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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문서: 500px|미군정 사진 해방 직후 중앙청에 성조기가 걸린 모습이다. </br> =='''개요'''==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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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청은 남한 점령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점령지 남한의 급격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상유지 정책에 입각해 안정을 추구했다. 미군정청은 미국 대한정책의 대리인으로서 점령정책의 현지 집행자 역할에 충실했으며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소련에 대응하는 활동에 역점을 둔 해방공간에 있어서 과도기적 산물이었다. | 미군정청은 남한 점령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점령지 남한의 급격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상유지 정책에 입각해 안정을 추구했다. 미군정청은 미국 대한정책의 대리인으로서 점령정책의 현지 집행자 역할에 충실했으며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소련에 대응하는 활동에 역점을 둔 해방공간에 있어서 과도기적 산물이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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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방 직후 남한에 미친 영향== | ==해방 직후 남한에 미친 영향== |
2024년 6월 10일 (월) 20:59 판
목차
개요
1945년 9월부터 1948년 8월 15일까지 존속한 남한 통치를 위한 미국의 군정청이다.
배경
얄타 회담, 카이로 회담과 광복
2차 세계 대전의 종전이 눈 앞에 다가오자, 1945년 2월 미국, 영국, 소련은 얄타 회담을 실시하여 독일의 항복 이후 2, 3달여 안에 소련의 일본 전선 개입을 약조했다. 또한, 1943년 카이로 회담에서 미국, 영국, 중화민국은 일제 해체 후 '적절한 시기에' 한국을 독립시키기로 승인했으며, 1945년 8월 15일 일제가 항복함으로써 한국은 광복하였다.
미국과 건준
여운형은 광복 이후 기존의 건국동맹을 조선건국준비위원회로 확대했고 지방 세력의 호응에 힘 입어 그 세력을 넓혀 갔다. 9월 3일에는 내각 개편이 이루어지고 조선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으나, 내각 개편 과정에서 좌익 인사들이 대거 등용되면서, 중도 우파 세력이 탈퇴하였다. 우파, 극우 세력들은 애초부터 건준에 참여하지도 않았다. 결국 좌익 세력이 주를 이루는 좌경화된 단체인 조선인민공화국을 미국은 승인하지 않았고 결국 와해되었다. 미국은 가장 호응을 받은 건준뿐 아니라, 임시정부와 같은 여타 단체들 일체 인정하지 않았다. 선거와 같은 공식적 정부 수립 절차를 갖추지 않아 민주적 정당성이 결여된 단체들로 보았기 때문이다.
경과
미군정의 경과
점령 초기 한국인 사회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각종 자치기구들이 미군정에 의해 부정된 이후 밑으로부터 한국인들의 의사를 반영할 수 있는 기구는 없었다. 미군사령부 및 군정장관, 그리고 각 부서에 배치된 미국인 고문들이 중요 인사 임면, 법령 포고, 주요 정책을 결정하는 권한과 최종 결재권을 행사하였다. 특히 미군정기 내내 주한미군사령관과 군정장관이 최고 실권을 행사했다. 과도정부 설치 후에도 미군정은 재정, 귀속재산 관리, 원조물자 배분 등 점령통치의 물적 기반에 대한 부분은 행정권 이양에서 제외하여 최후까지 직접 관리하였으며, 치안분야에 대한 통제권도 계속 장악했다.
미군정청은 남한 점령 이후 대한민국 정부 수립에 이르기까지 점령지 남한의 급격한 정치적·사회적·경제적 변화를 추구하기보다는 현상유지 정책에 입각해 안정을 추구했다. 미군정청은 미국 대한정책의 대리인으로서 점령정책의 현지 집행자 역할에 충실했으며 북한을 지원하고 있는 소련에 대응하는 활동에 역점을 둔 해방공간에 있어서 과도기적 산물이었다.
해방 직후 남한에 미친 영향
미군정은 일제 식민지 통치조직보다 더 중앙집권화 되고, 효율적인 조직을 추구했고, 미군정 기구 개편은 그러한 의도를 반영했다. 경찰은 이른 시기에 미군정의 지시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일 수 있게 중앙집중화 되고, 확대되었다. 각급 행정기구는 중앙의 군정청으로부터 일사불란한 체계를 갖추었으며, 점령 당국인 미군정의 요구를 지방에 그대로 전달하는 통로가 되었다. 이들 행정기구를 움직이는 관료의 충원은 ‘훈련되고 경험 있는 관리들의 재임명’이 일반원칙이었고, 따라서 대부분 일제하의 관료들, 또는 우파 보수세력 중심으로 충원되었다. 미군정은 1945년 12월에 미국인한국인 양국장제도를 시행했고, 1946년 3월부터 군정의 한인화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는데 이는 점령당국이 충원한 구식민지관료 및 우익세력에게 행정실권을 부여하는 과정에 다름 아니었다. 이로 인해 남한은 친일파 축출 및 처벌의 적정 시기를 놓치게 된다. 또한, 한국의 통치를 두고 계속해서 소련과 논의하며 모스크바 3상회의, 미소 공동위원회 등이 개최되었으나, 원활한 합의에 이르지 못하였고 오히려 신탁통치 오보사건으로 인해 찬탁, 반탁 운동으로 좌우익 세력이 본격적으로 분열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이승만은 미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되자, 정읍발언을 하여 단독정부 수립에 대한 위기감을 고조시켜 좌우합작운동을 유발하기도 했으나, 여운형의 죽음으로 실패로 돌아갔고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제 1공화국이 출범하며 한반도 남쪽에는 자본주의, 자유 민주주의 이념의 남한 단독정부가 수립되게 된다.
관련 영상
참고문헌
<<德<<미군정의 경과와 한국에 미친 영향에 관하여는 송재경. (2014). 미군정 여론조사로 본 한국의 정치·사회동향(1945~1947) [석사학위논문, 서울대학교]. http://www.riss.kr/link?id=T13439285와 이계형. (2022). 미군정기 서울지역 좌·우익 정당·사회단체의 활동 공간 연구. 서울학연구,(87), 73-107, 10.17647/jss.2022.05.87.73 참조.>> <<미군정의 배경과 해방 직후의 상황에 관하여는 윤덕영. (2010). 8·15 직후 조선건국준비위원회의 조직적 한계와 좌·우 분립의 배경. 사학연구,(100), 826-8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