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성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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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성학교

안창호평양에 설립한 중등 교육기관이다.


인재 양성을 통한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으로 설립된 대성학교는 교육 방침을 건전한 인격의 함양, 애국정신이 투철한 민족운동가 양성, 실력을 구비한 인재의 양성, 건강한 체력의 훈련 등에 두었다. 평양의 김진후, 선천의 오치은, 철산의 오희원 등의 재정적 원조로 설립하였으며, 개교 때의 입학생은 90여 명이었다.안창호는 자아혁신과 자기개조를 통하여 민족혁신과 민족개조를 이룩하려는 목적으로, 처음에는 전국의 각 도에 1개교씩 세워 그 출신으로 각 군·면의 초등학교를 지도하고자 하였으나 실현되지 못하였다.


1910년부터는 장응진을 소장으로 한 하기 사범강습소를 부설하여 교사들의 재교육을 실시하기도 하였다. 당시 대성학교 학생이던 김형식의 글에 의하면, 대성학교는 설립과 동시에 전국적인 성원과 지지를 얻었다. 중등학교 과정이었으나 수학을 중심으로 한 4학년 과정은 전문학교 정도와 대등하였고, 학교 설비도 중등학교로는 드물게 완비하였다고 한다. 특히 안창호는 ‘주인정신’을 교훈으로 삼아 독립정신 및 책임정신과 주체적 정신을 강조하고, 무실역행(務實力行)과 성실한 생활을 인격 양성의 기본철학으로 제시하였다. 또한, 나라를 구하는 데 힘이 필요하므로 군사관 정인목을 체육교사로 초빙하여, 체육시간에는 군대식 훈련을 강행하였다.

1909년 대성학교를 중심으로 한 여러 사립학교들이 일본 국기 불게운동을 전개하여 폐교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결국 1912년 봄 제1회 졸업생 19명을 배출한 뒤 일제에 의하여 폐교당하였다. 그 졸업생 중 독립운동가 서왈보, 오동진과 목사이자 작가인 전영택 등이 있다. 대성학교는 짧은 기간 동안이었지만 정주의 오산학교 등과 함께 평안도지방의 교육 구국운동에 앞장서서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여, 민족 항일기 초기의 민족교육기관으로서 그 의의가 크다.

기여

  • 대성학교에 대한 자료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페이지를 작성하였다. 정보의 양이 충분하지 않아 단락을 나누지 않고 한번에 작성하였다.
  • 교육구국운동 문서와 연결해 대성학교 설립이 교육구국운동의 일환이었음을 알기 쉽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