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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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nyeom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9일 (월) 10:37 판 (독립군으로의 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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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기획의도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을 통한 구국운동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한다.

팀원

2023130036 김윤 2023131227 최용빈 2023131540 정혜나 2024130814 이민희 2024130911 신다정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한국사에 있어서 개화기는 근대화를 추진하는 시기로 역사적 의미를 지닌다. 개화기 교육은 종래 유학 경전 중심의 교육에서 탈피하여 신교육을 시작하는 전환기로 교육사적 의미가 있는 중요한 시기이다. 한국개화기 근대교육의 발전과정은 1880년대에서 1890년대까지 짧은 기간에 많은 변화와 개혁을 거듭하는 시기이다. 국가적으로 열강의 침략을 극복하고 신문화를 받아들여 개명하는 변혁기로 신교육 정착시키는 동시에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구국운동을 통하여 민족독립을 전개하는 시기이다.

1905년 을사보호조약 체결 이후 한국의 외교권이 박탈되고 일본 통감부가 설치되어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다. 이 시기의 개화파를 계승한 애국계몽사상가들은 국권회복을 위해서는 자강지술을 고취하고, 실력을 배양하는 것이 선결과제라고 생각했다. 이들은 이것을 위해 청소년 교육, 민족산업의 육성, 각종 단체에 대한 단결 그리고 신교육을 위한 학교설립 등 광범위한 애국계몽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를 교율(敎育)을 통해 나라를 구한다(救國)는 의미의 교육구국운동이라고 칭한다.

교육기관 설립

민족설립 교육기관

민족사학의 의미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로 정의한다.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개화교육구국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1]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

민족사학의 발전배경

당시 개화파를 비롯한 다수 지식인들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와 같은 지식인들의 의식은 서재필이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에 기고한 다음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50px-Quote-left.png 정부는 국민의 실정을 알아야 하고 국민들은 정부의 목적을 알아야 한다. 정부와 국민 상호간의 이해를 갖도록 하기 위해서는 쌍방에 대한 교육뿐이다 … 교육 없이는 국민들이 정부의 좋은 의도를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교육 없이는 정부 관리들이 결코 좋은 법률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50px-Quote-right.png
출처:서재필, 「오늘날 한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What Korea needs most), 『한국휘보(Korean Repository)』, 1896.3.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에서 발간한 『독립신문』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50px-Quote-left.png 문명개화한 나라들에서들은 무론 남녀하고 학교에 가서 적어도 10년 동안에 각색 학문을 배운 후 비로소 세상에 나가 … 조선 사람들은 겨우 배우는 것이 한문만 조금 배워 가지고 … 일본 같은 조그마한 나라가 싸움을 하여서 청국 병정 무찌르기를 풀 베는 것 같이 하고, 일본도 30년 전 같으면 나라 형세가 청국과 똑같았으니, 어찌 조그마한 나라가 청국 같은 큰 나라를 이기리오마는, 일본 사람들이 서양 각국이 부강한 곡절을 알고 곧 백성 교육하는 일을 힘써 … 당장에 적은 리(利)와 욕심을 내버리고 인민 교육하여 몇 해 후에는 조선도 남과 같이 되기를 바라노라 50px-Quote-right.png
출처:「논설」,『독립신문』1896년 4월 25일자.


위의 글들에서 확인할 수 있는, 이러한 지식인들의 자각이 민족사학 설립의 배경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민족사학의 발전과정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2]하였다.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기관

아래의 표에서는 대표적인 민족설립 교육기관과 그 계승 현황을 정리하였다.

[대표적 민족설립 교육 기관[3]]
교육기관명 설립일 설립자 계승
원산학교(元山學校) 1883 덕원(德源)의 유지 원산소학교, 원산보통학교, 원산제일국민학교로 계승되며 1945년까지 지속됨
흥화학교(興化學校) 1895. 11. 5. 민영환(閔泳煥) 1911년 폐교
중교의숙(中橋義塾) 1896 민영기(閔泳綺) 1906년 폐교
순성여학교(順成女學校) 1898.12. 찬양회(讚揚會) 1905년 12월 31일 『대한매일신보』기사를 끝으로 신문에 더 이상 나타나지 않음
점진학교(漸進學校) 1899 안창호(安昌浩) .
낙연의숙(落淵義塾) 1901 서광세(徐光世) 1916년 폐교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 1905. 1. 사회 유지 1905년 9월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가 법률학전문야학과를 신설하여 한성법학교 학생 20명을 인계받음 [4]
양정의숙(養正義塾) 1905. 2. 11. 엄주익(嚴柱益) 양정중학교(養正中學校)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1905. 4. 3. 이용익(李容翊) 고려대학교(高麗大學校)
보창학교(普昌學校) 1905. 5. 이동휘(李東輝) .
서전서숙(瑞甸書塾) 1906 이상설(李相卨) 1907년 폐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 1906. 4.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진명여자고등학교(進明女子高等學校)
중동학교(中東學校) 1906. 4. 2. 신규식(申圭植) 중동고등학교 (中東高等學校)
휘문의숙(徽文義塾) 1906. 5. 민영휘(閔泳徽) 휘문고등학교(徽文髙等學校)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1906. 5.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
양규의숙(養閨義塾) 1906. 6. 여자교육회(女子敎育會) .
서우사범학교(西友師範學校) 1907. 1. 서우학회(西友學會) 1908년에 서북협성학교(西北協成學校)로 개편됨
대성학교(大成學校) 1907 안창호(安昌浩) 1912년 폐교
협동학교(協東學校) 1907 유인식(柳寅植)) 1917년 폐교
소의학교(昭義學校) 1907. 9. 전경현(全景鉉), 민강(閔橿), 장경관(張敬寬) 등 동성고등학교 (東星高等學校)
장훈학교(長薰學校) 1907. 11. 2.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장훈고등학교 (長薰高等學校)
오산학교(五山學校) 1907. 12. 이승훈(李昇薰) 오산고등학교 (五山高等學校)
기호학교(畿湖學校) 1908. 6. 20. 기호흥학회(畿湖興學會) 융희학교(隆熙學校)를 흡수하여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 중앙고등학교(中央高等學校)로 발전함
양원여학교(養原女學校) 1908. 6. 여자보학원유지회(女子普學院維持會) .
신명학당(新明學堂) 1908. 2. 김장호, 김홍식(金洪植) 치문초등학교 (致文初等學校)
명동학교(明東學校) 1908. 4. 27. 김학연(金學淵) 1925년 폐교
보인학교(輔仁學校) 1908. 6. 8. 보인학회(輔仁學會) 보인고등학교(輔仁高等學校)
양산중학교(楊山中學校) 1908. 10. 김홍량(金鴻亮) .


이상의 표에서 1910년 한일합병 이전 설립된 민족설립 교육기관 중 적지 않은 수가 오늘날에도 현존하고 있는 중학교, 고등학교, 또는 대학교로 계승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1910년 이후 많은 학교들이 폐교 위기에 처한 것을 고려하였을 때, 이러한 계승은 민족설립 교육기관을 유지시켜 교육을 통해 나라를 구하고자 했던 당시 사람들의 투지와 열망에 대한 반영이라고 볼 수 있다.

보성전문학교와 명신여학교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李容翊)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 하에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1910년 이전에 설립된 학교가 폐교의 수순을 밟지 않고 이어져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다는 사실이 가지는 의미는 적지 않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1910년 이후 많은 학교들이 일제의 강압 아래 폐교 위기에 처했기 때문이다. 특히, 이 두 학교의 경우 대부분의 학교가 중등교육기관으로 계승 것과는 구분되어 고등교육기관으로 발전한 점'에서 주목할만하다. 나아가,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 되었다는 점과 명신여학교의 경우 민족이 설립한 많지 않은 여성 교육기관 중 하나였다는 점 역시 눈 여겨볼 필요가 있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보성전문학교는 1905년 04월 03일 고종(高宗)의 재정적 후원을 받아 이용익李容翊에 의해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보성전문학교의 설립 배경은 설립자 이용익의 행보에서 엿볼 수 있다. 친로반일(親露反日)적 입장을 고수한 것과 조선의 중립 선언을 선언하게 한 것으로 인해 일본에 의해 납치된 이용익은 체류 중 일본의 근대교육기관 및 개화문물을 접한다. 이것이 그의 교육기관 설립의 계기가 된 것으로 보인다. 그가 이후 귀국 할 때 다수의 도서와 인쇄기를 구입하여 가지고 온 점 역시 이러한 추측의 설득력을 높인다.
한편, 보성전문학교의 개교를 알리는 황성신문(皇城新聞)의 글에는 보성전문학교 설립이 그 당시에 가졌던 의미가 잘 드러나고 있다.

50px-Quote-left.png 전문학교 창설. 대한에 전문대학교는 아직 세워지지 못했다. 한성법학교(漢城法學校)가 세워졌으나 야학(夜學)이라 완전하지 못했는데, 박동(礴洞)에 신설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는 위치가 전문대학 주간 학교로 대황제폐하께서 특별히 설립하신 바, 매월 수천원의 경비를 내탕전(內帑錢)으로 내려주고 도서관을 부설하여 각 전문 교과서 수천권을 새로 간행한다 한다. 그리고 신해영(申海永)·조제환(趙齊桓)·정영택(鄭永澤) 세 명에게 이상의 사무를 전담하도록 하여, 위 3명은 교육을 열심히 하여 황제의 뜻에 보답하기위해 더욱 극진하게 힘을 쓴다고 한다. 20여명의 교수는 일찍이 일본에 유학하여 졸업한 사람들을 임용하여 (중략) 2개년 졸업기한이지만 인재를 빨리 양성하도록 황제의 뜻을 특별히 내리셨다하고, 오늘부터 개교한다고 한다. 50px-Quote-right.png
출처:『황성신문(皇城新聞)』 1905년 4월 1일자 2면. 현대어역: 고려대학교 도서관[5]

위 글에서 당시 대한제국에 중등교육기관은 존재했음에도 고등교육을 위한 기관은 야학의 형태로서만 존재하여 온전하지 못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당시 상황 속에서 이용익이 일본의 교육 현황을 접한 후 대한제국의 고등교육기관의 필요성을 느껴 설립하려 했음을 파악할 수 있다. 이와 같이 고등교육기관 설립이라는 시대적 요구에 맞춰 등장한 학교라는 점에서 보성전문학교가 가지는 가치는 매우 크다.
1910년 이후 다른 학교와 마찬가지로 보성전문학교는 운영진 및 교장의 망명, 투옥과 일제의 탄압으로 인해 운영난을 겪는 등 각종 수난을 겪는다. 이후 일제의 탄압 아래 격하되거나 교명을 바꾸고 학과 설립이 제한되는 등 여러 차례 존속의 고비를 넘긴다. 하지만 끊임없는 노력을 바탕으로 1921년 전문학교로 다시 승격되었으며 여러 위기를 거친 끝에 해방 후 고려대학교로 발족하여 오늘날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명신여학교는 1906년 5월 22일 고종(高宗)의 후궁인 순헌황귀비(純獻皇貴妃)의 지원으로 왕실 별궁 용동궁에 설립된 교육기관이다.
순헌황귀비는 본디 교육, 특히 여성 교육에 관심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는 명신여학교의 설립에 앞서 1906년 4월에 진명여학교(進明女學校)를, 1907년에 경영난에 처해 있던 양정의숙(養正義塾)을 도운 점에서 잘 드러난다.
한편, 당시 여성 교육 관련 배경은 다음과 같다. 앞서 기술된 바와 같이 1905년 을사늑약 전후로 교육구국이 일어나 전국 각지에서 민족사학이 설립되었으나 여성을 위한 교육기관은 부족한 실태였다. 당시 설립된 여성 교육기관으로는 이화학당, 정신여학교, 숭의학교 등이 있었으나 이는 모두 선교사, 즉 민족에 의해 설립된 학교가 아니었다.[6] 이와 같은 상황 속에서 여성 교육기관의 필요를 절감하고 이를 실현하기 위해 노력한 것은 순헌황귀비의 시대적 통찰력을 반영하는 부분이다.
위와 같은 순헌황귀비의 설립 목적은 대한매일신보의 글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50px-Quote-left.png 황귀비 흥학: 황귀비 전하께오서 여자 교육이 없음을 크게 걱정하여 육군참장 엄주익씨 집(第)에 여학교를 설립하여 여자교육을 발달시키고자 하였다. 엄주익에게 학교 설립 일을 전담하게 하시니 대한여자의 교육이 앞으로 발달하기를 가히 볼 수 있을 지로다. 50px-Quote-right.png
출처:『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 1906년 4월 24일자[7]

광복 후 명신여학교는 숙명여자중학교(淑明女子中學校)와 숙명여자고등학교(淑明女子高等學校)로 이어졌다. 나아가, 여성 고등교육기관의 설립을 꿈꾼 교장 이정숙(李貞淑)의 뜻에 따라 1938년 숙명학원(淑明學園)에서 숙명여자전문학교를 설립하였고, 이것이 오늘날 숙명여자대학교(淑明女子大學校)로 계승되었다.

신채호(申采浩)

선교사 설립 교육기관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연희전문학교는 1915년 선교부연합위원회의 협의를 얻어서 북장로회 선교사인 언더우드가 조선기독교학교로 처음 설립하였다. 이후 1917년 연희전문학교로 발족하였다. 보성전문학교 이후 두 번째로 설립된 전문학교이다. 이후 3.1 운동등 다양한 독립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으며 1944년 일제가 경영권과 재산을 몰수하고 한국인 교수진들을 모두 추방했었다. 독립 후에는 연희대학교로 이름을 바꾸고 대학교로 승격하였다.

세브란스는 대한제국의 궁정어의였던 알렌에 의해 1885년에 설립된 제중원에서 시작하였고, 1886년부터 제중원 내 의학부를 두고 입학생을 받았다. 이후 병원장으로 취임한 선교사 에비슨이 1899년 조선 최초의 의학교인 제중원의학교를 설립하였다. 1904년 미국인 세브란스의 후원으로 세브란스 병원이 세워지며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로 개편하였다. 1906년에 간호부가 개설되었고 우리나라 최초의 간호사를 배출하였다. 세브란스와 연희전문학교 간의 병합은 1920년대에도 한차례 시도한 바 있었으나 무산되었고, 독립 후 1957년에 두 학교가 통합되어 연세대학교로 출범하였다.

배재학당

1885년 선교사 아펜젤러가 세운 한국 최초의 근대식 사립학교로 중등과정을 담당했다. 1886년이 고종이 배재학당이라는 이름을 사하였고 미국인들의 후원을 받아 1887년에 제대로 된 건물을 세웠다. 영어교육을 중점적으로 행했으며 학생자조정책을 채택하여 가난한 학생들이 학교에서 일을 하며 수업료를 벌 수 있도록 하였다. 현재 기존의 건물은 2008년부터 배재학당역사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으며, 배재중학교, 배재고등학교, 배재대학교가 그 명맥을 이어가고 있다.

배화학당

초,중등과정의 사립학교로 1898년 켐벨 선교사가 설립하였다. 처음엔 캐롤라이나학당으로 기독교전파와 여성교육을 목표로 세웠졌다. 1910년 배화학당으로 개칭하였다.1916년 1월 경성 누하동(지금의 서울 종로구 필운동)으로 교사를 이전하고, 1926년 12월 캠블기념관을 신축하였으며, 1938년 3월 배화고등여학교와 배화여자소학교로 분리,개편되었다. 일제의 신사참배요구를 거절한 기독교 학교 중 하나이다. 1940년대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자 선교사들도 학교를 떠나며 위기에 폐교 위기에 봉착했다. 학교가 경영난에 시달리자 일제는 학교의 운영권을 요구했으나, 당시 교사였던 이덕봉과 이만규가 독지가를 구하려 노력한 끝에 이민천이 춘천, 이천, 연기, 익산 등지에 있는 토지를 기부하여 위기를 벗어날 수 있었다. 독립 후 1951년 배화여중과 배화여고로 분리되었다.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

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

50px-Quote-left.png 신민회 행동강령

1.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2.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3.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4.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

50px-Quote-right.png
출처:「헌기제501호, 「대한 신민회 취지서 및 동회 통용 장정 등 보고 건」, 1909년 3월 5일(국사편찬위원회, 『통감부문서』 6, 1991


신민회(新民會)는 1907년에 안창호(安昌浩), 양기탁(梁起鐸) 등의 주도로 결성된 항일 비밀결사이다. 위와 같은 신민회의 행동 강령을 바탕으로 신민회는 실력 양성을 통한 국권 회복을 주장하며, 교육, 언론 및 출판, 민족 산업 육성, 독립군 양성 등 다양한 활동을 전개했다.

신민회는 실력 배양의 방법으로 교육 구국 운동을 두 가지 측면에서 전개하였다. 국민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교육의 필요성을 계몽하여 학교설립을 고취하며 신민회도 학교를 설립하여 국권회복에 필요한 적합한 교육방침을 강구하여 민족 지도자를 양성한다는 것이다. 또한, 국외에서 독립군 기지를 창설하고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을 일으켜 국권을 회복한다는 것이다.

신민회는 이를 위해 민중들이 설립한 학교에 대해 학교교육방침을 지도하였다. 또한, 중학교를 설립하고, 학교의 모범을 만들며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해 교사를 양성한다는 기준을 세우고 학교를 설립하였다. 당시 민간인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갹출하여 설립한 학교는 대부분이 소학교였기 때문에, 신민회는 중학교를 설립하여 소학교 출신 청소년들이 더 양질의 교육을 통해 민족지도자로 발돋움할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신민회는 기본적으로 비밀결사이기 때문에 그들이 설립한 학교의 수를 정확히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1907년부터 1909년 4월까지 민간인들에 의해 세운 학교가 3000여 개교에 달한다는 통계로 보아 신민회에서 세운 학교가 많으리라 추측할 수 있다. 알려진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는 다음과 같다.

[신민회가 설립한 학교]
학교명 설명
대성학교 안창호(安昌浩), 윤치호 평양에 설립. 신민회가 설립한 대표적인 민족 사학으로 입학 지원자가 500~600여 명이 되는 때도 존재.
오산학교 평안북도 정주군에 이승훈 설립. 김소월, 백석, 이중섭, 독립운동가 김홍일 중장 등을 배출. 현재 서울 오산고등학교로 계승됨
점진학교 평안남도 강서 위치, 안창호(安昌浩) 설립. 남녀공학을 실시한 최초의 소학교.
보창학교 강화도 위치, 이동휘 설립
신안학교 정주, 신민회 정주지회 회원 설립
양실학교 의주, 신민회 의주/용천지회 회원 설립
가명학교 신민회 납청정지회 회원 설립
신흥학교 선천, 중학교급 학교
홍양학교 신민회 곽산지회 회원
명륜학교 함경남도 영흥읍에 있던 세 개 학교 통합, 이동휘 설립
경성학교 함경북도 경성 위치
양산학교 황해도 안악읍 향천자리, 김용제 설립, 신민회가 중학교로 개편
오성학교 서울 위치, 이갑, 이종화 설립. 신민회 창건 후 각종학교인 서북협성학교로 개편


신민회의 애국계몽은 학교 설립뿐만이 아니라 학회의 설립과 지도를 통해서도 추진되었다. 안악군면학회(安岳郡勉學會), 해서교육총회(海西敎育總會),평양청년권장회(平壤靑年勸?會), 연학회(練學會), 동제회(同濟會)등의 학회를 전국에 조직하는 데에 앞장섰다. 또한, 서우학회, 한북학회를 서북학회로 통합 재조직하는 등, 기존에 있던 학회의 통합과 재정비에도 이바지하였다.

이와 같이 신민회의 교육계몽운동은 신민회가 1912년 105인 사건으로 해산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그 이후에도 다른 독립운동단체에 영향을 미쳐 교육을 통한 민중 계몽으로 이루어지는 독립운동의 방향성을 제시하였다.

농촌 계몽 운동

농촌 계몽 운동은 1920년대~1930년대 민족 운동과 관련한 청년 학생이나 지식층이 농민의 의식과 지식 등을 계몽하기 위해 농촌 사회에서 행한 사회 교육 운동을 의미한다. 농사일을 끝낸 후 강연회, 토론회, 야학 등의 형식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농한기인 겨울에 많이 실시되었다.

1920년에는 일제의 식민 지주 경영과 지주 착취로 인해 농민 운동이 전국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고, 이와 맞물려 1924년 조선노농총동맹이 결성되었다. 이때 사회주의 계열 청년 단체와 지식인들이 농촌으로 진출하여 농민 운동을 주도하였다. 민족주의 계열에서 주도한 농촌 운동은 문맹 퇴치와 생활 개선 등의 계몽적 활동이 중심이었다. 대표적으로 천도교 계열의 농촌 운동, 기독교 계열의 농촌 운동이 있다. 천도교는 1925년 조선농민사를 설립하여 농민 야학을 시행하고 전국적으로 농민에 대한 계몽 활동을 전개하였다. 기독교에서는 1926년 이후 학생 YMCA 농촌부를 중심으로 계몽 활동을 적극 추진하였다.

1920년 후반부터 1930년대에는 언론사 또한 농촌 계몽 운동에 힘을 쏟았다. 대표적으로 1929년부터 1935년까지 이루어진 조선일보사의 문자 보급 운동과 1931년부터 1934년까지 이루어진 동아일보사의 브나로드 운동이 있다.

그러나 이런 농촌 계몽 운동은 1930년대 들어 강화된 조선총독부의 조선어 사용 금지 정책과 지방 농촌의 몰락으로 인해 쇠퇴하였다. 또한, 농촌의 몰락 책임을 수탈 때문이 아닌 농민의 게으름과 무지에 있다며 총독부의 주도로 농촌진흥운동을 진행하며 민간 및 언론 단체의 농촌 계몽 운동을 탄압하였다. 그러나 이런 탄압 속에서도 농촌 계몽 운동은 비밀리에 이루어졌다. 이러한 민간 교육 활동 및 정책은 해방 이후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문맹 퇴치 운동으로 이어졌다.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은 1920년대 이루어진 민족 사학 설립 운동이다.

1920년대 초 식민지 조선에서는 민중의 자발적인 참여하에 조선인을 위한 대학을 설립하려는 움직임이 등장하였다. 민립 대학 설립에 대한 논의는 1920년 6월 20일 한규설, 이상재, 윤치소 등 91년의 발기로 조선교육회 발기회가 개최되면서 시작되었다. 그러나 조선총독부가 학회령을 토대로 1922년 1월 24일까지 인가를 내주지 않아 민립대학 설립에 대한 결의를 실행시키지 못했다.

동아일보에 기고된 사설을 통해 당시의 독립을 위한 교육 계몽의 필요성과, 관립 대학과 다르게 민립 대학의 설립 필요성에 관해 확인할 수 있다.


50px-Quote-left.png 운명을 어떻게 개척할까. 정치냐 외교냐 산업이냐. 물론 이러한 일들 모두 다 필요하다. 그러나 그 기초가 되고 요건이 되며 가장 급무가 되고 가장 선결의 필요가 있으며 가장 힘 있고 가장 필요한 수단은 교육이 아니면 할 수 없다.
… 물론 관립대학도 조만간 개교될 것이기에 대학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우리 학문 발전의 장래는 결코 1개의 대학으로 만족할 것이 아니요, 또한 그처럼 중대한 사업을 우리 민중이 직접으로 영위하는 것은 차라리 우리의 의무라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우리들은 이에 느낀 바 있어 감히 만천하 동포에게 향하여 민립대학의 설립을 제창하니 자매형제는 와서 돕고 나아가 이루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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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開會된 民大總會」, 『동아일보』, 1923년 3월 30일자.


이렇게 고양된 민립 대학 설립을 통한 민족 교육에 대한 필요성을 바탕으로, 1922년 1월 이상재, 이승훈, 윤치호, 김성수, 송진우 등이 조선민립대학기성준비회를 정식으로 결성하였다. 이어 1923년 3월 29일 발기인 1170명 중 462명이 참석한 가운데 3일간 총회를 개최하였다.

총회에서는 '민립대학발기취지서'를 채택하고 대학 설립 계획서를 확정하였다. 계획서에 따르면 3개년 계획으로 자본금 1000만원을 갹출하는데, 제 1차 연도에는 대지 5만 평을 구입하여 교실 10동, 대강당 1동을 건축하고, 법과/경제과/문과/이과의 4개 대학 및 예과를 설치하며, 제2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공과/이과/기타 학과를 증설하고, 제3차 연도에는 300만원으로 의과/농과를 설치한다는 것이다. 또 중앙집행위원회를 구성하고 지방에 지방부를 두기로 결의하였다. 별도로 지방순회선정위원 13평을 선정하고 파견하였다. 이와 같은 노력을 토대로 1923년 말까지 전국 100여 개소와 해외의 만주 간도, 봉천, 미국 하와이 등지에도 지방부가 조직되었다.

기성회는 '한민족 1000만 한 사람 1원씩'이라는 구호를 내걸고 기금 모금에 나섰다. 이런 모금 활동에 민족 교육을 성원하는 마음들이 모였는데, 대표적으로 전라남북도에서만 15만원이 모금되었으며 경기도 안성의 이정도는 1년 동안 매일 아침 밥짓는 쌀에서 식구 수 대로 한 숟가락씩 모아 판 돈 19원을 기부하는 등 일반 민간에서의 성원도 뜨거웠다.

이와 같은 열기에 일제는 이를 교육 운동이 아니라 정치 운동이라고 판단하고 탄압하였다. '조선교육령'을 개정하여 관립 경성제국대학의 설립을 서두르고 민립대학과 관련 있는 인사들에 대한 탄압과 기금 갹출 방해 공작을 전개하였다. 민립대학기성회 인사들을 민족 사상을 가지고 있다는 구실로 철저히 감시하고, 기금 모집을 위해 박차를 가하던 인사들의 지방 강연을 배일사상을 고취한다는 이유를 내세워 강연 중지를 명하고 청중을 해산시켰다.

이러한 조선총독부의 탄압이 민립대학 설립운동의 실패의 주된 원인이 되었다. 1923년 여름 수재, 9월 일본 관동 대지진으로 인한 경제 공황, 1924년 한재와 7월 전국적 수재로 인한 농촌 경제 파탄 등 자연적인 여건도 민립대학 설립운동에 불리하게 작용했다. 그러나 3.1운동 이후 전 민족이 민족 교육이라는 이름 아래 조직체를 형성하여 교육을 통한 자주독립이라는 하나의 목표에서 단결을 보였다. 이는 이후의 민족운동 양상에서 조직적인 단체 결성의 표본이 되었다.

군사 교육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수많은 독립열사들은 무관학교 설립을 위한 활발한 활동을 이어왔다. 독립운동에서 가장 중요한 역량은 군사였기 때문에, 군사교육은 가장 중요한 과제 중 하나였으며 이에 따라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신흥무관학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위해 설립된 군사학교로, 독립군 양성과 무장 투쟁 기반을 마련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1911년 중국 만주 서간도 지역(현재의 지린성 류허현)에서 이회영, 이시영 등 독립운동가들이 설립했으며, 군사 지도자를 양성하고 실질적인 무장 독립운동을 준비하는 데 목적을 두었습니다.

교육 내용은 사격, 전술, 지형 분석 등 실전 중심의 군사훈련과 함께 민족의식을 고취하기 위한 역사 및 애국사상 교육으로 이루어졌습니다. 졸업생들은 청산리 전투와 봉오동 전투 같은 독립전쟁에서 활약하며 독립운동의 주축이 되었고, 김좌진과 이범석 같은 지도자를 배출했습니다.

1920년대에 들어 일본의 탄압이 강화되면서 학교 운영이 점차 어려워졌고, 졸업생들이 각종 독립운동 조직으로 흩어지면서 신흥무관학교는 군사훈련소 형태로 전환되다가 결국 해체되었습니다.

신흥무관학교는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군사교육 기관으로 평가받습니다. 이 학교는 독립군의 전투력을 강화하고, 독립운동의 실질적 기반을 마련했으며, 한국 독립운동의 전환점이 된 여러 전투에서 큰 공헌을 했습니다.

조선혁명간부학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8]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 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


한국 광복군의 모습
조선의용대 모습
조선의용대 깃발 가운데 있는 인물이 약산 김원봉이다.[9]


한인소년병학교

한인소년병학교는 장기적인 독립 투쟁을 대비하여 군사 교육을 받은 장교를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박용만에 의해 설립되었다. 한인소년병학교는 1909년 6월에 세워진 최초의 국외 설립 군사학교라는 점에서 의미가 있으며, 각지의 군사운동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한인소년병학교는 미국의 헤이스팅스(Hastins) 대학과 교섭하여 운영되었으며, 네브라스카 주에서 설립되었으나 교섭에 따라 헤이스팅스로 이전하여 한인 유학생의 활발한 참여를 이끌어냈다. 헤이스팅스 대학은 건물 한 동과 전장을 지원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할 수 있었다.


헤이스팅스 대학의 모습
한인소년병학교 학생들이 훈련했던 헤이스팅스 대학의 사진이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설립한 박용만이 미국의 하와이에도 같은 군사 훈련 단체를 설립하고자 하여 1914년 4월 15일 설립되었다. 당시 학도 수는 200여명으로 군단장 역시 박용만이 맡았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한인소년병학교를 계승하여 둔전병제식 훈련을 실시하였고, 군영이 호놀룰루 시의 동북 쪽 큰 산을 넘어 해안과 아후이마누 강을 낀 계곡에 위치하여 "산 넘어 아희들"이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하와이에서 군단과 사관학교를 설치하여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으나, 1916년을 고비로 점차 쇠퇴하여 1917년 경 해체되었고, 지역으로 흩어져 사실상 폐교되었다.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는 제 1차 세계대전의 발발로 미일(美日) 간 우호관계가 지속되면서 국민군단의 혁명적이고 군사적인 성격이 하와이 내에서 우호적인 반응을 얻지 못하였고, 이외에도 하와이 내 농장의 불경기로 수입이 급감하면서 재정 조달이 어려웠으며 1915년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실권이 이승만 측에 넘어가 박용만의 활동 범위가 위축된 점 등으로 인해 폐교되었다고 추측되고 있다.

숭무학교(崇武學校)

숭무학교는 1910년대 멕시코로 이주한 한인들이 일제강점기 한국의 독립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설립한 군사학교입니다. 멕시코에 이주한 한인들은 고된 노동 속에서도 민족 독립의 열망을 잃지 않고 독립운동을 조직적으로 지원하고자 노력했습니다. 1915년 멕시코 유카탄주 메리다 지역에서 설립된 숭무학교는 독립군 양성을 목표로, 체계적인 군사훈련과 애국 사상 교육을 실시했습니다.

이 학교는 멕시코 한인 사회의 독립운동 기반을 강화하고, 독립운동 자금을 마련하는 데 기여했습니다. 특히 숭무학교는 한인들의 단결과 민족의식을 고취하며 멀리 해외에서조차 독립운동을 지속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큽니다. 이러한 활동은 멕시코뿐 아니라 미주 지역의 다른 한인 독립운동 단체에도 영향을 주어 독립운동의 글로벌 네트워크 형성에 기여했습니다.

숭무학교는 해외 독립운동의 독특한 사례로, 한인 이민사와 독립운동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독립군으로의 발전

군사교육을 위해 설립된 다양한 무관학교를 기점으로, 졸업생들은 각기 다른 곳에서 독립군으로 발전했다.


신흥무관학교의 경우, 졸업생들은 만주 지역에서 서로군정서, 북로군정서에서 핵심 간부로 활약했을 뿐 아니라, 통의부의용군, 정의부, 신민부, 국민부 등에서 활동하였다. 또한, 중국 본토의 경우에서는 1919년 11월 길림에서 의열단을 결성하기도 하고, 임시정부 산하의 광복군인 한국광복군의 일원으로서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서 활약하였다. 이들은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는데, 대표적으로 임시정부 산하의 한국광복군과 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했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와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를 졸업한 졸업생들도 독립군으로 발전하였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기관으로 발전하였는지는 크게 알려진 바가 없다.

데이터 시각화

마인드맵

교육구국운동 노드 마인드맵.png

온톨로지


콘텐츠 구조

클래스(Class)

클래스 내용 노드
인물 독립운동사에서 교육 운동에 이바지하였던 인물을 포함한 다양한 독립운동가들을 인물로서 클래스로 설정했다. 이동휘 안창호(安昌浩) 김원봉 장제스 박용만 이갑성 스코필드 유기준 주시경 지청천 여운형 차미리사 김명시 남궁억 이동녕 이용익 김성수 신해영 강기덕 손병희 방정환 이종호 윤익선 염온동 주익 이세영 고종 순헌황귀비 박자혜 신채호 김종진 이정숙 이회영 김구 이석영 이상룡 윤기섭 이근영 한성순 양귀선 조병하 서문경 윤을희 이시영 박선봉 조금옥 양기탁(梁起鐸)
기관 부지를 두고 설치하여 활동했던 조직을 기관으로 설정했다. 연희전문학교 세브란스 배재학당 배화학당 보성전문학교 명신여학교 한인소년병학교 대조선국민군단사관학교 조선혁명간부학교 신흥무관학교 숭무학교 수원고등농림학교 신흥강습소
단체 기관보다 넓은 의미로서, 같은 뜻을 가지고 함께 활동했던 조직체를 단체로 설정했다. 신민회 협성회독립협회 한국광복군 조선의용대 조선의용군 화북조선독립동맹 대한민국임시정부 간우회 조선어학회 대한인국민회
지역 각 기관과 단체가 위치하거나 기관이나 단체, 인물이 활동했던 곳을 지역으로서 클래스를 설정했다. 미국, 한반도, 난징, 멕시코, 캐나다, 상해, 만주, 중국
활동_및_사건 각 기관이나 단체, 인물의 행동 및 사건을 묶어 활동_및_사건의 클래스를 설정했다. 브나로드 운동, 민립대학 설립 운동, 3.1운동, 6.10 학생 만세운동, 1920년 3.1 학생 운동, 서울 지역 학생 독립운동

관계성(Relation)

인물 중심 관계성 설정

  • 설립했다 인물 → 기관, 단체 : 기관 또는 단체의 설립에 기여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 지원했다 인물 → 기관, 단체, 활동 및 사건 : 단체, 기관, 활동 및 사건을 직접적으로 주도한 것은 아니나 보조적으로 지원했음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단체의 활동이나 기관의 설립 및 활동, 활동 및 사건의 전개의 지원을 모두 포괄하는 설명이다.
  • 출신이다 인물 → 기관, 단체, 지역 : 인물이 기관, 단체, 나라의 출신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지역의 경우, 해당 인물의 국적을 의미하며 외국인의 경우에만 해당 relation을 사용해 국적을 나타냈다.
  • 활동했다 인물 → 활동 및 사건 : 인물이 특정 활동 및 사건에 주도적으로 활동했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 중심 관계성 설정

  • 소속이다 기관, 단체 → 인물 : 인물이 기관의 소속임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기관의 경우 교육기관을 주로 다루기 때문에, 교육기관에 재학하였던 경우에는 '출신이다.' relation을 사용하였고 교직원 등으로 재직한 경우에는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구분하였다.
  • 위치하다 기관→지역 : 기관이 특정 지역에 위치하였음을 나타내는 relation이다. 위치를 옮긴 기관의 경우 위치했던 지역에 모두 해당 relation을 사용하여 연결했다.
  • 발전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특정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발전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 계승했다 기관, 단체 → 기관, 단체 : 기관 및 단체가 다른 기관 및 단체로 계승함을 설명하는 relation이다. 계승한 쪽을 종속 노드로 설정하였으나, 화살표 방향을 inverse로 설정해 '발전했다.' relation과 차이를 두었다.

교육기관 지도

기타

각주

  1. 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
  2.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
  3.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 및 설립자가 일부 수정되었다.
  4. https://www.kunews.ac.kr/news/articleView.html?idxno=3765
  5. https://library.korea.ac.kr/datause/archiving/old-book-exhibition/release/?mod=document&uid=10653
  6. 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7. 한희숙, 구한말 순헌황귀비 엄비의 생애와 활동, 아시아여성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아시아여성연구원, 제45집 2호, 2006, 227쪽.
  8. 급진적인 항일 투쟁을 목적으로 1919년 11월 조직되었던 독립운동단체로, 김원봉(金元鳳)이 단장을 맡았다.
  9. 김삼웅, "최후까지 총을 든 조선의용대와 김원봉", 오마이뉴스, 2024.02.06., https://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999602 (검색일:2024년 12월 4일)

참고문헌

1. 민족사학 발전과정 연대기 설명 내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