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우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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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애국단체 | ||
+ | |이미지 = 근우회_다른_사진.jpg | ||
+ | |단체 이름 = 근우회 | ||
+ | |한자 표기 = 勤友會 | ||
+ | |활동 기간 = 1927년 5월 27일 ~ 1931년 | ||
+ | |구성원 수 = | ||
+ | |주요 인물 = 허정숙, 유각경, 차미리사, 최은희, 김일엽, 정칠성, 유영준 등 | ||
+ | |이념 = 사회주의, 민족주의 | ||
+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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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간단한 설명== | ||
+ | ===근우회란?=== | ||
+ | {{글색 | ||
+ | |color=#F5F5F5 | ||
+ | |text='''근우회는 1927년 여성들이 조직한 좌우합작 독립운동, 여성운동 단체이다!''' | ||
+ | }} | ||
+ | <html> | ||
+ | <p align="middle"> | ||
+ | <iframe width="483" height="300" src="https://www.youtube.com/embed/clVfc9oEtUY" title="근우회 - 우리나라 최초의 전국적인 여성운동"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 | ||
+ | </htm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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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우』=== | ||
+ | {| | ||
+ | |[[파일:근우회.jpg|100px]]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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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span style="background:LightSteelBlue"><font color=#FFFFFF>'''근우회의 기관지'''</font></span></br> | ||
+ | ::'''1929년 근우회본부에서 여성의 의식개혁과 계몽을 목표로 발행한 회보이자 여성단체기관지이다.''' | ||
+ | ::1929년 5월 근우회본부에서 회원 및 일반여성에 대한 여성 의식개혁과 계몽을 목표로 발간한 기관지 성격의 여성잡지로 논설, 근우회, 부인강좌, 평론, 각종 상식, 소설 등의 문학작품, 회원들의 투고, 광고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근우회 창립후 2년만에 발행된 까닭에 2년간의 근우회운동의 활동을 정리하고, 이후의 전망과 여성운동의 방향성을 재조명하는 내용을 게재하였다. 창간호 이후 속간 여부는 정확하지 않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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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우회와 신간회의 관계=== | ||
+ | 근우회는 [[신간회]]의 '''외곽 지원 단체'''이자 '''자매 단체'''이다. 3.1 운동 이후 수많은 단체들이 해체되는 와중에, 여성단체들 역시 다수 해체되었다. 이후, 1927년 2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힘을 합쳐 [[신간회]]를 조직하자, 이를 본 여성 운동가들이 같은 해 5월, 같은 형태의 여성 단체인 근우회를 만든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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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립 배경== | ||
+ | {{글색 | ||
+ | |color=#F5F5F5 | ||
+ | |text='''근우회 역시 신간회와 비슷한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 ||
+ | }} | ||
+ | [[파일:근우회_시작.png|섬네일|center|우리는 근우회에 대해 얼마나 알고 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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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성립 과정=== | ||
+ | {|class="wikitable" | ||
+ | ! style="width:200px;"|사건 || 설명 | ||
+ | |- | ||
+ | | style ="text-align:center"| '''민족유일당 운동''' ||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됨에 따라 처음에는 항일민족운동의 노선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두 갈래로 갈라져 분열되게 된다. 이에 따라 국내 및 국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 두 계열을 점차 통합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결실로 1927년 2월 15일, '''[[신간회]]'''가 등장하였다. 여성운동가들 역시 민족유일당 운동에 맞춰 새로운 조직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다. 분열되어 있었던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은 점차 하나로 통합이 이루어졌고, 사회 각지에서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엘리트 여성들 역시 '''간친회'''라는 이름의 세력으로 힘을 합쳤다. | ||
+ | |- | ||
+ | | style ="text-align:center"| '''통합을 이끈 여성운동가들''' || | ||
+ | * <font color=SteelBlue>'''정칠성'''</font> : '''기생 출신'''의 여성이었지만, '''남녀평등'''의 시각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승마를 일찍부터 배웠다고 하는 여성이다. 3.1 운동 이후 사회주의 이념을 접하게 되었으며, 여성동우회 등의 단체에 참여, 일본 유학 등을 하며 엘리트 여성의 길을 걷고 있었다. 후에 1926년 봄에 조선으로 귀국한다. | ||
+ | * <font color=SteelBlue>'''황신덕'''</font> : 평양 숭의여햑교를 졸업하고 동경 일본여자대학교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엘리트다. <사회주의>라는 논문을 통해 사회주의 여성운동의 이론과 그 사상을 제시한 인물이기도 하다. | ||
+ | * 이 외에도 다양한 엘리트 출신 여성운동가들이 앞장서 여성독립운동 단체의 통합을 도모하였다. | ||
+ | |||
+ | |- | ||
+ | | style ="text-align:center"| '''사회주의 여성운동자간친회''' || 1926년 11월 14일, 경성여자청년회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 통합의 첫문을 연 계기로 여겨지는 회의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막혔던 장벽을 트고 가렸던 흉금을 헤치고 지금까지 여성운동의 소감을 말하여 종합한 결과 전조선 여성운동자의 통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깊이 느끼고 먼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을 합동키로 결의하였다"고 보도하였다.<ref>≪朝鮮日報≫, 1926년 11월 16일,<조선여성운동자의 통일전선 작성></ref> 이 간친회를 통해 두 단체의 합동총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을 선출하였고, 후에 임시의장까지 선출하며 안정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 ||
+ | |- | ||
+ | | style ="text-align:center"| '''합동총회''' || 1926년 12월 5일 개최된 '''합동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결의하였다.</br> | ||
+ | |||
+ | ① 본회가 한양청년연맹과 경성청년연맹의 통일을 위하여 조선청년동맹에 직접 가맹함을 3개월간 연기하고 두 단체의 동맹을 촉진키로 하여 촉진위원으로 김수준·조원숙·심은숙·박원희·신기숙 5명을 선정함.</br> | ||
+ | |||
+ | ② 부인의 교양 목적을 위해 연구반을 시급히 실시함.</br> | ||
+ | |||
+ | ③ 명년 1월 중순에 조선여성단체연합 대강연회를 열기로 함.</br> | ||
+ | |||
+ | ④ 명년 3월 신학년을 기하여 무산아동학원을 설립키로 하고 그 준비위원은 집행위원에 일임하기로 함.</br> | ||
+ | |||
+ | ⑤ 본회 발회식은 12월 21일로 정함.</br> | ||
+ | |||
+ | ⑥ 사무소는 당분간 조선여성동우회관을 사용함.</br> | ||
+ | |||
+ | 결의 사항의 내용들을 보면 이들이 사회주의 운동의 조선내 통일적 확산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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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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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근우회의 등장=== | ||
+ | {{글색 | ||
+ | |color=#F5F5F5 | ||
+ | |text='''민족유일당운동으로서 여성운동계의 통합·단일화의 촉진으로 1927년 5월 27일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 ||
+ | }} | ||
+ | |||
+ | ===발회식 거행을 위한 준비 작업=== | ||
+ | <div class="mw-collapsible mw-collapsed"> | ||
+ | <div style="text-align:left;"> | ||
+ | <font size="3"><span style="background:LightSteelBlue">'''발회식 준비를 위해 결의된 8개 항 <font color="White">(펼쳐주세요!) ▶▷▶</font>'''</span></font> | ||
+ | </div> | ||
+ | <div class="mw-collapsible-content"> | ||
+ | <div style="text-align:left;"> | ||
+ | '''제1항 부서 결정 및 부 역원 배치''' | ||
+ | |||
+ | ① 서무부:조원숙·차사백·박경식 | ||
+ | |||
+ | ② 재무부:김선·최은희·방신영·우봉운 | ||
+ | |||
+ | ③ 선전조직부:박신우·유각경·정칠성·정종명 | ||
+ | |||
+ | ④ 교양부:황신덕·김동준·김영순·박원희 | ||
+ | |||
+ | ⑤ 조사부:김활란·김현경·홍애시덕 | ||
+ | |||
+ | ⑥ 정치연구부:유영준·이덕요·현덕신 | ||
+ | |||
+ | '''제2항 상무위원선거''' | ||
+ | |||
+ | ① 서무부:박경식·조원숙 | ||
+ | |||
+ | ② 재무부:김선 | ||
+ | |||
+ | ③ 선전조직부:박신우 | ||
+ | |||
+ | ④ 교양부:황신덕 | ||
+ | |||
+ | ⑤ 조사부:김활란 | ||
+ | |||
+ | ⑥ 정치연구부:이현경 | ||
+ | |||
+ | '''제3항 지회 설치''' | ||
+ | |||
+ | ① 지부규약 기초위원으로 황신덕·김활란·이현경 3인을 선정. | ||
+ | |||
+ | '''제4항 각부사업''':각 부에서 1년간 집행할 사업 구체안을 작성하여 다음 집행위원회에서 통과케 할 것. | ||
+ | |||
+ | '''제5항 집행위원회 정기집회''':매월 1·15일을 정기집회일로 함. | ||
+ | |||
+ | '''제6항 회관''':회관은 당분간 무료로 사용할 곳을 얻고, 교섭위원으로 유각경·방신영·최은희를 선정. | ||
+ | |||
+ | '''제7항 발회식''' | ||
+ | |||
+ | ① 발회식 강연회의 개최. | ||
+ | |||
+ | ② 근우회가 지어서 당일 고창하며 회가 작성위원은 김동준·이현경·김활란. | ||
+ | |||
+ | ③ 발회식은 6월 17일. | ||
+ | |||
+ | ④ 발회식 준비위원 10인(각부 상무위원과 현덕신·정종명·최은희)을 선정. | ||
+ | |||
+ | '''제8항 평양 출장''' | ||
+ | |||
+ | ① 평양여자청년동맹 주최 강연회에 정칠성·정종명·박신우를 연사로 파견. | ||
+ | |||
+ | ② 이 기회에 지회 설치에 노력할 것. | ||
+ | |||
+ | ::(≪朝鮮日報≫·≪東亞日報≫, 1927년 5월 31일,<槿友會 發會式>). | ||
+ | </div> | ||
+ | </div> | ||
+ | |||
+ | |||
+ | ===근우회 발회식=== | ||
+ | {| | ||
+ | |[[파일:근우회_발회식.jpg|200px]] | ||
+ | | | ||
+ | * 『조선일보』 1927년 6월 19일 자에 실린 '''근우회 발회식''' 사진 | ||
+ | * 근우회의 등장은 <span style="background:LightSteelBlue">'''한국 근대여성운동에 있어서 새로운 이정표'''</span>가 되었다는 점이 의의가 있다. | ||
+ | * 근우회 발기총회의 '''40인의 발기인단'''은 다음과 같다:</br> 강아그니아·차미리사·김선·김순영·김영순·김활란·김은도·김일엽·김순복·길정희·정칠성·조원숙·梁邁倫·유영준·이현경·李德耀·이경식·박원희·박흥순·박신우·방신영·徐弼善·손정규·신앨버트·신숙경·유각경·異恩惠·金智子·정종명·鄭子英·鄭昭君·車士百·최은희·최활란·현덕신·홍애시덕·황신덕·李孝德·林順分·주세행·진숙봉 | ||
+ | |||
+ | |} | ||
+ | |||
+ | |||
+ | ==활동== | ||
+ | ===근우회 행동 강령=== | ||
+ | [[파일:근우회_활동.png|섬네일|300px|right|근우회는 어떤 활동을?]] | ||
+ | |||
+ | ◈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인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 | ||
+ | |||
+ | ◈ 일체의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을 타파한다. | ||
+ | |||
+ | ◈ 조혼을 폐지하고 결혼의 자유를 확립한다. | ||
+ | |||
+ | ◈ 인신매매 및 공창(公娼)<ref>공창이란 관청의 허가를 얻고 몸을 파는 행위를 하는 여자를 뜻한다.</ref>을 폐지한다. | ||
+ | |||
+ | ◈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한다. | ||
+ | |||
+ | ◈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을 철폐하고 산전 및 산후 임금을 지불하도록 한다. | ||
+ | |||
+ | ◈ 부인 및 소년공(少年工)의 위험 노동 및 야근을 폐지한다. | ||
+ | |||
+ | ===근우회 지회의 대표적인 활동 다섯 가지=== | ||
+ | # 여성의식향상을 위한 <font color=SteelBlue>강연회</font>와 <font color=SteelBlue>토론회</font> | ||
+ | # 회원 모집 및 회원간 친목을 위한 <font color=SteelBlue>야유회·체육대회 및 척사대회</font><ref>척사대회란 편을 갈라 윷으로 승부를 보는 놀이를 뜻한다.</ref> 등 | ||
+ | # 여성의 <font color=SteelBlue>기술교육</font>을 위한 <font color=SteelBlue>강습회</font> | ||
+ | # <font color=SteelBlue>학교기부금</font>이나 <font color=SteelBlue>어려운 동포구제</font>를 위한 음악회 등의 사업 | ||
+ | # 문맹퇴치를 위한 <font color=SteelBlue>부인 야학</font> | ||
+ | |||
+ | ===광주학생항일운동과의 관계=== | ||
+ | * 근우회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한 뒤, 이때 사건의 발단이었던 '''나주역 사건'''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 ||
+ | * 근우회의 운동가들은 각지의 '''여학교'''를 돌아다니며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참할 것을 격려'''하였다. | ||
+ | * 대표적인 인물로 <span style="background:LightSteelBlue">'''[https://ko.wikipedia.org/wiki/%ED%97%88%EC%A0%95%EC%88%99 허정숙]'''</span>이 있는데, 그녀는 '''근우회의 회원'''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font color=SteelBlue>'''대규모의 항일운동 시위'''</font>를 계획하였다. | ||
+ | |||
+ | ==근우회 지회== | ||
+ | <html> | ||
+ | <p align="middle"> | ||
+ | <iframe src="https://www.google.com/maps/d/u/0/embed?mid=1ryAflcyTyTAiLl9Fx6oSllqebPp4Lrg&ehbc=2E312F" width="100%" height="480"></iframe> | ||
+ | </html>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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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근우회 지회는 국내외로 약 '''60여 개'''가 있다. | ||
+ | * 본부의 경우 '''경성'''에 위치해 있다. | ||
+ | * 근우회도 '''[[신간회]]'''처럼 전국 다양한 곳에 지회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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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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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체== | ||
+ | ===해체 배경=== | ||
+ | 1. <span style="background:LightSteelBlue">'''신간회의 해소'''</span></br> | ||
+ | 1931년 1월부터 신간회의 일부 지회들이 해소를 결의하기 시작하면서 자매 단체였던 근우회 역시 영향을 받았다. 신간회는 일부 지회가 해소에 결의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해소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근우회 역시 해소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많은 이가 동조하진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근우회 신의주지회'''를 시작으로 근우회 역시 해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31년에 이르러서는 각 지회마다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으며, 근우회는 그렇게 끝이 나게 된다. 이렇게 좌우 합작 운동이 실패한 것은 당시 세계적인 분위기 자체가 사회주의 세력이 다시 민족주의 세력과 대립을 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ref>코민테른의 노선 변경이 가장 대표적인 사례이다.</ref> | ||
+ | |||
+ | |||
+ | 2. <span style="background:LightSteelBlue">'''일제 탄압'''</span></br> | ||
+ | '''조직운동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여성들'''은 일제의 탄압에 있어서 단체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사료에 따르면,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근우회 형성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우회가 활동을 하면 일제 무장경관과 사복형사가 항시 감시하며 축문이나 축사를 압수하고 의안토의를 금지시켰다. 집행위원회조차 자유롭게 진행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1928∼1930년에 걸친 근우회 연차 전국대회 역시 한 번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이것은 단체를 유지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다. | ||
+ | |||
+ |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유난히 심했던 이유==== | ||
+ | 근우회는 조직문제와 관련하여 내건 슬로건을 보았을 때, '노동부인 동원 슬로건'과 '학생에 대한 슬로건'을 내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일제가 탄압하기에 바빴던 <font color=SteelBlue>'''사회주의적인 측면'''</font>과 <font color=SteelBlue>'''반일민족운동적 측면'''</font>을 모두 띠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일제는 근우회 탄압에 다른 단체에 비해 더욱 힘을 썼던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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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3. <span style="background:LightSteelBlue">'''근우회의 조직 구성적 한계'''</span></br> | ||
+ | 근우회는 크게 두 갈래의 측면이 합쳐져 있는 형태였다. | ||
+ | # '''계급 투쟁'''을 통한 '''민중 해방'''을 주장하는 <font color=SteelBlue>사회주의</font> | ||
+ | # '''교육활동'''을 통한 '''민중 계몽'''을 주장하는 <font color=SteelBlue>기독교</font> | ||
+ | 이 중 사회주의 세력이 이탈을 함에 따라 근우회는 무너지게 되었다. | ||
+ | |||
+ | |||
+ | ==주석== | ||
+ | <references/> | ||
+ | |||
+ | ==참고문헌== | ||
+ | <font size= "2"> | ||
+ | *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07442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근우회] | ||
+ |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kc/view.do?levelId=kc_o400420 우리역사넷 근우회] | ||
+ | * [https://ko.wikipedia.org/wiki/%EA%B7%BC%EC%9A%B0%ED%9A%8C 근우회 위키백과] | ||
+ | * [https://www.i815.or.kr/upload/kr/magazine/magazine/41/post-432.html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근우회] | ||
+ | * [https://ncms.nculture.org/independence-movement/story/10913 지역N문화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 일제강점기 여성계의 좌우합작, 근우회(勤友會)>] | ||
+ | * [http://contents.history.go.kr/mobile/nh/view.do?levelId=nh_049_0040_0030_0050_0040 우리역사넷 근우회의 해소] | ||
+ | </font> | ||
+ | |||
[[분류:애국계몽운동]] | [[분류:애국계몽운동]] | ||
[[분류:까마귀]] | [[분류:까마귀]] |
2023년 12월 11일 (월) 20:40 기준 최신판
⁕- 근우회 -⁕ | |
단체 정보 | |
단체 이름 | 근우회 |
---|---|
한자 표기 | 勤友會 |
활동 기간 | 1927년 5월 27일 ~ 1931년 |
단체 구성 | |
주요 인물 | 허정숙, 유각경, 차미리사, 최은희, 김일엽, 정칠성, 유영준 등 |
이념 | 사회주의, 민족주의 |
목차
간단한 설명
근우회란?
근우회는 1927년 여성들이 조직한 좌우합작 독립운동, 여성운동 단체이다! |
『근우』
근우회와 신간회의 관계
근우회는 신간회의 외곽 지원 단체이자 자매 단체이다. 3.1 운동 이후 수많은 단체들이 해체되는 와중에, 여성단체들 역시 다수 해체되었다. 이후, 1927년 2월 사회주의 세력과 민족주의 세력이 힘을 합쳐 신간회를 조직하자, 이를 본 여성 운동가들이 같은 해 5월, 같은 형태의 여성 단체인 근우회를 만든 것이다.
성립 배경
근우회 역시 신간회와 비슷한 형태로 등장하게 되었다! |
성립 과정
사건 | 설명 |
---|---|
민족유일당 운동 | 1920년대 사회주의 사상이 유입됨에 따라 처음에는 항일민족운동의 노선이 사회주의와 민족주의의 두 갈래로 갈라져 분열되게 된다. 이에 따라 국내 및 국외에서 민족유일당운동이 일어나 두 계열을 점차 통합하게 되었고 이에 대한 결실로 1927년 2월 15일, 신간회가 등장하였다. 여성운동가들 역시 민족유일당 운동에 맞춰 새로운 조직을 구축할 필요성을 느꼈다. 분열되어 있었던 사회주의 여성단체들은 점차 하나로 통합이 이루어졌고, 사회 각지에서 활동하던 유학생 출신 엘리트 여성들 역시 간친회라는 이름의 세력으로 힘을 합쳤다. |
통합을 이끈 여성운동가들 |
|
사회주의 여성운동자간친회 | 1926년 11월 14일, 경성여자청년회에서 사회주의 여성운동 통합의 첫문을 연 계기로 여겨지는 회의이다. 당시 ≪조선일보≫는 "막혔던 장벽을 트고 가렸던 흉금을 헤치고 지금까지 여성운동의 소감을 말하여 종합한 결과 전조선 여성운동자의 통일을 도모하지 않으면 안될 것을 깊이 느끼고 먼저 경성여자청년회와 경성여자청년동맹을 합동키로 결의하였다"고 보도하였다.[1] 이 간친회를 통해 두 단체의 합동총회 개최를 위한 준비위원을 선출하였고, 후에 임시의장까지 선출하며 안정적인 행보를 이어나갔다. |
합동총회 | 1926년 12월 5일 개최된 합동총회에서 다음과 같은 사항들을 결의하였다. ① 본회가 한양청년연맹과 경성청년연맹의 통일을 위하여 조선청년동맹에 직접 가맹함을 3개월간 연기하고 두 단체의 동맹을 촉진키로 하여 촉진위원으로 김수준·조원숙·심은숙·박원희·신기숙 5명을 선정함. ② 부인의 교양 목적을 위해 연구반을 시급히 실시함. ③ 명년 1월 중순에 조선여성단체연합 대강연회를 열기로 함. ④ 명년 3월 신학년을 기하여 무산아동학원을 설립키로 하고 그 준비위원은 집행위원에 일임하기로 함. ⑤ 본회 발회식은 12월 21일로 정함. ⑥ 사무소는 당분간 조선여성동우회관을 사용함. 결의 사항의 내용들을 보면 이들이 사회주의 운동의 조선내 통일적 확산에 목적을 두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
근우회의 등장
민족유일당운동으로서 여성운동계의 통합·단일화의 촉진으로 1927년 5월 27일 근우회가 창립되었다. |
발회식 거행을 위한 준비 작업
발회식 준비를 위해 결의된 8개 항 (펼쳐주세요!) ▶▷▶
제1항 부서 결정 및 부 역원 배치
① 서무부:조원숙·차사백·박경식
② 재무부:김선·최은희·방신영·우봉운
③ 선전조직부:박신우·유각경·정칠성·정종명
④ 교양부:황신덕·김동준·김영순·박원희
⑤ 조사부:김활란·김현경·홍애시덕
⑥ 정치연구부:유영준·이덕요·현덕신
제2항 상무위원선거
① 서무부:박경식·조원숙
② 재무부:김선
③ 선전조직부:박신우
④ 교양부:황신덕
⑤ 조사부:김활란
⑥ 정치연구부:이현경
제3항 지회 설치
① 지부규약 기초위원으로 황신덕·김활란·이현경 3인을 선정.
제4항 각부사업:각 부에서 1년간 집행할 사업 구체안을 작성하여 다음 집행위원회에서 통과케 할 것.
제5항 집행위원회 정기집회:매월 1·15일을 정기집회일로 함.
제6항 회관:회관은 당분간 무료로 사용할 곳을 얻고, 교섭위원으로 유각경·방신영·최은희를 선정.
제7항 발회식
① 발회식 강연회의 개최.
② 근우회가 지어서 당일 고창하며 회가 작성위원은 김동준·이현경·김활란.
③ 발회식은 6월 17일.
④ 발회식 준비위원 10인(각부 상무위원과 현덕신·정종명·최은희)을 선정.
제8항 평양 출장
① 평양여자청년동맹 주최 강연회에 정칠성·정종명·박신우를 연사로 파견.
② 이 기회에 지회 설치에 노력할 것.
- (≪朝鮮日報≫·≪東亞日報≫, 1927년 5월 31일,<槿友會 發會式>).
근우회 발회식
활동
근우회 행동 강령
◈ 여성에 대한 사회적·법률적인 일체의 차별을 철폐한다.
◈ 일체의 봉건적인 인습과 미신을 타파한다.
◈ 조혼을 폐지하고 결혼의 자유를 확립한다.
◈ 인신매매 및 공창(公娼)[2]을 폐지한다.
◈ 농민 부인의 경제적 이익을 옹호한다.
◈ 부인 노동의 임금 차별을 철폐하고 산전 및 산후 임금을 지불하도록 한다.
◈ 부인 및 소년공(少年工)의 위험 노동 및 야근을 폐지한다.
근우회 지회의 대표적인 활동 다섯 가지
- 여성의식향상을 위한 강연회와 토론회
- 회원 모집 및 회원간 친목을 위한 야유회·체육대회 및 척사대회[3] 등
- 여성의 기술교육을 위한 강습회
- 학교기부금이나 어려운 동포구제를 위한 음악회 등의 사업
- 문맹퇴치를 위한 부인 야학
광주학생항일운동과의 관계
- 근우회는 광주학생항일운동이 발생한 뒤, 이때 사건의 발단이었던 나주역 사건에 대해서 대대적으로 알리는 역할을 하였다.
- 근우회의 운동가들은 각지의 여학교를 돌아다니며 광주학생항일운동에 동참할 것을 격려하였다.
- 대표적인 인물로 허정숙이 있는데, 그녀는 근우회의 회원으로, 여러 차례에 걸쳐 대규모의 항일운동 시위를 계획하였다.
근우회 지회
- 근우회 지회는 국내외로 약 60여 개가 있다.
- 본부의 경우 경성에 위치해 있다.
- 근우회도 신간회처럼 전국 다양한 곳에 지회를 설치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해체
해체 배경
1. 신간회의 해소
1931년 1월부터 신간회의 일부 지회들이 해소를 결의하기 시작하면서 자매 단체였던 근우회 역시 영향을 받았다. 신간회는 일부 지회가 해소에 결의하자마자 빠른 속도로 해소되기 시작했다. 이때부터 근우회 역시 해소론이 등장하기 시작하였는데, 처음에는 많은 이가 동조하진 않았다. 그러나 후에 근우회 신의주지회를 시작으로 근우회 역시 해소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1931년에 이르러서는 각 지회마다 활동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으며, 근우회는 그렇게 끝이 나게 된다. 이렇게 좌우 합작 운동이 실패한 것은 당시 세계적인 분위기 자체가 사회주의 세력이 다시 민족주의 세력과 대립을 하는 양상을 띠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4]
2. 일제 탄압
조직운동 경험이 상대적으로 적었던 여성들은 일제의 탄압에 있어서 단체를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을 수 밖에 없었다. 사료에 따르면,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은 근우회 형성 직후부터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근우회가 활동을 하면 일제 무장경관과 사복형사가 항시 감시하며 축문이나 축사를 압수하고 의안토의를 금지시켰다. 집행위원회조차 자유롭게 진행시킬 수 없는 형편이었다고 한다. 이러한 탄압으로 인해 1928∼1930년에 걸친 근우회 연차 전국대회 역시 한 번도 제대로 진행되지 못했고, 이것은 단체를 유지하는 데 큰 장애물이 되었다.
근우회에 대한 일제의 탄압이 유난히 심했던 이유
근우회는 조직문제와 관련하여 내건 슬로건을 보았을 때, '노동부인 동원 슬로건'과 '학생에 대한 슬로건'을 내세운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당시 일제가 탄압하기에 바빴던 사회주의적인 측면과 반일민족운동적 측면을 모두 띠는 것으로, 이로 인해 일제는 근우회 탄압에 다른 단체에 비해 더욱 힘을 썼던 것이다.
3. 근우회의 조직 구성적 한계
근우회는 크게 두 갈래의 측면이 합쳐져 있는 형태였다.
- 계급 투쟁을 통한 민중 해방을 주장하는 사회주의
- 교육활동을 통한 민중 계몽을 주장하는 기독교
이 중 사회주의 세력이 이탈을 함에 따라 근우회는 무너지게 되었다.
주석
참고문헌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근우회
- 우리역사넷 근우회
- 근우회 위키백과
- 독립기념관 홈페이지 근우회
- 지역N문화 <"조선 자매들아 단결하라!” 일제강점기 여성계의 좌우합작, 근우회(勤友會)>
- 우리역사넷 근우회의 해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