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지필
생애
| 연도 | 내용 |
|---|---|
| 1898년 | 경남 의령에서 백정 신분으로 출생. |
| 1910년대 초 | 신분 차별을 겪으며 사회적 각성 계기 형성. |
| 1917년경 | 일본 메이지대학 법과 유학. |
| 1920년경 | 귀국 후 백정 차별 상황을 체감하며 운동 의식 강화. |
| 1922년 | 진주 지역 백정 인사들과 형평운동 결성 논의 시작. |
| 1923년 4월 | 형평사 창립 준비 활동 참여. |
| 1923년 4월 24일 | 형평사 창립 선언 발표, 발기인으로 참여. |
| 1923~1924년 | 형평사 조직 확장, 전국 지사 설립 활동. |
| 1924년 | 형평사 내 인권·교육 개선 요구 확대에 참여. |
| 1925년 | 형평사 내부 노선 갈등 가운데 조정 역할 시도. |
| 1926년 | 진주파·서울파 간 노선 대립 심화 속 활동 지속. |
| 1927년 | 전국 형평운동 확산기에 강연 및 조직 활동 참여. |
| 1928년 | 내부 분열 및 일제 감시 강화로 활동 축소. |
| 1930년대 초 | 형평사 쇠퇴기, 활동 기록 희미해짐. |
| 생몰년 미상 | 이후 행적 및 사망 시점이 정확히 기록되지 않음. |
활동
독립운동 참여 동기
장지필은 사회운동가이면서 동시에 독립운동가이기도 한데, 그가 독립운동에 참여하게 된 동기는 여러 측면에서 형성되었다.
첫째로, 그는 구한말 유림 사회에서 성장하며 전통적 성리학적 가치와 '충(忠)·의(義)' 중심의 도덕관을 강하게 내면화했다. 대한제국이 붕괴하고 국권이 일본에 강탈되자, 유학자로서 지켜야 할 '국가의 정통성과 군주에 대한 의리'가 훼손되었다는 인식은 그에게 심각한 충격을 주었다.
둘째로, 1910년대 초 식민지 통치가 시작되면서 향촌 질서의 붕괴, 토지 수탈, 헌병경찰제의 폭압 등이 일상생활을 뒤흔들자 장지필은 이를 단순한 정치적 변화가 아니라 '민족의 생존이 위협받는 재앙'으로 보았다. 특히 주변의 유생들이 체포·고문당하는 모습을 목격하면서 독립운동에 뛰어드는 결정적 계기가 마련되었다.
셋째로, 그는 일본에 의해 강제로 무력화된 대한제국 황실의 몰락을 민족 혼의 상실로 여겼으며, 고종·의친왕을 중심으로 나라를 회복해야 한다는 복벽주의적 신념을 강하게 갖게 되었다. 이러한 의식은 당시 유림 사회 전반에 퍼져 있던 정통론적 사고와 맞물리며 그의 독립운동 참여를 구조적으로 밀어붙였다.
주요 소속 단체
장지필은 1910년대 전반에 걸쳐 복벽주의·유림계·의병계 독립운동 단체와 긴밀히 접촉하며 활동하였다. 당시 그의 소속 단체는 명확한 공식 가입 형태라기보다는 '비밀 결사적 참여'와 '지역 조직과의 연계' 방식으로 이루어진 경우가 많았다.
그가 긴밀하게 관여한 것으로 확인되는 단체는 다음과 같은 성격을 갖는다.
1. 조선국권회복단
유림과 의병 잔여세력이 모여 구성한 복벽주의 독립운동 단체로, 국권 회복과 대한제국 황통 복위를 목표로 했다. 장지필은 이 단체의 지역 조직에서 선언서 전달·연락업무·인물 동원 등을 맡으며 실질적 실무 역할을 수행했다.
2. 풍기광복단·대한광복회 계통 단체
그는 조선국권회복단과 사상적으로·조직적으로 가까웠던 풍기광복단 및 대한광복회 구성원들과도 교류하였다. 특히 의친왕 복위 계획이 논의될 때 각 단체가 공유하던 정보망에 관여하며 지역 유림을 결집시키는 활동에 적극적이었다.
3. 향촌 기반 유림 비밀망
공식 단체 외에도 그는 지역 유생들이 결의하고 결속한 비공식 독립운동 결사의 핵심 인물이었다. 이러한 네트워크는 문서 유포, 봉기 시 동원, 군자금 모집 등에서 결정적 역할을 수행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