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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iframe width="700" height="300" src="https://www.youtube.com/embed/jr03a55JddQ" title="아미타불은 누구인가? - 교리천재 (합본1)"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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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 | ==아미타불==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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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미타삼존도==== | ||
+ | 고려시대 불화로, 아미타불과 왼쪽의 관음보살, 오른쪽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등 삼존상을 각각 다른 화폭에 그리고, 제각기 2구의 협시보살들을 대좌 옆에 매우 작게 표현한 특징적인 불화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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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llery mode="slideshow" caption="아미타삼존도" heights="100px"> | ||
+ | 파일:삼존1.jpg|1330년(충숙왕 17)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19.4㎝, 가로 64.2㎝. 일본 호인사(法恩寺) 소장. 상부에 아미타불이 배치되고 하단 무릎 밑 좌우로 관음보살과 대세지보살이 앉아 있다. 그 위로는 두 제자가 배치되어 있어 오존도(五尊圖)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아미타불과 보살만을 들어 삼존도라 한다. | ||
+ | 파일:삼존2.jpg|198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아미타삼존내영도는 협시보살이 관음(觀音)과 세지(勢至)가 아닌 관음보살과 지장보살이다. 이러한 삼존 형식은 고려시대에는 그렇게 성행하지 않은 듯 다른 예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 ||
+ | 파일:삼존3.jpg|1897년 작. 모시바탕[紵本]에 채색. 세로 219㎝, 가로 188.8㎝. 조선 후기에 유행하는 군도식(群圖式) 구도와는 대조적인 간단한 삼존입상형식이다. | ||
+ | </gallery> | ||
====아미타구존도==== | ====아미타구존도==== | ||
고려시대 불화의 특징과 성격을 잘 나타내는 불화로서,아미타불화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존 아미타불에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고려의 독특한 사다리꼴 2단 구도를 보여준다. 아미타구존도는 아미타불상과 협시인 8보상의 도상을 합쳐서 통칭 아미타 8대보살도라고 말하고, 도상 형식으로는 아미타구존도라고 불리운다. | 고려시대 불화의 특징과 성격을 잘 나타내는 불화로서,아미타불화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존 아미타불에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고려의 독특한 사다리꼴 2단 구도를 보여준다. 아미타구존도는 아미타불상과 협시인 8보상의 도상을 합쳐서 통칭 아미타 8대보살도라고 말하고, 도상 형식으로는 아미타구존도라고 불리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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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구존1.jpg|1320년(충숙왕 7년)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77.2㎝, 가로 91㎝. 일본 나라현(奈良縣) 야마토고리야마시(大和郡山市) 마쓰오사(松尾寺) 소장. 여러 면에서 노영(魯英)이 그린 아미타구존도(1307년)와 비교되는 작품이다. | 파일:구존1.jpg|1320년(충숙왕 7년) 작. 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77.2㎝, 가로 91㎝. 일본 나라현(奈良縣) 야마토고리야마시(大和郡山市) 마쓰오사(松尾寺) 소장. 여러 면에서 노영(魯英)이 그린 아미타구존도(1307년)와 비교되는 작품이다. | ||
파일:구존2.jpg|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43㎝, 가로 87㎝. 일본 도쿠가와여명회(德川黎明會) 소장. 이 아미타구존도는 일본 구세아타미미술관(救世熱海美術館) 소장 「아미타삼존도」를 확대해서 8대보살로 구성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 파일:구존2.jpg|비단 바탕에 채색. 세로 143㎝, 가로 87㎝. 일본 도쿠가와여명회(德川黎明會) 소장. 이 아미타구존도는 일본 구세아타미미술관(救世熱海美術館) 소장 「아미타삼존도」를 확대해서 8대보살로 구성한 작품으로 생각된다. | ||
파일:구존3.jpg|세로 222.5㎝, 가로 166.8㎝. 비단바탕에 채색. 일본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이 아미타구존내영도는 화면이 비교적 넓어 8대보살이 좌우 대칭되게 배치되었고, 존상화(尊像畫)의 구존도와 흡사하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 파일:구존3.jpg|세로 222.5㎝, 가로 166.8㎝. 비단바탕에 채색. 일본 네즈미술관(根津美術館) 소장. 이 아미타구존내영도는 화면이 비교적 넓어 8대보살이 좌우 대칭되게 배치되었고, 존상화(尊像畫)의 구존도와 흡사하게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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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미타여래도==== | ||
+ |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는 서방 극락정토에 있으면서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왕생의 길로 이끌어주는 불교의 부처 중 한명인 아미타여래를 주로 그린 불화를 말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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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gallery mode="slideshow" caption="아미타여래도" heights="100px"> | ||
+ | 파일:여래1.jpg|1996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비단 바탕에 채색. 가로 52.3㎝, 세로 105.6㎝. 용인대학교박물관 소장. 정면을 향하고 있는 아미타여래 그림으로, 왼손은 가슴 높이만큼 들고 있고, 밑으로 뻗은 오른손은 손가락을 모두 펴고 연화대좌 위에 서있는 모습이다. | ||
+ | 파일:여래2.jpg|고려의 귀족 염승익(廉承益)이 만약 자신이 임종을 맞이한다면 아미타불을 만나 즉시 극락왕생하기를 기원하는 뜻에서 조성한 불화이다.왼쪽 방향으로 발을 딛고 있으면서 오른쪽으로 상체를 돌려 멀리 아래쪽을 내려다보고 있는 아미타불은 내영(來迎: 부처나 보살이 나타나 극락으로 맞아들임) 자세를 취하고 있다. 활력에 찬 풍만한 얼굴, 근엄한 이목구비,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개성 있는 얼굴은 노출된 가슴의 풍만함, 신체의 활력과 함께 이 아미타불을 생동감 넘치게 만들어 주고 있다. | ||
+ | 파일:여래3.jpg|외형적인 형식면에서는 1306년(충렬왕 32년) 작 아미타여래도(일본 네즈미술관 소장)와 거의 유사하여, 비슷한 시기에 제작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러나 형태면에서 머리 모양은 비슷하지만 얼굴이 1306년의 작품처럼 넓적하지 않고 동그란 편이다. 그리고 이마는 ︷모양이 아니라 반듯해서 양쪽으로 치켜 올라가지 않았다. 이목구비는 잘 조화되어 단아한 인상을 풍겨 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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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미타불의 출신과 원력을 잘 설명해 놓은 경전이 〈불설무량수경〉(2권. 강승개 譯. 252), 〈불설관무량수경〉(1권. 강량야사 譯. 424~442), 〈불설아미타경〉(1권. 구마라집 譯. 402) 등 정토3부경이다. | 아미타불의 출신과 원력을 잘 설명해 놓은 경전이 〈불설무량수경〉(2권. 강승개 譯. 252), 〈불설관무량수경〉(1권. 강량야사 譯. 424~442), 〈불설아미타경〉(1권. 구마라집 譯. 402) 등 정토3부경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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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각주== | ||
<references/> | <references/> |
2023년 11월 28일 (화) 23:45 기준 최신판
목차
아미타불
정의
아미타불은 대승불교에서 가장 널리 신봉되는 부처로서 서방 극락정토[1]를 관장하는 부처이다.
요약
아미타불은 서방 극락정토의 주인이 되는 부처를 가리키는 신앙 대상이다. 중국 인도의 범어[2]내용을 따라 무량수불 또는 무량광불이라고도 한다. 살아 있는 모든 자를 구제하고자 48원[3]을 세우고 오랜 수행을 거쳐 본원[4]을 성취하고 10겁[5] 전에 부처가 되었는데 지금도 서방의 극락세계에 머물면서 설법하고 있다. 뭇 생명 있는 자들은 ‘나무아미타불’이라는 염불을 통해 극락세계에 왕생하여 깨달음에 도달할 수 있다는 신앙에서 정토교[6]가 성립되었다. 우리나라에서는 아미타 신앙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며, 대부분의 사찰에서 극락 전에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다.
이름
의미
아미타불이란 명칭은 범어로, 아미타바붓다에서 나온 말이다. 여기서 아미타란 아미타유스라는 말에서 온 것으로 한문으로 음역[7]한 것이고, 무량수, 무령관 등이라고 의역하였다. 즉, 헤아릴 수 없는 수명과 광명을 가졌다는 두 가지 뜻의 음사[8]이며, 따라서 아미타불은 이 두 개의 덕성을 갖춘 부처라는 뜻이 된다.
유래
- 끝 없는 삶을 가진 이: 범어 "아미따유스(amitāyus)"에서 나왔고, 한자로는 무량수(無量壽)라고 표기한다. 그래서 무량수불로도 불리고, 아미타불이 있는 전각이름을 무량수전이라고도 한다.
- 끝 없는 빛을 가진 이: 범어 "아미따바(amitābha)"에서 나왔고, 한자로는 무량광(無量光)이라고 표기한다. 그래서 무량광불로도 불린다.
등장
등장 시기
아미타불이 처음으로 등장하는 대승 불교 경전은 기원전 1세기에 정리되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반주삼매경(般舟三昧經, Pratyutpanna Samādhi Sūtra)이다.
등장 배경
아미타불은 석가모니가 대승불교 보살의 이상상(理想像)으로 직시되고 대승불교에 의해서 구원불로서 존숭되었던 때에 출현된 부처로 보고 있다.
국가 영향
한국
- 미타신앙의 한국적 수용의 한 특성은 선(禪)과 극락정토의 회통(會通)적인 노력이다. 아미타불을 찾는 염불과 선이 둘이 아니라는 선정불이(禪淨不二)의 전통은 원효가 “오직 마음이 정토요, 성품은 아미타불과 같다(唯心淨土同性彌陀).”를 천명한 이래, 지눌(知訥)ㆍ보우(普愚)ㆍ혜근(惠勤)ㆍ기화(己和)ㆍ휴정(休靜) 등으로 이어져 지금까지도 그 전통이 계승되고 있다.
이름 | 원효(元曉) | 지눌(知訥) | 보우(普愚) | 혜근(惠勤) | 기화(己和) | 휴정(休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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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
소개 | 원효는 『대혜도경종요』, 『금강반야경소』, 『화엄경소』 등을 저술한 삼국시대 신라의 승려로, 많은 저술을 남긴 학승만이 아니라 일반 대중에게 부처의 가르침을 설파한 민중교화승으로도 중요하다. 종파주의적 풍조를 혁파하는 화쟁사상을 주장했다. | 지눌은 고려시대 『권수정혜결사문』, 『수심결』, 『원돈성불론』 등을 저술한 승려로, 선종(禪宗)의 중흥조로서, 돈오점수(頓悟漸修)와 정혜쌍수(定慧雙修)를 제창하여 선과 교에 집착하지 않고 깨달음의 본질을 모색하였다. | 보우는 고려후기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서 불교계의 통합을 도모한 승려로, 1368년에는 신돈의 참언으로 속리산에 금고되었다가 풀려나기도 했고, 정치와 불교의 혁신, 선문구산 통합 등에 대해서도 건의했으나 수용되지 않았다. | 혜근은 고려후기 원나라 연경의 광제선사 주지, 회암사 주지 등을 역임한 승려로, 중국의 지공(指空)·평산처림(平山處林)에게 인가를 받고 무학(無學)에게 법을 전하여, 조선시대 불교의 초석을 세웠다. | 기화는 조선전기 『원각경소』 · 『금강경오가해설의』 · 『함허화상어록』 등을 저술한 승려로, 조선 초기의 배불정책이 극에 이르렀을 때, 불교의 정법(正法)과 그 이치를 밝힘으로써 유학의 불교 비판의 오류를 시정시키고자 노력하였다. | 휴정은 조선시대 『청허당집』, 『선교결』, 『심법요초』 등을 저술한 승려로, “선은 부처님의 마음이고 교는 부처님의 말씀이다(禪是佛心 敎是佛語).”라고 주장하며 선교관을 펼쳤다. |
- 현재 우리나라의 사찰에서 아미타불을 봉안하고 있는 법당은 극락전(極樂殿), 미타전(彌陀殿), 무량수전(無量壽殿), 무량광전(無量光殿) 등으로 다양하게 불리며 아미타불은 불교 타력신앙의 중심부처로 인정되고 있다.
외국
‘극락정토’와 ‘서방’이라는 관념이 어디에서 왔는가 하는 점은 학자들에 따라 다르다. 인도에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사후의 천계가 불교적으로 순화돼 불국토로 변하는데 극락정토도 여기서 왔다는 주장이 있는가 하면, 서쪽에 있는 사막 가운데 존재하는 오아시스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이런 저런 주장에도 극락신앙과 아미타신앙이 1~2세기 경 북서인도를 주름잡았던 쿠샨왕조 문화권[9]에서 성립됐다는 점에는 대부분 동의한다. 초기의 아미타불상이 파키스탄 간다라지역이나 아프가니스탄 잘랄라바드 근방에서 출토된 것에서 이를 알 수 있다.
관련 유적
아미타불도
아미타불도는 불교의 이상향인 극락에서 가르침을 전하는 아미타불을 그린 불화이다.
이름 | 서울 지장사 아미타불도 (서울 地藏寺 阿彌陀佛圖) | 서울 수국사 아미타불도 (서울 守國寺 阿彌陀佛圖) | 서울 안양암 아미타불도 (서울 安養庵 阿彌陀佛圖) | 남양주 봉영사 아미타불도 (南楊州 奉永寺 阿彌陀佛圖)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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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 ||||
제작 시기 | 조선 말기 | 1907년 | 조선 말기 | 조선말기(조선 철종 4년, 1853) |
종목 |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1999년 05월 19일 지정) |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2007년 12월 27일 지정) | 서울특별시 시도유형문화재(2004년 09월 30일 지정) | 경기도 시도유형문화재(2011년 05월 02일 지정) |
소재지 | 서울특별시 동작구 동작동 호국지장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우정국로 55 (견지동, 조계사) 불교중앙박물관 | 서울특별시 종로구 창신동 130-1 안양암 대웅전 | 남양주시 진접읍 내각리 148 |
내용 | 아미타불이 설법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으로, 비단 바탕에 채색하였으며, 가로 223.5cm, 세로 138cm의 규모이다. 화면의 중심에 아미타불을 두고, 양 옆에 권속들을 배치하였는데, 형태가 풍만하고 정교하며 무늬가 화려하다. 5가지 색깔의 광배가 눈길을 끌며, 옷의 묘사가 도식화되어 있다. 적색과 녹색의 색상은 다소 탁하며, 코발트 빛깔의 짙은 청색은 19세기 말의 불화양식을 잘 보여준다. | 1907년에 편수 보암긍법(普庵肯法), 두흠(斗欽), 금어 봉감(奉鑑), 법연(法沿)범천(梵天) 등이 조성한 아미타후불화로, 대시주인 강문환ㆍ강재희가 황명을 받들어 황제, 황태자, 태자비, 귀비 엄씨, 의친왕과 비, 영친왕 등의 성수만세(聖壽萬歲)를 기원하며 제작한 것이다. | 가로 길이가 긴 화폭의 중앙에는 아미타여래가 원형의 두광과 신광을 갖추고 피어오른 연화대좌 위에 앉아 있다. 왼손은 결가부좌한 다리 위로 엄지와 중지를 결하였고 오른손은 가슴께로 들어 엄지와 검지를 결하였다. 아미타여래의 양쪽에는 가섭과 합장한 아난을 포함한 4명의 제자와 관음과 세지보살을 포함한 6보살, 그리고 사천왕이 자리하였다. | 아미타불도는 서방 극락세계를 주재하는 아미타부처님이 설법하는 장면을 묘사한 불화이다. 남양주 봉영사 아미타불도는 청련화좌(靑蓮華坐)에 가부좌를 한 채 앉아 있는 아미타부처를 중심으로 하단에는 협시보살인 관음과 대세지보살을 비롯하여 금강장(金剛杖)과 미륵보살(彌勒菩薩) 등 6대보살 및 사천왕을 좌우 대칭으로 배치하였다. |
의의 | 1870년 화장사 대웅전에 봉안하기 위해 조성된 아미타불화로, 가로로 긴 직사각형의 화면에 많은 인물들을 배치하면서도 정연한 배치로 인해 안정된 구성을 보여준다. | 수국사 아미타불도는 근대기 서울 · 경기 지역에서 제작된 아미타여래계 불화의 대표작 중의 하나이다. 당시 이 지역의 도상 공유 양상을 파악하는데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대한제국기의 황실 발원 불화라는 점도 의의가 크다. | 당대의 대표적 화사(畵師)인 경성(慶惺)스님의 작품일 뿐만 아니라 도상과 표현 기법 면에서 시대적․지역적 대표성을 가지고 있고 원형도 잘 유지되어 있다. | 전체적으로 주황색과 녹색의 조화가 안정감 있으면서 19세기 불화 가운데 비교적 높은 작품성을 보여주는 불화이다. 1853년(철종 4) 남양주 흥국사를 중심 무대로, 서울·경기 지역 화승들 가운데 가장 두각을 나타낸 경선당 응석의 첫 번째 참여 작품으로서 미술사적, 역사적, 학술적 가치가 인정된다. |
아미타삼존도
고려시대 불화로, 아미타불과 왼쪽의 관음보살, 오른쪽의 대세지보살(大勢至菩薩) 등 삼존상을 각각 다른 화폭에 그리고, 제각기 2구의 협시보살들을 대좌 옆에 매우 작게 표현한 특징적인 불화이다.
아미타구존도
고려시대 불화의 특징과 성격을 잘 나타내는 불화로서,아미타불화의 성격을 잘 나타내고 있을 뿐만 아니라 본존 아미타불에 시선을 집중하게 하는 고려의 독특한 사다리꼴 2단 구도를 보여준다. 아미타구존도는 아미타불상과 협시인 8보상의 도상을 합쳐서 통칭 아미타 8대보살도라고 말하고, 도상 형식으로는 아미타구존도라고 불리운다.
아미타여래도
아미타여래도(阿彌陀如來圖)는 서방 극락정토에 있으면서 죽은 이의 영혼을 극락왕생의 길로 이끌어주는 불교의 부처 중 한명인 아미타여래를 주로 그린 불화를 말한다.
기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은 진언(眞言)[10]으로 아미타불에 귀의한다는 의미이다. 나무(南無)는 범어로 ‘Namas(Namo)’의 음역으로서, 나모(南謨)ㆍ납막(納莫)ㆍ낭모(囊謨)라고도 한다. 번역하여 귀명(歸命)ㆍ귀경(歸敬)ㆍ귀의(歸依)ㆍ경례(敬禮)ㆍ구아(求我)ㆍ도아(度我)라고 한다. 뜻은 두 가지로 표현된다. Namas는 돌아가 의지한다는 뜻이다. 즉, 무한광명(無限光明=無量光)에 귀의하고, 무한생명(無限生命=無量壽)에 귀의한다고 하는 말이며, 다르마(dharma=法)에 귀의한다는 말이기도 하다. 진리 그 자체와 하나가 되어 왕생극락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하여 중생이 아미타불에게 진심으로 귀의하여 공경하며 따른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여섯 글자로 되어 있기에 육자명호(六字名號), 또는 줄여서 명호라고도 불리운다.
신화(전생 이야기)
기본적으로 아미타불은 석가모니가 대승불교 보살의 이상상으로 모셔지고 대승불교에 의해서 구원불로서 존숭되었던 때에 출현된 부처로 보고 있다. 『정토삼부경(淨土三部經)』[11] 중 하나인 『관무량수경』[12]에서는 위제희 부인이 세상에 환멸을 느끼고 사바세계와 같은 악하고 혼탁한 세상이 아닌 청정한 업으로 된 안락한 세계를 보여 달라고 청했을 때, 석가모니는 시방세(十方世)[13] 모든 부처님의 미묘한 불국토를 보여 주었다. 이에 위제희 부인은 “세존이시여, 이러한 여러 불국토는 모두 다 청정하고 광명이 충만합니다. 그러나 저는 그중에서도 아미타불이 계시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기를 원하옵니다.” 하였다.『무량수경』(4)에서는 아미타불이 과거에 어떤 수행을 거쳐 성불하게 되었는지를 설명하는 성불인연 설화[14]를 상세히 설하고 있다. 『비화경(悲華經)』[15]에 의하면 법장비구는 출가하기 전에 무쟁념왕(無諍念王)이라는 국왕이었으며, 세자재왕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왕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오랜 세월 수행한 결과 아미타불이 되었다고 한다.
경전
아미타불의 출신과 원력을 잘 설명해 놓은 경전이 〈불설무량수경〉(2권. 강승개 譯. 252), 〈불설관무량수경〉(1권. 강량야사 譯. 424~442), 〈불설아미타경〉(1권. 구마라집 譯. 402) 등 정토3부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