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덕영
개요
대한제국의 매국노이면서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호는 벽수이다.
생애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1]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
직위
관료 및 정치 활동
1894년: 식년시에 입격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
1895년: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일원으로 일본 방문.
1900년: 일본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
1902년: 중앙관청에서 여러 차례 특진관으로 임명.
1908년: 시종원경과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임.
1910년: 한일 합병 조약에 동의하여 '경술국적'
1910년 이후: 다양한 국가기관에서 활동.
금융 및 경제 활동
1911년: 조선식산은행 감사.
1918년: 해동은행 설립에 참가하고 총재로 취임.
1920년: 조선식산은행에서 평의원으로 선임.
1923년: 조선식산조성재단 평의원.
1925년: 중추원의 고문으로 임명되어 1940년까지 연임.
교육 및 학문 활동
1912년: 일본 천황 즉위 대례기념 대례기념장 수여.
1939년: 경학원주 및 명륜학원 총재.
1939년: 조선대박람회 고문.
기타 활동
1938년: 일본군을 위문하기 위해 북중국 전선 방문. 1939년: 조선총독부 시국간담회 참석. 1940년: 중추원 부의장으로 올라감.
강연 활동
1938년: 조선신궁에서 열린 세단제에 참석하며 "천황폐하 만세" 봉창.
1938년: 석전 경학원에서 중일전쟁 찬양 강연.
- ↑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