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도창설조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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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철도창설조약은 1891년 3월 조선의 고종이 이완용과 이하영을 통해 주한미국전권공사 제임스 모스와 체결한 협약이다. 이 조약은 서울과 인천을 연결하는 철도를 건설하여 조선의 근대화를 촉진하려는 목적으로 체결되었다.

배경

1891년 3월, 고종은 조선의 경제 발전과 독립을 도모하기 위해 철도창설조약을 체결하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의 배경에는 조선이 청나라의 내정 간섭에서 벗어나 독립적인 경제 기반을 확립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당시 조선은 임오군란(1882)과 갑신정변(1884) 이후 청나라의 간섭이 심화되고 있었고, 고종은 이러한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 미국과의 협력을 강화하고자 했다.

조약 체결 과정

고종은 이완용과 이하영을 통해 주한미국전권공사인 제임스 모스철도창설조약을 협상하게 했다. 제임스 모스는 미국의 기업가로서 조선의 철도 부설권을 얻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다. 그는 미국 공사 알렌의 도움을 받아 경인선 부설권을 확보하려 했다. 이 과정에서 알렌은 고종과 미국 간의 중재자 역할을 하며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철도 부설과 난관

조선 정부와 제임스 모스 간의 협상은 순조롭게 진행되었으나, 실제 철도 부설 과정에서는 여러 가지 난관이 있었다. 일본은 경인선 부설권을 차지하기 위해 다양한 방해 공작을 펼쳤다. 1894년 8월, 일본은 갑오경장 쿠데타 세력인 김홍집 내각을 내세워 조일잠정합동조관을 체결했고, 이를 통해 조선 정부가 재정적 여유가 없다는 점을 이용하여 경인선과 경부선 철도를 부설하려 했다. 그러나 청일전쟁 직후 삼국간섭으로 인해 일본의 영향력이 약화되었고, 철도 부설권은 제임스 모스에게 돌아갔다.

철도 부설권과 기공식

1896년 3월 29일, 고종은 제임스 모스에게 철도 부설권을 공식적으로 승인했다. 이는 조선 철도에 대한 최초의 특허권 부여이자, 미국인이 조선 정부로부터 얻어낸 최초의 이권이었다. 모스는 특허권 시한을 맞추기 위해 1897년 3월 22일 기공식[1]을 거행했다.

철도 부설의 좌절

기공식을 거행한 후에도 철도 부설은 순조롭지 않았다. 제임스 모스는 인천에서의 부지 확보와 미국에서의 자금 마련에 어려움을 겪었다. 일본은 조선 내에서의 영향력을 유지하기 위해 철도 부설을 방해하였고, 미국 내에서도 조선의 불안정한 정세를 이유로 투자를 꺼리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이러한 난관으로 인해 모스는 결국 경인철도 부설권을 일본의 경인철도인수조합에 양도하게 되었다.

영향

1899년 9월 18일, 경인철도의 인천에서 노량진까지의 구간이 개통되었다. 이는 조선 최초의 철도 구간으로, 조선의 근대화와 산업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경인철도 부설권 인수로 인해 조선은 철도 부설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고, 이는 일본의 조선 침탈 과정에서 중요한 전략적 도구로 사용되었다. 철도 부설은 조선의 경제적 발전을 촉진하는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 강화에 기여하게 되었다.

철도창설조약은 조선의 근대화와 독립을 위한 중요한 시도로 시작되었으나, 일본의 방해와 자금난 등의 문제로 인해 조선의 주도권을 잃게 되었다. 이 조약은 조선이 외세의 간섭 속에서 근대화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좌절을 잘 보여준다. 철도 부설은 조선의 경제적 발전에 기여했으나, 동시에 일본의 식민지 지배를 강화하는 도구로도 작용했다.

각주

  1. 기공식은 서울에서 가장 가까운 항구인 인천의 우각현(현재 도원역 부근)에서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