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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 및 주요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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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년===
 
===1894년===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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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br/>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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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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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
 
 
===1896년===
 
===1896년===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
1897년: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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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7년===
18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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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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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년===
5월에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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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
10월에 농상공부 참서관,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
 
1900년: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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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년===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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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
1901년:
 
  
1월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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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5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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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
1902년:
 
  
9월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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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년===
10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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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
1903년:
 
  
9월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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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년===
190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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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
  
3월 의정부 참찬에 임명되어 5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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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년===
7월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
+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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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년===
190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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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
  
4월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
+
===1905년===
5월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
+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
10월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
 
1908년:
 
  
6월 시종원경과 10월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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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6년===
2월 통감 이토 히로부미의 후원으로 대동학회 회원으로 참여.
+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
8월 기호흥학회에서 찬무부 찬무원 및 특별찬성회원으로 선정.
 
10월 권상사를 발기하고 한성부민회 산하 한성북부 관진방회 부회장으로 선임.
 
11월 대한산림협회 명예회원으로 위촉.
 
1909년:
 
 
 
1월과 2월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주5.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조문사로 다롄[대련]에 파견.
 
11월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
 
1910년:
 
 
 
8월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
 
1911년:
 
 
 
1월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 이왕직 찬시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2월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하고, 3월 사립 오성학교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에서 찬성원으로 활동.
 
4월 일성의숙(일성의학습소) 숙장을 맡음.
 
1912년:
 
 
 
1월 이문회를 창립.
 
8월 한국병합기념장을 받음.
 
1913년:
 
 
 
7월 귀족들의 식림사업을 위해 조직된 조선임업조합 보식원 창립총회에 참석해 부장으로 선출.
 
1915년:
 
 
 
7월 조선총독부가 식민통치 5주년을 선전하기 위한 조선물산공진회 경성협찬회 특별회원으로 250원을 기부.
 
9월 가정박람회 명예고문으로 위촉.
 
10월 일본적십자사 조선본부가 주는 유공상을 받음.
 
11월 다이쇼[대정] 천황 즉위대례식에 참석해서 대동회 기념 대례기념장을 받음.
 
1917년:
 
 
 
6월 순종이 ‘일본천황부부 알현’을 위해 일본으로 갈 때 배종.
 
1918년:
 
 
 
8월 경성구제회에 500원을 기부.
 
1919년:
 
 
 
1월 고종이 승하하자 고종국장 장의괘와 제관부장으로 임명.
 
2월 왕세자 이은과 일본 황실녀 나시모토노미야 마사코의 결혼을 일선융화의 상징으로 주장.
 
6월 조선농사개량주식회사 발기인, 10월 이토 히로부미 십년제 발기인, 12월 경성삼종현물매매시장㈜ 발기인으로 참여.
 
1920년:
 
 
 
2월 조선식산은행 감사에 선출되어 1930년 10월까지 재임.
 
4월 금배를 받음.
 
6월 해동은행 설립에 참가해 1대 취체역 사장과 1923년 3대 사장에 취임.
 
9월 조선협회 고문으로 활동.
 
1921년:
 
 
 
일선신탁㈜ 발기인.
 
1922년:
 
 
 
9월 조선식산조성재단 평의원.
 
1924년:
 
 
 
2월 훈1등 욱일대수장을 받음.
 
6월 동민회 회원으로 참여하고 10월에는 고문으로 추대.
 
1925년:
 
 
 
7월 중추원 고문으로 임명되어 1940년 8월까지 연임.
 
1926년:
 
 
 
4월 순종이 승하하자 국장 주감제거 및 고문에 임명.
 
11월 사단법인 경성방송국 창립총회에 참석해 취체역주8에 선임.
 
1928년:
 
 
 
8월 조선박람회 경성협찬회를 발기하고 평의원으로 선임.
 
1929년:
 
 
 
5월 조선저축은행 발기인.
 
9월 귀족들의 파산을 구호하기 위해 설립한 창복회 위원으로 선임.
 
1930년:
 
  
12월 수양단 조선연합회본부 찬조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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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193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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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
  
11월 단군신전봉찬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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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년===
193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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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
  
5월 조선방송협회 고문, 7월 만주국 건국기념으로 개최한 신흥 만몽박람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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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년===
1934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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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
  
4월 조선국방의회연합회 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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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1935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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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
  
5월 세계홍만자회조선주회 주석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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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년===
1937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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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
  
3월 조선신궁에서 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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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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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
  
 
==각주==
 
==각주==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
 
[[분류:박노수가옥, 걸어서 근현대사 속으로]]

2023년 12월 5일 (화) 19:35 판

윤덕영.jpg

개요

대한제국의 매국노이면서 경술국적, 친일반민족행위자이다. 호는 벽수이다.

생애

윤덕영(尹德榮)은 1873년 12월 27일에 서울에서 태어난 조선 시대의 인물로, 영돈녕부사 윤철구의 아들이자 후작 윤택영의 형이었다. 그의 조부인 윤용선은 조정 내의 원로 중의 원로로서 권력을 행사한 인물이었다.

1894년 윤덕영은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고, 1896년에는 아관파천 당시 비서관에 임명되어 조정에서의 영향력을 쌓아갔다.[1] 특히, 윤덕영의 권세는 동생인 윤택영의 딸이 황후에 책봉된 일로 더욱 강화되었다. 윤택영은 자신의 여동생 황후의 책봉을 통해 정치적 영향력을 증가시켰다.

윤덕영은 한일병합 조약 체결에 일조하고자 하는 데라우치 마사다케의 요청에 응해 합방을 위해 고종을 설득하려고 했다. 황실의 비밀을 이용하여 일본의 요구에 수긍시키려 했지만, 고종은 처음에는 거부적이었기에 윤덕영은 고종을 협박하였다.윤덕영은 끈질긴 노력 끝에 고종을 설득하였고 결국 합방에 합의하게 만들었다. 이로써 1910년에 조선은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고, 윤덕영은 자작의 작위를 받게되었다.

친일 혐의를 가진 조선 왕조의 친족으로, 왕실과 국가를 이용하여 부를 쌓고자 한 인물은 1940년 10월 18일에 세상을 떠났다. 그의 활동은 친일 행위로 평가되며, 그의 사망으로 그의 화려한 친일 행보는 종지부를 찍었다.

직책 및 주요활동

1894년

식년시에 입격주3하고 전시 병과에 합격.
7월에는 비서감 우비서랑이 되어 신사유람단 주12의 일원으로 일본에 다녀옴.

1895년

1월에 학부 참서관, 3월에 내각총리대신 비서관 겸 내각 참서관 겸 경연원 시독관, 7월에 규장원 교서에 임명.

1896년

7월 독립협회에 보조금 5원을 기부.

1897년

2월에는 대행왕후 만장서사관을 겸하고, 11월에는 중추원 3등 의관으로 임명. 독립협회에서 개최한 대한국경축회에 참석.

1898년

2월에 중추원 2등 의관으로 승진, 5월에는 프랑스 파리에서 열리는 만국박물회에 한성주재본국 박물사무위원으로 참여, 10월에는 농상공부 참서관.

1899년

7월에 내부 지방국장, 1월에 법부 법무국장 겸 법률기초위원.

1900년

10월부터 1907년 3월까지 여러 차례 궁내부 특진관으로 임명, 12월에 비서원경으로 재임하면서 서북철도국 의사장을 겸함.

1901년

1월에 경기관찰사로 부임하면서 경기재판소 판사를 겸하고, 5월에는 황해도관찰사로 전임되면서 황해도재판소 판사를 겸함.

1902년

9월에 일본이 경부선 철도부설에 착공하자 철도원 부총재로 임명되어 중앙관청으로 복귀, 10월에는 지계아문 부총재로 자리를 옮김.

1903년

9월에 비서원경 겸 내장원 감독으로 중앙은행 창설 사무위원을 맡음.

1904년

3월에 의정부 참찬으로 임명되어 5월에는 평리원 재판장을 겸하고, 7월에 의정부 찬정으로 승진.

1905년

4월에 일성의숙(一成義塾) 숙장을 맡음.

1906년

동생 윤택영의 딸이 황태자비로 책봉되어 가례를 올림.

1907년

4월에 규장각 학사 겸 시강원 일강관에 임명되어, 5월에 태의원경 겸 황후궁대부를 겸임하면서 10월에 일본 정부가 주는 훈1등 서보장을 받음, 11월에는 임시황실어진용급위호사무정리위원장으로 선임.

1908년

6월에 시종원경과 10월에 국조보감 교정관을 겸함.

1909년

1월과 2월에 순종이 남쪽지방과 서쪽지방을 순행주4할 때 호종, 10월에 이토 히로부미가 사망하자 고종의 조문사로 다롄[大連]에 파견, 11월에는 이토 히로부미 관민추도회를 발의하여 장충단에서 궁내부 대표로 치전주6하고 추도제문을 낭독, 이어 12월에는 일본적십자사 한국지부와 일본애국부인회 한국지부가 주최한 이토 히로부미 사망 50일 추도회에 참석.

1910년

8월에 시종원경으로 ‘합병조약’을 체결하는 어전회의에 참석해 데라우치 마사다케[寺內正毅]의 협박 · 회유에 동의하여 조인을 가장 적극적으로 가결시킴, 국권피탈에 앞장서 병합 직후인 10월에 일본 정부에게서 자작 작위를 받음, 천황 메이지[明治] 생일인 천장절(天長節) 행사에 초대받아 천황이 주는 주병(酒甁)을 받음.

1911년

1월에 은사공채 5만원을 받음, 2월에 이왕직 찬시(賛待)에 임명되어 1919년 10월까지 재임, 같은 달에 조양구락부 유지회를 발기해 조직, 3월에는 사립 오성학교(五星學校) 농림강습소에서 개최한 농담회(農談會)에 출석.

1912년

1월에 청와대 관리청 특별보위로 청와대를 철거, 폐점하면서 폐선된 자리에 3월에 한성도서관을 개설, 4월에는 일제의 명령에 따라 국내토지의 일본화정책을 실시하자 국내토지 일본화반대를 외치며 평양으로 향하는 약30만 명의 민중과 함께 평양 경찰서를 찾아가 ‘평양 호국반일 총독부 봉기군’을 결성하고, 5월에는 범일문화부시(崩日文化部始)의 개설을 선포하고, 6월에는 월인통송(月印通信)을 통하여 국민에게 독립을 외치면서 ‘광민회’(光明會)라는 애국단체를 창설.

각주

  1. 조부인 윤용선의 영향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