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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로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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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ml><iframe width="700" height="400" src="https://www.youtube.com/embed/ZOKQlHZjDwY" title="영상한국사 I 145 항일비밀결사 신민회 설립과 105인 사건" frameborder="0" allow="accelerometer; autoplay; clipboard-write; encrypted-media; gyroscope; picture-in-picture; web-share" allowfullscreen></iframe></html>
 
==창립==
 
==창립==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최광옥, 이시영, 이화영, 이상재, 윤치호, 이강, 조성환, 김구, 신채호, 박은식,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 등이 중심이 되었다.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최광옥, 이시영, 이화영, 이상재, 윤치호, 이강, 조성환, 김구, 신채호, 박은식,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 등이 중심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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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창호]]는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즉각 창립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결국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안창호]]는 [[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즉각 창립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결국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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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 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반면에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 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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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 창립 후 창건위원들은 즉각 자기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켜, 1910년경 회원수는 약 800명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한 숫자였다. 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되었다.
 
신민회 창립 후 창건위원들은 즉각 자기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켜, 1910년경 회원수는 약 800명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한 숫자였다. 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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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대 강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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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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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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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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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
  
 
==대한신민회통용장정==
 
==대한신민회통용장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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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밀결사==
 
==비밀결사==
신민회를 공개 합법 단체가 아닌 비밀결사로 조직한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가급적 적게 받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 조치에 의해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셋째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 추진의 핵심 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넷째 회원의 입회를 제한하고 엄선한 것은 일제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고, 다섯째 수구파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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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를 공개 합법 단체가 아닌 비밀결사로 조직한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가급적 적게 받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 조치에 의해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셋째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 추진의 핵심 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넷째 회원의 입회를 제한하고 엄선한 것은 일제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고, 다섯째 수구파<ref>정치·경제·문화 면에서 변화를 원하지 않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집단</ref>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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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구국운동]]===
 
===[[교육구국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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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산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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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산업진흥운동]]===
 
===[[민족산업진흥운동]]===
===[[청년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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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운동]]===
===무관학교설립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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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학우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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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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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는 국내의 활동에만 뜻을 두지 않았다.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내외의 호응을 얻어 단숨에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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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 문제를 최초로 검토한 것은 1907년 8월이었다. 일제가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그 이튿 날 해산식이 있자, 해산당한 군인의 일부가 봉기해서 의병운동에 합류, 의병전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이 의병운동을 지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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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가 의병운동에서 문제삼은 것은 일본 정규군과 대전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현대적 군사훈련과 무기였다. 신민회는 의병운동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회는 1907년부터 1908년 말까지 의병운동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했고, 둘째 이 시기에 의병운동이 고양되어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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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가 국외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운동이 퇴조기에 들어간 1909년 봄이었다.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창립, 현대전에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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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학교와 독립군 창건, 독립전쟁 전략 등은, 크게 볼 때 일제의 식민지 강점책이 진전되는 것에 대한 신민회의 응전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갑신정변·동학혁명운동·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실제 경험에 의해 종합 지양하여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개화자강파적 전략이며, 한국 근대민족운동의 여러 가지 전략들의 총결론과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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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는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1910년 4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김희선·이종호·김지간 등을 출국시켰다. 1910년 가을에는 이동녕·주진수 등이 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0년 12월부터 선발대인 이동녕·이회영 조가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 이주를 시작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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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의 신민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는 중에도,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이른 봄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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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신흥무관학교.jpg|500픽셀|cent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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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iv style="text-align:center"><font color="green">[[신흥무관학교]]</font></di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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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흥무관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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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인 사건]]==
  
==105인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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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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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민회에 대한 자료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창립, 4대 강령, 대한신민회통용장정, 비밀결사 이유, 활동, 105인 사건을 정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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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보 수용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된 유튜브 링크를 첨부했고 내용이 많은 활동은 대부분 개별 문서를 만들어 방대한 정보량을 보기 쉽게 만들었다.
  
 
[[분류:애국계몽운동]]
 
[[분류:애국계몽운동]]
[[분류:진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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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바밤🌰]]

2023년 12월 10일 (일) 09:26 기준 최신판

1907년 서울에서 조직된 비밀결사로 1911년 105인 사건으로 해체되었다.

창립

1907년 안창호의 발기로 양기탁, 전덕기, 이동휘, 이동녕, 이갑, 유동열, 안창호 등 7인이 창건위원이 되었다. 전체적으로 노백린, 이승훈, 안태국, 최광옥, 이시영, 이화영, 이상재, 윤치호, 이강, 조성환, 김구, 신채호, 박은식, 임치정, 이종호, 주진수 등이 중심이 되었다.

안창호대한매일신보 주필 양기탁을 방문하고 신민회 창립을 제의하였다. 안창호는 신민회를 비밀결사로 창립하자고 제안했고, 양기탁은 처음에 공개 단체로 창립하기를 희망하였다.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즉각 창립에 들어가지 못했다가, 결국 양기탁이 비밀결사 조직에 동의하여 창립이 추진되었다.

양기탁은 당시 대한매일신보 주필과 국채보상기성회의 총무로서 국권회복을 위한 애국계몽운동의 유력한 지도자였다. 때문에 국내의 애국 인사들과 긴밀하게 유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고, 민중들로부터도 큰 존경을 받고 있었다.

반면에 당시의 안창호는 비록 개인적인 역량은 뛰어날 수 있어도 그 동안 성장한 국내의 애국계몽운동 세력 안에 자기의 기반을 가지고 있지 못하였다. 이 때문에 안창호는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 때의 동지인 양기탁을 중심으로 하여 1907년 4월 초 신민회를 창립한 것이다.

최초의 부서는 당수에 해당하는 총감독을 양기탁이 맡고, 총서기에 이동녕, 재무는 전덕기, 집행원은 안창호가 담당했다. 다른 창건위원들은 각 도의 총감을 맡았다. 안창호가 맡은 집행원의 직책은 국내 동지들이 추천한 신입회원의 자격 심사를 담당하는 것으로서, 최근의 용어로 표현하면 조직부장과 같다.

신민회 창립 후 창건위원들은 즉각 자기의 영향력 안에 있는 인사들을 신민회에 가입시켜, 1910년경 회원수는 약 800명에 달하였다. 이는 당시의 영향력 있는 애국계몽운동가들을 거의 모두 망라한 숫자였다. 비밀결사로서의 신민회는 한말의 지도적 인사들이 거의 모두 회원이 됨으로써, 전국적 규모의 막강한 영향력을 가진 애국계몽운동 단체가 되었다.

4대 강령

  • 국민에게 민족의식과 독립사상 고취
  • 동지를 발하고 단합하여 국민 운동 역량 축적
  • 상공업 기관 건설로 국민의 부력(富力) 증진
  • 교육 기관 설립으로 청소년 교육 진흥

대한신민회통용장정

제2장 제1절에는 신민회의 목적이 담겨 있다.

  • 궁극적 목적은 국권을 회복하여 자유 독립국을 세우고, 그 정치 체제는 공화정체(共和政體)로 한다.
  • 당장 힘이 없어 국권을 박탈당하였으므로 무엇보다 국권을 회복할 수 있는 '실력 양성’에 온 힘을 쏟아야 한다.[1]
  • 실력을 양성하기 위해서는 국민을 새롭게 한다. [2]
  • 신민은 반드시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자신’이어야 한다.
  • 자신은 사회·국가·국민의 모든 부분에서 수행되어야 한다.
    • 신문·잡지와 서적을 펴내어 국민의 지식을 계발할 것
    • 각지에 계몽운동가들을 파견하여 국민의 정신을 각성시킬 것
    • 우수한 학교를 설립하여 인재를 양성할 것
    • 각지 학교의 교육 방침을 지도할 것
    • 실업가에게 권고하여 영업 방침을 지도할 것
    • 신민회 회원끼리 힘을 더해 실업장을 건설하여 실업계의 모범을 지을 것
    •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여 독립전쟁에 대비할 것
    • 국외에 독립군기지를 건설하고 독립군을 창건할 것
  • 실력을 배양하는 동안 국권회복운동의 주체로서 신민회를 육성, 국내외를 가리지 않고 애국적인 동포를 하나로 단합시키며, 각 구역에 연락기관을 나누어 세워서 연락과 교통을 긴밀히 한다.
  • 실력이 배양되면 신민회가 앞장서고 ‘자신’한 국민이 ‘통일연합’하여 비폭력 또는 무력의 각종 방법으로 일제히 궐기, 국권을 회복하고 자유 문명국을 수립한다.

비밀결사

신민회를 공개 합법 단체가 아닌 비밀결사로 조직한 이유는 크게 다섯 가지가 있다. 첫째 일제의 방해와 탄압을 가급적 적게 받으면서 국권회복운동을 효과적으로 수행하기 위해서였다. 둘째 일제의 법령이나 탄압 조치에 의해 해산당하지 않기 위해서였다. 셋째 일제가 한국을 식민지로 강점하는 경우에도 독립운동 추진의 핵심 단체로서의 역할을 다하기 위해서였다. 넷째 회원의 입회를 제한하고 엄선한 것은 일제 밀정의 침투를 방지하고, 다섯째 수구파[3]와 그에 동조하는 일부 국민들의 반감과 방해를 받지 않기 위해서였다.

활동

교육구국운동

오산학교

대성학교

민족산업진흥운동

청년운동

청년학우회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운동

신민회는 국내의 활동에만 뜻을 두지 않았다. 국외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독립군기지를 창건, 기회가 오면 독립전쟁을 일으켜서 내외의 호응을 얻어 단숨에 일본 제국주의를 물리치고 실력으로 국권을 회복하려고 하였다.

신민회가 국외에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 문제를 최초로 검토한 것은 1907년 8월이었다. 일제가 1907년 7월 31일 대한제국 군대를 강제 해산하고 그 이튿 날 해산식이 있자, 해산당한 군인의 일부가 봉기해서 의병운동에 합류, 의병전쟁을 전개하게 되었다. 신민회는 이 의병운동을 지지하였다.

신민회가 의병운동에서 문제삼은 것은 일본 정규군과 대전할 때 반드시 갖추어야 할 현대적 군사훈련과 무기였다. 신민회는 의병운동이 성공하려면 무엇보다 현대화가 필요하다는 걸 절감하고 있었다. 그러나 신민회는 1907년부터 1908년 말까지 의병운동의 문제점을 정확히 파악했으면서도 이에 대한 대책을 세우지 못했다. 그 이유는, 첫째 신민회의 실력이 부족했고, 둘째 이 시기에 의병운동이 고양되어 성과를 내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신민회가 국외의 무관학교 설립과 독립군기지 창건을 본격적으로 논의한 것은 의병운동이 퇴조기에 들어간 1909년 봄이었다. 신민회는 총감독 양기탁의 집에서 전국 간부회의를 열고, 국외에 적당한 후보지를 골라 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군기지를 창립, 현대전에서 이길 수 있는 강력한 독립군을 양성하기로 뜻을 모았다.

무관학교와 독립군 창건, 독립전쟁 전략 등은, 크게 볼 때 일제의 식민지 강점책이 진전되는 것에 대한 신민회의 응전이었다. 그것은 종래의 갑신정변·동학혁명운동·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운동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애국계몽운동과 의병운동을 실제 경험에 의해 종합 지양하여 한 단계 더 발전시킨 개화자강파적 전략이며, 한국 근대민족운동의 여러 가지 전략들의 총결론과 같았다.

신민회는 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군기지를 만들기 위해 1910년 4월 안창호·이갑·유동열·신채호·김희선·이종호·김지간 등을 출국시켰다. 1910년 가을에는 이동녕·주진수 등이 만주 일대를 비밀리에 답사하여 후보지를 선정하고, 1910년 12월부터 선발대인 이동녕·이회영 조가 비밀리에 독립군기지 건설을 위한 단체 이주를 시작하였다.

국내의 신민회가 일제의 탄압으로 해체되는 중에도, 신민회 회원들은 1911년 이른 봄만주 봉천성 유하현 삼원보에 신한민촌을 건설하고 신흥무관학교를 세우는 데 성공하였다.

신흥무관학교.jpg
신흥무관학교

신흥무관학교

105인 사건

기여

  • 신민회에 대한 자료 조사 내용을 바탕으로 창립, 4대 강령, 대한신민회통용장정, 비밀결사 이유, 활동, 105인 사건을 정리하였다.
  • 정보 수용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관련된 유튜브 링크를 첨부했고 내용이 많은 활동은 대부분 개별 문서를 만들어 방대한 정보량을 보기 쉽게 만들었다.
  • 입헌군주국이 협회의 공식 목표였던 독립협회와 달리 자유 독립국의 정치 체제를 공화국으로 규정한 것은 사상적으로 큰 진전이다.
  • 신민회가 민주주의 사상에 기초, 국가는 국민의 것이며 국가의 부강은 국가를 이루는 국민의 부강에서 나온다는 사상에 의거하고 있음을 나타낸다.
  • 정치·경제·문화 면에서 변화를 원하지 않고 기존의 것을 고수하려는 집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