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유물조각상 김은성
아미타불
정의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신봉되는 부처로서 서방 극락정토[1]를 관장하는 부처이다.
요약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를 가리키는 신앙 대상이다. 중국 인도의 범어[2]내용을 따라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살아 있는 모든 자를 구제하고자 48원[3]을 세우고 오랜 수행을 거쳐 본원[4]을 성취하고 10겁[5] 전에 부처가 되었는데 지금도 서방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다. 뭇 생명 있는 자들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통해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정토교[6]가 성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미타 신앙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부분의 사찰에서 극락 전에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름
의미
아미타불이란 명칭은 범어로, 아미타바붓다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아미타란 아미타유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음역[7]한 것이고, 무량수, 무령관 등이라고 의역하였다. 즉, 헤아릴 수 없는 수명과 광명을 가졌다는 두 가지 뜻의 음사[8]이며, 따라서 아미타불은 이 두 개의 덕성을 갖춘 부처라는 뜻이 된다.
유래
- 끝 없는 삶을 가진 이: 범어 "아미따유스(amitāyus)"에서 나왔고, 한자로는 무량수(無量壽)라고 표기한다. 그래서 무량수불로도 불리고, 아미타불이 있는 전각이름을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 끝 없는 빛을 가진 이: 범어 "아미따바(amitābha)"에서 나왔고, 한자로는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표기한다. 그래서 무량광불로도 불린다.
등장
국가 영향
한국
미타신앙의 한국적 수용의 한 특성은 선(禪)과 극락정토의 회통(會通)적인 노력이다. 아미타불을 찾는 염불과 선이 둘이 아니라는 선정불이(禪淨不二)의 전통은 원효가 “오직 마음이 정토요, 성품은 아미타불과 같다(唯心淨土同性彌陀).”를 천명한 이래, 지눌(知訥)ㆍ보우(普愚)ㆍ혜근(惠勤)ㆍ기화(己和)ㆍ휴정(休靜) 등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이름 | 원효(元曉) | 지눌(知訥) | 보우(普愚) | 혜근(惠勤) | 기화(己和) | 휴정(休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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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
소개 | 원효는 『대혜도경종요』, 『금강반야경소』, 『화엄경소』 등을 저술한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로, 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한 민중교화승으로도 중요하다. 종파주의적 풍조를 혁파하는 화쟁사상을 주장했다. | 지눌은 고려시대 『권수정혜결사문』, 『수심결』, 『원돈성불론』 등을 저술한 승려로, 선종(禪宗)의 중흥조로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과 교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의 본질을 모색하였다. | 보우는 고려후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서 불교계의 통합을 도모한 승려로, 1368년에는 신돈의 참언으로 속리산에 금고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고, 정치와 불교의 혁신, 선문구산 통합 등에 대해서도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 혜근은 고려후기 원나라 연경의 광제선사 주지, 회암사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로, 중국의 지공(指空)·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인가를 받고 무학(無學)에게 법을 전하여,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웠다. | 기화는 조선전기 『원각경소』 · 『금강경오가해설의』 · 『함허화상어록』 등을 저술한 승려로,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불교의 정법(正法)과 그 이치를 밝힘으로써 유학의 불교 비판의 오류를 시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 휴정은 조선시대 『청허당집』, 『선교결』, 『심법요초』 등을 저술한 승려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주장하며 선교관을 펼쳤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