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론:한국전쟁(19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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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

서왈보와의 교류를 통해 근대전에서 항공력이 국가 생존과 독립운동에 결정적 요소가 될 수 있다는 점을 일찍이 인식하게 되었다.
육군군관학교를 졸업한 뒤 조국의 독립에 기여할 새로운 전력을 마련하기 위해 중국 바오딩 항공학교에 진학하여 체계적인 군용 비행 교육을 받았다.
이 시기 그는 항공 기초이론, 전투기 조종술, 항공 정비 기술 등을 습득하여 한국인 독립운동가로서는 매우 드물게 정식 전투기 조종사 자격을 취득하였다.

항공 활동과 독립운동

1924년 중국 우페이푸 군벌 산하 공군에 전투기 조종사로 복무하며 정찰·폭격 등 실제 전투 작전에 참여해 실전 경험을 쌓았다.
전투기 조종 경험을 바탕으로 독립운동이 지상전 중심에서 항공전력 확보로 확장되어야 한다는 전략적 필요성을 적극 강조하였다.
1930년대 독립운동 세력 내에서 항공부대 창설 구상을 제기하며, 독자적 공군을 보유해야 독립 이후 국가방위를 수행할 수 있다는 비전을 제시하였다.
1934년 신한독립당 창립에 참여해 중앙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인 비행사 양성, 항공기 구매 운동 등 항공력 확충 활동을 구체적 계획으로 추진하였다.

한국광복군에서의 항공 조직 활동

한국광복군 총무처장(1942), 참모처장(1943)을 역임하며 광복군 조직 운영과 항공부대 창설을 위한 실무를 총괄하였다.
중국 정부 및 연합군과 협력해 조종사 후보 선발·항공기 확보·전투기 교육 지원 등 항공 전력 마련을 위한 기초 작업을 추진하였다.
비록 전시 여건 때문에 광복군 항공대가 실전 투입되지는 못했으나, 근대적 항공군 조직의 구성 요소를 광복군 체계 속에 초기 모델로 정립하였다.
그의 항공 조직 구상은 훗날 대한민국 공군 창설 논의의 토대가 되며, 독립운동가 가운데 항공 분야에 전문적 기여를 한 보기 드문 사례로 평가된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과 한국전쟁(1950)

한국광복군 창설 이후 1942년 총사령부 총무처장, 1943년 참모처장을 역임하였다.
광복군 내에서 항공 부대 창설 계획을 담당하며, 독립 후 대한민국 공군의 모태가 될 조직 구성에 참여하였다.
중국 정부 및 연합군과 협력하여 항공 장교 양성, 비행 교육 지원 등 공군 기반 조성에 힘썼다.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

광복 후 귀국하여 대한민국이 근대전에서 생존하기 위해서는 독립된 공군 창설이 필수적임을 강조하며 창설 운동을 적극 주도하였다.
초기 공군 장교단 구성, 항공기 도입 협상, 비행 교육 체계 정립 등 공군이 군종으로 기능하기 위한 제도적 기반 구축에 핵심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한국전쟁 발발 직후 제공권 확보의 필요성을 강조하며 전투기 추가 확보, 조종사 양성, 작전 체계 정비 등을 미군과 협력하여 신속히 추진하였다.
이러한 활동은 공군이 단순한 지원부대를 넘어 전쟁 수행의 핵심 전략 전력으로 자리 잡는 계기가 되었으며, 최용덕은 대한민국 공군 창설의 주역으로 평가받는다.

서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