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두사
정의
건축물 정보
용두사(龍頭寺)
- 역사적 시대: 고려 시대- 962년(광종 13) 이전으로 추정
삼국유사에는“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1]
-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 특징: 의상이 왕명을 받아 세운 화엄종 사찰.
의상이 화엄의 큰 가르침을 베풀던 곳으로, 의상을“부석존자"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부석종"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절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 시대로 갈 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사건:
일화
관련 사건
용두사지 철당간
건축물 정보
- 역사적 시대: 고려 시대- 962년(광종 13)
삼국유사에는“의상이 태백산에 가서 조정의 뜻을 받들어 부석사를 세우고 대승교(대승불교)를 포교하니 영감이 많이 나타났다"고 전한다. 그리하여 신라 문무왕 16년(676) 2월에 의상대사가 문무왕이 뜻을 받들어 창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2]
- 위치: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남문로2가
- 특징: 의상이 왕명을 받아 세운 화엄종 사찰.
의상이 화엄의 큰 가르침을 베풀던 곳으로, 의상을“부석존자"라 하고, 그가 창시한 화엄종을“부석종"이라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한다.
엄격한 양식을 가졌던 삼국시대의 절과 달리 자유로운 건물의 배치를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경향은 고려와 조선 시대로 갈 수록 점점 심해진다. 회전문, 범종각, 법당, 안양문, 무량수전의 차례로 이루어지는 공간 구조는 화엄경의 질서와 세계관을 반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사건:
일화
두 가지의 관련된 일화가 존재한다. 예로부터 청주에는 홍수에 의한 재난으로 백성들의 피해가 많았는데, 어느 점술가가 이르기를 큰 돛대를 세워 놓으면 이 지역이 배의 형상이 되어 재난을 면할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 결국 이곳에 돛대 구실을 하는 당간을 세워 놓으니 재난을 피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청주를 주성(舟城)이라 이름하였다고 하는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팔도를 순례하던 연등사 주지 혜원이 청주 고을을 지나다가 하룻밤 쉬어가게 되었는데, 그날 밤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 “용두사에 들어가 배가 떠내려가지 않도록 돛대를 세워라.” 하고 말했다. 아침에 일어나 급히 용두사 주지스님을 만나니, 그도 똑같은 꿈을 꾸었다고 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꿈의 내용을 알 수가 없던 중 혜원이 혼자 우암산에 올라가 초막을 짓고 청주 고을을 살펴보다가 어느 날 밤중에 고을이 움직이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그 길로 내려와 용두사 경내에 철당간을 세웠다고 한다.[3]
관계
출처
- ↑ http://www.pusoksa.org/intro/history
- ↑ http://www.pusoksa.org/intro/history
- ↑ http://www.grandculture.net/cheongju/toc/GC00202635 디지털청주문화대전「주성과 용두사지 철당간 전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