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타 신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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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약

정토신앙(淨土信仰) 또는 아미타불신앙이라고도 하며,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계의 서쪽에 위치하는 청정불국토(淸淨佛國土)의 극락에 태어나기를 원하는 신앙이다.


등장 배경

삼국시대

『무량수경』이 중국의 위나라주2 때 번역되고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이 남북조시대주3 초기에 번역되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에도 일찍부터 이들 경전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미타정토신앙이 행해진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미타신앙에 관하여는 많은 자료가 전하고 있으므로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선덕여왕 때의 고승 자장(慈藏)이 『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과 『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을 저술한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일찍부터 미타신앙이 들어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저서는 현존하지 않고 또 다른 자료들도 남아 있지 않으므로 삼국통일 이전의 미타신앙은 알 수 없다.

통일신라

  1. 신라 중대의 가장 보편적인 신앙은 미타 신앙(彌陀信仰)이었다. 미타 신앙은 아미타불이 중생을 구제하겠다고 한 원력에 의해 사람들이 아미타불을 지성으로 염송하면 사후 극락세계에 왕생하게 된다는 내세 신앙이다. 신라의 미타 신앙은 국가를 위한 전쟁에 동원되었지만 절을 짓거나 탑을 세우는 것과 같은 공덕을 쌓을 수 없었던 일반민에게 강한 호소력을 지녔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와 더불어 일반민과 직접 어울리며 포교하던 교화승의 활동에 따라 미타 신앙은 7세기에 점차 기반을 다져 나갔다.
  2. 신라 중대의 미타 신앙은 염세적인 데서 오는 내세적 기원보다 현실 긍정적인 경향이 강하였다. 신앙 내용이 사후의 극락왕생보다 현실에 극락정토를 구현하겠다는 내용이 많이 나타난다. 극락세계의 현실화에 대한 소망은 경덕왕대에는 미타가 신라 땅에서 현신 성불하였다는 신앙 내용으로 이어졌다. 경덕왕대에 수십 년에 해당하는 만일(萬日)을 기약하여 시행된 염불 결사는 본격적인 신앙 결사의 면모를 알려 준다. 귀족이 주도한 이 염불 결사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던 노비 욱면(郁面)은 그 정성이 인정되어 나중에야 참가가 허락되고, 귀족이나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현신 그대로 염불하던 법당 천장을 뚫고 왕생하였다는 설화를 낳았다.
  3. 이처럼 계층을 가리지 않고 전 사회에 고루 수용된 미타 신앙은 국민의 일체감 조성에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통일기의 신라 사회는 전쟁을 치르고 난 뒤 그 과정에서 애쓰거나 희생된 사람을 위로하고 새롭게 확보한 영토에 살고 있던 고구려와 백제의 기층민도 포용해 들여야 하는 큰 과제를 안고 있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에 필요한 신앙으로서 미타 신앙은 더없이 적절한 것이었다. 이를 통해 얻어진 일체감은 지역 간의 화해와 계층 간의 화합에 중요한 역할을 해낼 수 있었다.

발달

혜숙

혜숙 & 혜공 & 대안

화랑의 낭도로도 활동한 혜숙(惠宿)은 기층민의 요구에 부응하여 지배층과 결합된 기존 교단을 비판하였다. 혜공(惠空)은 귀족의 집에서 고용 살던 이의 아들로, 술에 취하여 삼태기를 지고 거리를 돌아다녔다. 만년에는 항사사(오어사)에서 지냈는데, 원효가 글을 쓰다가 의심이 나면 혜공에게 가서 묻곤 하였다고 한다. 혜공은 영묘사에 화재가 날 것을 예견하고 미리 비법을 알려 주어 이를 구하기도 하였다. 대안(大安)은 시장거리에서 생활하면서 궁중의 초청도 외면하고 기층민과 어울려 지냈다. 대안은 『금강삼매경』이 처음으로 알려지자 흐트러진 내용의 차례를 혼자만이 알아낼 만큼 사상적인 깊이를 갖추고 있었다. 이러한 교화승의 다양한 활동을 통해 기층민에게 가까이 다가서는 불교가 점차 토대를 마련하였다.

원효

원효

이러한 경향을 계승하여 원효는 치밀한 교학 이론을 바탕으로 정토 신앙을 대중 신앙으로 확립하였다. 원효는 범부도 왕생할 수 있다는 교학을 마련하고 스스로 파계한 뒤, 속인의 옷을 입고 기괴한 박을 도구로 만들어 무애가(無碍歌)를 세상에 유포시키고 천촌만락(千村萬落)에서 노래하고 춤추며 사람들과 어울려 지냈다. 이에 따라 나무꾼이나 장사치도 부처의 이름을 알고 귀의한다는 뜻인 ‘나무(南無)’의 칭호를 부르게 되었다. 원효는 사람은 누구나 성불할 수 있다는 불성론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중생이 미혹하여 자신의 성불 가능성을 믿지 않으므로 불보살의 도움을 빌 어야 한다고 하였다. 정토에 왕생하기 위해서는 보리심을 내는 것도 중요하지만, 아미타불을 믿고 아미타불의 본원력에 의해 왕생하여 성불할 수 있음을 강조하여 염불의 중요성을 일깨웠다.

원효 이후의 신라 승려

원효 이후 신라 승려들은 미타 신앙의 기반인 『무량수경(無量壽經)』·『관무량수경(觀無量壽經)』·『아미타경(阿彌陀經)』의 미타삼부경에 많은 주석을 베풀었다. 원효에서 시작하여 법위·현일·의적으로 이어지는 신라 정토 교학은 중국 혜원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킨 추세를 보였다. 이는 현장의 견해를 계승하여 이를 비판한 경흥·원측 등의 유식계 정토 교학과 대비되며 신라 정토 교학의 주류를 이루었다. 그리고 주된 관심은 『무량수경』의 내용 조직이라든가 왕생 방법, 왕생 인연의 제한, 미타와 미륵 정토의 우열 문제 등이었다.

<유식계 정토 교학 vs 신라 정토 교학>
문제 왕생 방법 왕생 인연 문제 미타와 미륵 정토의 우열 문제
내용 왕생 방법에서는 십념(十念)의 내용이 문제가 되었다. 경전에서 십념을 언급하고는 있지만 구체적인 내용은 말하고 있지 않다. 이에 대해 원효·법위·경흥·의적 등 신라 정토 사상가들은 다소 견해 차이는 있지만, 십념을 아미타불의 명호를 부르는 칭명으로 이해하였다. 이는 지식 기반이 없는 범부들이 단지 명호를 부르는 것만으로 왕생할 수 있음을 강조한 것으로서, 중생의 평등성을 의식한 것이었다. 이러한 인식으로 일반민이 적극적으로 미타 신앙을 수용할 수 있도록 하였다. 왕생 인연 문제는 중생이 선천적으로 갖춘 자질에 따라 왕생할 수 없다고 하는 다섯 부류의 사람을 인정하는지 여부였다. 이에 대해 원효·현일·의적은 모두 참회에 중점을 두어, 가장 큰 잘못을 저지른 오역(五逆)이나 정법을 비방한 자도 참회할 줄 알면 왕생할 수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경흥은 유식의 전통적인 오성각별설을 따라 성불할 수 없는 다섯 부류의 사람을 인정하였다. 왕생할 수 있는 단계에 대해서도 신라 정토 사상가들은 중국 승려들보다 훨씬 낮게 설정함으로써 왕생자의 문을 크게 열어 놓았다. 미타정토와 미륵정토의 우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다. 원효는 미타 정토인 극락이 더 뛰어난 정토이고, 극락정토가 왕생하기도 더 쉽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경흥은 미륵정토인 도솔천도 극락처럼 쉽게 염불로 왕생할 수 있다고 하여 미륵정토가 미타정토에 못지않음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왕성한 교학을 바탕으로 미타 신앙은 평민이나 노비로부터 귀족에 이르기까지 신라 사회 전반에 걸쳐 폭넓게 전개되었다.

영향

우리나라

  • 아미타불에 관한 신앙은 우리나라에서 상당한 비중을 차지해 왔다. 6, 7세기경부터 우리나라에서는 미타신앙이 대중의 생활 속에 자리잡아 신라 시대에는 집집마다 염불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이 미타염불을 널리 권장한 공로자는 원효(元曉)를 들 수 있다. 그는 정토교(淨土敎)를 보급하기 위해 신라의 각처를 다니면서 미타염불을 권하였고, 이를 뒷받침하는 각종 저서들을 남겼다. 원효 이후의 많은 신라 교학승(敎學僧)들도 미타신앙을 전파하기 위해서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삼국의 치열한 전투 속에서 생겨나는 수많은 전몰자들의 왕생을 비는 데서 자연히 아미타불에 귀의하게 되었고, 수많은 아미타불상의 조성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 우리나라에는 삼국시대 이미 미타신앙에 관한 경교(經敎)와 실천수행법이 전래되었지만 정토교나 정토종이 성립된 일은 없었다. 비록, 종파와 교학 계통은 성립되지 않았다고 하더라도 미타신앙은 우리 나라 불교신앙사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해왔다. 특히, 신라 때는 현저한 특수성을 보이고 있으며, 오늘날까지 불교신앙 속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면서 면면히 그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 『무량수경』이 중국의 위나라주2 때 번역되고 『아미타경』과 『관무량수경』이 남북조시대주3 초기에 번역되었으므로, 고구려와 백제에도 일찍부터 이들 경전이 전래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미타정토신앙이 행해진 구체적인 기록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러나 신라시대의 미타신앙에 관하여는 많은 자료가 전하고 있으므로 비교적 자세하게 알 수 있다.

중국

  •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면서 경전의 漢譯(한역)이 이루어졌는데, 초기의 譯經者(역경자)로 활동한 중요한 인물이 安世高(안세고)와 支婁迦讖(지루가참)이다. 이들은 각각 後漢 桓帝(후한 환제;재위 146∼167)와 靈帝(영제;재위 167∼187) 때 중국에서 역경사업에 종사하였는데, 안세고는 소승경전을, 지루가참은 대승경전을 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이들이 번역한 경전 속에 아미타신앙의 초기형태를 전하는 般舟三매經(반주삼매경)과 無量壽經(무량수경)이 포함되어 있다. 따라서 아미타신앙은 중국에 불교가 전래된 초기부터 소개되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 아미타신앙과 관련된 경전류의 보급과 연구에 따라 아미타신앙자도 일찍부터 나타났다. 그리고 점차 아미타신앙이 성행함에 따라 많은 수행자들이 아미타불의 서방정토에 왕생하였다는 왕생설화가 유포되었고, 많은 왕생전이 편찬되었다. 이는 곧 아미타신앙이 중국에서 그만큼 성행했음을 나타내는 것이며, 동시에 아미타신앙을 널리 유포시키는 하나의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왕생담에는 아미타신앙을 지녔던 사람들의 관심과 목표가 반영되어 있기도 하다.
  • 역경사업의 초기부터 소개된 아미타불 관계 경전류의 보급에 따라 아미타신앙자도 일찍부터 나타난다. 즉 蹶公則(궐공칙)은 중국 최초의 서방정토 왕생자로 전하는데, 그는 晋 武帝(진 무제;265∼274) 때 왕생하였다고 한다. 그 이후의 서방정토 왕생자를 왕생전과 고승전 등에서 정리하면 <표 1>과 같다.
<표 1> 願生(원생), 往生者(왕생자)의 시대별 분포 출처: 불자홈
시대 남북조 미상
왕생자 46 19 74 8 147

기타

신앙 일화

포천사

포천산에서 아미타불을 구하여 서방 왕생을 위해 염불 수행하던 다섯 비구는 모두 몸을 버리고 왕생하였다.

염불사

남산 기슭의 피리사에 머물던 승려는 아미타불을 크게 염불하여 온 성안 사람들이 모두 들을 수 있을 정도여서, 사람들이 이름을 아예 염불사라고 부르고 공경하였다.

염불 결사

포산의 관기(觀機)와 도성(道成)이라는 두 수도자는 산골에서 나뭇잎으로 옷을 만들어 입고 수행하다 왕생하였고, 이를 기려 고려 초에 만일 염불 결사(萬日念佛結社)가 이루어졌다고 한다.
이는 일반민의 미타 신앙 모습을 알려 준다.

복합 신앙

미타와 미륵의 복합 신앙도 보인다. 집사 시랑을 지낸 김지성(金志誠)은 성덕왕 때 돌아간 부모를 위하여 감산사(甘山寺)를 창건하고 미륵보살상(719)과 아미타불상(720)을 조성하였다.
김지성이 생전에 조성한 감산사 미륵보살은 돌아간 부모 외에 국왕과 개원 이찬 및 형제·자매·처·승려 등 생존자가 공양자의 주류를 이룬다.
그러나 사후에 조성한 아미타불은 국왕과 개원 이찬 그리고 후처 이외에는 망부모·망제·망매·전처 등 사망자가 중심을 이루어 대조를 보인다.
이는 미타 신앙의 내세적인 성격을 잘 말해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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