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사의 근간,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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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atnyeom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1월 27일 (수) 15:43 판 (조선혁명간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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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개요

기획의도

조선의 독립운동사는 근대교육을 위한 노력과 함께 전개되어 왔다. 교육 운동은 독립 운동의 일환으로서 민중을 계몽하기도 하고, 여성 교육이 발전하여 개화 사상이 유입되기도 했으며, 가장 중요하게도 군사 교육을 통해 민족이 싸울 힘을 기르기도 했다. 우리 민족은 당면한 고난과 역경을 극복하기 위해 교육의 필요성을 느끼고, 배움에 대한 열정으로 일제강점기의 어둠을 헤쳐나갈 수 있었다. 학생들이 독립운동을 생각했을 때 교육을 가장 먼저 떠올리지는 않는 듯하다. 다만, 교육은 독립운동사의 핵심적인 부분을 뒷받침하는 지지대였다. 따라서, 우리가 잘 몰랐던 독립운동사에서의 다양한 교육 운동과 교육의 중요성을 위키 페이지로 만들어 이들의 스토리를 전달하고자 한다.

팀원

2023130036 김윤 2023131227 최용빈 2023131540 정혜나 2024130814 이민희 2024130911 신다정

교육구국운동(敎育救國運動)

교육기관 설립

민족 설립 교육기관

민족사학의 의미

1. 민족사학의 정의: 우리 민족이 설립한 교육 기관
본 위키 페이지에서는 민족사학(民族私學)을 외세나 선교사에 의해 세워진 교육기관과 구분되는 것으로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일제강점기 전후에 우리 민족이 개인이나 사법인으로서 설립하여 경영하는 학교로 정의한다.
2. 민족사학의 정신 및 목적: 개화와 교육구국
민족사학의 정신과 목적은 개화교육구국으로 크게 두 가지 방향이 있다. 초기의 민족사학 설립 정신은 선진외국의 문화와 문물을 받아들여 나라를 개화하고 발전시키는데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었으나, 1905년 11월 17일 을사늑약(乙巳勒約)[1] 이후 교육 구국을 위한 인재 양성이란 민족적 희망에 기반하였다.

민족사학의 발전배경

당시 다수 지식인들은 나라를 진흥시키기 위해서는 교육이 필요함을 느끼고 있었다. 이러한 의식은 독립협회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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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사학의 발전과정

1800년대 후반부터 1910년 이전까지 주요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기관의 설립 과정을 정리[2]하였다.

이와 같이 1905년 이전에는 개화 및 신교육 도입 목적으로 1905년 이후에는 인재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을 목적으로 많은 교육기관이 설립되었다.

대표적 민족사학 기관

1910년 이전까지 민족 주도로 설립된 교육 기관 중 주요하게 살펴보아야 할 기관으로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가 있다. 보성전문학교는 이용익이 고종의 허가 하에 설립하였고, 명신여학교는 순헌황귀비의 지원 하에 설립되었음을 고려할 때, 모두 황실과 연관되어 있다는 점에서 진정한 의미의 사립 교육기관으로 보기는 힘들다는 한계는 존재한다. 그러나 보성전문학교 설립을 기점으로 '교육 구국'을 목적으로 한 민족 사학의 설립이 활성화 되었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 나아가, 민족 주도로 설립된 두 학교가 모두 각각 고려대학교와 숙명여자대학교의 고등교육기관으로 계승되었다는 점에서 그 가치가 크다.

보성전문학교(普成專門學校)
명신여학교(明新女學校)

신채호(申采浩)

선교사 설립 교육기관

연세대학교(延世大學校)

배재학당

배화학당

민간 단체의 교육 운동

신민회(新民會)의 애국계몽운동

브나로드 운동

민립 대학 설립 운동

대한자강회

군사 교육

독립운동사에서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군사 교육도 꾸준히 이어져왔다. 국내뿐만 아니라 국외에서도 독립군을 양성하기 위한 노력이 나타났다.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

조선혁명간부학교

1919년 조직된 무장독립운동단체 의열단은 중국국민당과의 합작을 통해 실질적인 군사 교육 기관을 설립하고자 노력했다. 이에 따라 장제스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의열단의 단장인 김원봉이 1932년 중국 난징에 ‘조선혁명간부학교’를 설립하였다. 공식 명칭은 사실 조선혁명간부학교가 아닌, ‘중국국민당 군사위원회 간부 훈련반 제6대’로, 국민당의 단기간부훈련소 신설반인 것처럼 위장했다.


학교는 일본과 중국의 외교관계를 고려해 학교운영 사실을 철저히 비밀에 부쳤다. 설립 초기에는 중국 외교부와 육군참모본부, 심지어 군사위원회 판공청 당사자들조차 그 존재를 모를 정도였다. 만 3년간 운영된 조선혁명간부학교는 3기에 걸쳐 총 125명의 인재를 배출했다. 국민당은 그동안 매월 경상비 2,000~3,000원·수시 필요경비 1,000~1만 원·기타 운영비 400~1,000원 등 각종 운영자금 전액과 화기·탄약·피복 등을 지원했다. 학생들은 군사학뿐 아니라 별도 신설된 정치학, 자연과학을 포함해 경제학·사회학·철학·혁명학·물리학·화학·지리학까지 다양한 학문을 공부할 수 있었다.


조선혁명간부학교의 졸업생들은 이후 민족혁명당의 항일투쟁체계에 편입되었으며 한국광복군조선의용대의 핵심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일부는 화북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에 가담하였다.

한인소년병학교

박용만 둔전병제

대조선국민군단 사관학교

숭무학교(崇武學校)

독립군으로의 발전

데이터 시각화

마인드맵

교육구국운동 노드 마인드맵.png

온톨로지


콘텐츠 구조

클래스(Class)

인물 / 기관 / 단체 / 지역 / 활동_및_사건

관계성(Relation)

Relation

설립했다 arrow #인물→기관 / 소속이다 arrow #기관(단체)→ 인물 / 지원했다 arrow #인물->기관 #인물->활동(사건) / 출신이다 arrow #인물 -> 나라 / 위치하다 arrow #기관→나라 / 활동했다 arrow #인물->활동(사건) #기관→ 사건 #단체→사건 / 관련있다 both #인물<->인물 #기관(단체) -> 기관(단체) / 발전했다 arrow #기관(단체) -> 기관(단체) / 계승했다 inverse #기관(단체) -> 기관(단체) (계승당한쪽이화살표를맞도록) / arrow #중심노드연결

교육기관 지도

기타

각주

  1. 대한 제국 광무 9년(1905)에 일본이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기 위하여 강제적으로 맺은 조약. 고종 황제가 끝까지 재가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인 무효의 조약이다.(표준국어대사전 정의)
  2.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데이터베이스, 한민족독립운동사 국권수호운동Ⅱ Ⅳ. 국권수호를 위한 사회·문화운동 6. 사립학교의 구국운동 3) 민립학교 설립의 주체(https://db.history.go.kr/modern/level.do?levelId=hdsr_002_0010_0060_0030)의 데이터에 기반하여 자료 조사를 진행하였다. 자료조사를 통해 설립 연도가 일부 수정되었다.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