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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들을 살펴보면, 정주의 [[오산학교]]·신안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강화 등지의 보창학교, 의주의 양실학교, 납청정의 가명학교, 안주의 협성안흥학교, 선천의 신흥학교, 곽산의 흥양학교, 영흥의 명륜학교, 경성의 경성학교, 안악의 양산학교·안악군면학회사범강습소, 서울의 협성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평양의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는 유명했다. |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들을 살펴보면, 정주의 [[오산학교]]·신안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강화 등지의 보창학교, 의주의 양실학교, 납청정의 가명학교, 안주의 협성안흥학교, 선천의 신흥학교, 곽산의 흥양학교, 영흥의 명륜학교, 경성의 경성학교, 안악의 양산학교·안악군면학회사범강습소, 서울의 협성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평양의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는 유명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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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2월 9일 (토) 12:06 판
신민회의 주요 활동 중 하나이다. 국권 회복을 위한 민력 양성 방법의 일환으로 진행된 교육구국운동은 크게 세 가지 측면에서 진행되었다.
- 첫째, 국민들에게 국권회복을 위한 신교육의 절실한 필요를 계몽, 학교를 세우고 신교육을 실시하도록 고취한다.
- 둘째 민중이 각지에 세운 학교의 교육 방침을 국권 회복에 적합하도록 지도한다.
- 셋째 신민회 자체가 우수한 학교를 세워 국권 회복을 위한 인재를 양성한다.
- 신민회가 민중이 세운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만 하지 않고 스스로 학교를 세운 곳엔 세 가지 특징이 있었다.
- 첫째, 중학교를 세웠다. 민중이 자발적으로 기금을 모아 세운 학교들은 대부분 소규모의 소학교였다. 신민회는 이런 지역에 중학교를 세워서 소학교 출신 청년들에게 중등 교육을 시킴으로써 고급 신지식을 습득한 민족 간부를 양성해 국권회복에 도움이 되도록 하였다.
- 둘째, 학교의 ‘모범’을 만들었다. 전국 각지마다 중학교를 세울 수는 없으므로 중요 지역에 모범이 될 만한 중학교를 다수 세웠다. 민중에게 ‘모형’을 제시해 줌으로써, 민중이 이 모형을 보고 동일한 종류의 중학교를 자발적으로 세우도록 유도하기 위해서였다.
- 셋째, 이 중학교에서 동시에 사범교육을 실시해 교사를 양성했다. 신민회는 그들이 설립한 중학교에서 사범교육을 받은 청년들이 교사의 길을 걷도록 많은 힘을 썼다. 그리하여 그들이 전국 각지에 흩어져 학교를 세우고 청소년들에게 국권회복에 적합한 신교육을 시켜서, 교육구국운동이 전국적으로 파급되도록 하였다.
이러한 목적으로 설립한 학교들을 살펴보면, 정주의 오산학교·신안학교, 평양의 대성학교, 강화 등지의 보창학교, 의주의 양실학교, 납청정의 가명학교, 안주의 협성안흥학교, 선천의 신흥학교, 곽산의 흥양학교, 영흥의 명륜학교, 경성의 경성학교, 안악의 양산학교·안악군면학회사범강습소, 서울의 협성학교 등이 대표적이다. 이 중에서도 평양의 대성학교와 강화의 보창학교는 유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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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학교>
<보창학교>
<양산학교>
이 시기에 이동휘 1인이 세운 학교만도 100여 개나 되었다고 한다. 신민회의 학교 설립과 교육구국운동은 그 자체로서 상당한 성과를 냈다. 뿐만 아니라, 이 시대의 애국계몽운동 중의 신교육구국운동에 큰 기둥이 되고 그것을 실질적으로 주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