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황사 모전석탑"의 두 판 사이의 차이

dh_edu
이동: 둘러보기, 검색
 
(같은 사용자의 중간 판 4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6번째 줄: 6번째 줄:
  
 
===개요===
 
===개요===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ref>『동경잡기』에는‘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는 되지 못한다.</ref>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896</ref>
+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ref>『동경잡기』에는‘분황사9층탑(芬皇寺九層塔)’이라고 되어 있으나, 그대로 믿을 근거는 되지 못한다.</ref>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896</ref>
  
  
16번째 줄: 16번째 줄:
  
 
===의의===
 
===의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ref>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region=1&searchCondition=%eb%b6%84%ed%99%a9%ec%82%ac+%eb%aa%a8%ec%a0%84%ec%84%9d%ed%83%91&searchCondition2=&s_kdcdArr=&s_ctcdArr=&ccbaPcd1Arr=&ccbaKdcd=11&ccbaAsno=00300000&ccbaCtcd=37&ccbaCpno=111370030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1_0&sngl=Y</ref>  
+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ref>https://www.heritage.go.kr/heri/cul/culSelectDetail.do?culPageNo=1&region=1&searchCondition=%eb%b6%84%ed%99%a9%ec%82%ac+%eb%aa%a8%ec%a0%84%ec%84%9d%ed%83%91&searchCondition2=&s_kdcdArr=&s_ctcdArr=&ccbaPcd1Arr=&ccbaKdcd=11&ccbaAsno=00300000&ccbaCtcd=37&ccbaCpno=1113700300000&ccbaCndt=&ccbaLcto=&stCcbaAsno=&endCcbaAsno=&stCcbaAsdt=&endCcbaAsdt=&chGubun=&header=view&returnUrl=%2fheri%2fcul%2fculSelectViewList.do&pageNo=1_1_1_0&sngl=Y</ref>  
  
 
===여담===
 
===여담===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분황사 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2층 탑신 중앙부에 있던 방형 석함(方形石函) 안에서 [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897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분황사 석탑 사리장엄구는 7세기 전반 신라의 불사리 신앙과 사리장엄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다양한 공양물을 통해 왕실의 공예 문화와 국제 교역의 성과를 고찰할 수 있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897</ref>
+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분황사 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2층 탑신 중앙부에 있던 방형 석함(方形石函) 안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분황사 석탑 사리장엄구는 7세기 전반 신라의 불사리 신앙과 사리장엄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다양한 공양물을 통해 왕실의 공예 문화와 국제 교역의 성과를 고찰할 수 있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ref>https://encykorea.aks.ac.kr/Article/E0024897</ref>
==출처==
+
==각주==
  
 
[[분류: 콘텐츠 분야 7분반]]
 
[[분류: 콘텐츠 분야 7분반]]
[[분류: 시대별로 보는 불교 건축문화재]]
+
[[분류: 건축문화재]]
 
[[분류: 최준호]]
 
[[분류: 최준호]]

2023년 12월 9일 (토) 14:20 기준 최신판

대한민국 국보 제 30호

<출처: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건축물 정보

개요

현재 남아있는 신라 석탑 가운데 가장 오래된 걸작품으로, 돌을 벽돌 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모전석탑(模塼石塔)이다. 원래 9층이었다는 기록이 있으나 지금은 3층만 남아있다.[1] 『동경잡기(東京雜記)』에 의하면, 임진왜란 때 왜병에 의하여 허물어지고 그 뒤 분황사의 중이 개축하려다가 또 허물어뜨렸다고 하나 그 실상은 알 수 없다. 1915년에는 일본인들이 해체수리하였는데 현재의 상태는 이 때의 현상대로 복원한 것이다.[2]


특징

선덕여왕 3년(634) 분황사의 창건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추측된다. 탑은 넓직한 1단의 기단 위에 3층의 탑신을 착실히 쌓아올린 모습이다. 기단은 벽돌이 아닌 자연석으로 이루어져 있고, 네 모퉁이마다 화강암으로 조각된 사자상이 한 마리씩 앉아있다. 1층 몸돌에는 네 면마다 문을 만들고, 그 양쪽에 불교의 법을 수호하는 인왕상(仁王像)을 힘찬 모습으로 조각해 놓았다. 지붕돌은 아래윗면 모두 계단 모양의 층을 이루고 있는데, 3층 지붕돌만은 윗면이 네 모서리에서 위쪽으로 둥글게 솟은 모양이며, 그 위로 화강암으로 만든 활짝 핀 연꽃장식이 놓여 있다.[3]


의의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익산 미륵사지 석탑과도 좋은 대조를 이룬다. 특히, 부드러우면서도 힘차게 표현된 인왕상 조각은 당시 신라 조각양식을 살피는데 좋은 자료가 되고 있다. 인왕상은 모두 8구로서, 전체적으로 인왕의 역강한 힘을 느끼게 하는 조각으로서 7세기 조각양식을 잘 보여 주고 있다.[4]

여담

일제강점기인 1915년에 분황사 석탑을 해체·수리하는 과정에서 2층 탑신 중앙부에 있던 방형 석함(方形石函) 안에서 사리장엄구가 발견되었다. 분황사 석탑 사리장엄구는 7세기 전반 신라의 불사리 신앙과 사리장엄 방식을 살펴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다양한 공양물을 통해 왕실의 공예 문화와 국제 교역의 성과를 고찰할 수 있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5]

각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