑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