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국권회복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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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박상진(朴尙鎭)이 1915년 1월 동지들과 함께 경상북도 달성(지금의 대구광역시 달성군)에서 국권회복운동과 단군봉사(檀君奉祀)를 목적으로 조직하였다. 유림·의병 잔여 세력·복벽주의(王政復古) 계열 인사를 중심으로 결성된 비밀 독립운동 단체로, 이 단체는 적극적인 무장 전개보다는 정통성·명분·왕실 복위 계획을 중심으로 조직을 결속시켰다는 점에서 '의친왕 복벽운동'의 핵심 축을 담당했다.

활동 내용

임원은 중앙총부통령(中央總部統領) 윤상태(尹相泰), 외교부장 서상일(徐相日), 문서부장 서병룡(徐丙龍)·이영국(李永局), 유세부장 정순영(鄭舜永, 또는 舜泳), 교통부장 이시영(李始榮)·박영모(朴永模), 기밀부장 홍주일(洪宙一), 권유부장 김규(金圭), 결사대장(決死隊長) 황병기(黃炳基)였으며, 마산에 설치된 경상남도지부 지부장은 안확(安廓)이었다.

단원은 혁신 유림들이 중심을 이루었다. 중요한 활동 거점은 대구박상진의 상덕태상회(尙德泰商會), 서상일의 태궁상회(太弓商會), 경상북도 칠곡윤한병(尹翰炳)의 향산상회(香山商會), 부산안희제(安熙濟)의 백산상회(白山商會) 등으로서 모두 곡물상회였다.

단원들이 대부분 부호이거나 중류 이상의 경제력을 지니고 있어, 이들로부터 많은 군자금을 거둬들여 만주의 무장독립군에 제공하였다. 그런데 1915년 7월 이 같은 방식의 항일운동에 한계를 느낀 박상진이 이미 1913년에 조직되어 활동중인 풍기광복단(豐基光復團)과 함께 대한광복회를 조직, 총사령이 되었다.

이들은 본부를 대구의 상덕태상회에 두었다. 무장 독립군을 양성, 일본인 고위 관리 및 친일 반역자를 처단하고 최종적으로는 일제의 섬멸을 목표로 하였다. 국권회복단원 중 이시영·정순영·홍주일·김재열(金在烈)·정운일(鄭雲馹)·최준(崔浚)이 여기에 참여하였다.

그러나 국권회복단은 별도의 조직체로 활동을 계속,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경상남도 창원에서 만세시위를 주도하고 진동헌병주재소를 습격하였다. 또한 유림이 파리강화회의에 독립청원서를 보낸 파리장서의거를 추진하기도 하였다. 그 뒤 조직이 노출되어 단원들이 모두 일본 경찰에 붙잡혔다. 조직이 이렇게 와해된 후, 주요 인사들은 대한광복회 등 다른 독립운동 단체에서 활동을 이어갔습니다.

이 단체는 국내 항일민족운동이 상대적으로 침체하였던 1910년대에 조직, 활동하여 항일민족운동의 역량을 3·1운동을 거쳐 1920년대로 연결시켜 주었다는 점에 커다란 의의가 있다.

의친왕과의 관계

조선국권회복단은 복벽주의 단체들 가운데서도 가장 일관되게 의친왕을 복위 대상으로 선택했는데, 그 이유로는 크게 세 가지가 있다.

1. 정통 황통 계승에 가장 가까운 황족

순종의 후사 부재 이후, 유림·의병계는 의친왕을 순종의 뒤를 이을 자연스러운 후계자로 보았다.

2. 일제의 회유에 소극적이었던 황족

일본에 충분히 협력하지 않았다 여겨져 '반일 황족'이라는 이미지가 강조되었다.

3. 민중적 인지도와 명망

민간에서도 의친왕을 복위 후보로 인식하는 경우가 많았다.

즉, 의친왕의 활동이나 민간인들의 의친왕에 대한 인식과 같은 것들에 영향을 받아 그를 후계자로 추대한 것이다.

관련 선언·문서

1. 복위·봉기 관련 선언서

단체는 대한제국 황통의 정통성을 강조하며 "국권은 왕통으로부터 비롯되며, 왕통이 서야 나라가 선다"는 전통 유림적 논리를 기반으로 여러 차례 복위 선언형 문건을 작성했다. 이 문서들은 주로 지방 유림 네트워크를 통해 배포되었고, 봉기 계획이 있을 때마다 비밀리에 갱신되거나 새로운 선언이 만들어졌다.

위 선언서의 주요 골자는 다음과 같이 요약된다.

- 대한제국 황실의 존속은 국가 정체성의 근간 - 일제는 무력으로 국권을 빼앗았으므로 정통성이 없다. - 조선 민중은 의리상 황통을 회복할 의무가 있다. - 거사 시에는 정통 황족(주로 의친왕)을 중심으로 새 정부를 구성한다.

2. 대동단독립선언서와의 연계성

조선국권회복단 내부 인사 일부는 대동단독립선언서(1919) 작성·유포에 의견을 보탰고, 복벽주의 노선에서 벗어나지 않는 범위에서 협조하였다. 대동단독립선언서는 공화주의적 표현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조선국권회복단은 "대한인의 자주독립 선언"이라는 점에서 기본적인 취지에 공감하고 독립 의지를 공유했다.

특히 의친왕을 명목상 복위 대상으로 고려한 세력들이 선언서 초안 단계에서 간접 협력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복벽주의 단체가 완전히 고립된 존재가 아니었음을 보여준다.

3. 타 복벽주의 선언과의 문서 계통성

조선국권회복단이 작성한 문건들은 풍기광복단, 대한광복회 등 유사 복벽 단체의 선언서와 구조·내용이 매우 유사하다.

공통된 특징은 다음과 같다.

-왕정 복원 = 국권 회복
-일본 통치는 ‘의리’에 어긋나는 강점
-민중의 계몽·단결 촉구
-비밀결사 조직의 필요성 명시

이러한 문서 계통성은 복벽주의 진영 전체가 공통된 정치관과 전략을 공유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계 및 평가

조선국권회복단의 가장 큰 한계는 1910년대 중반 이후 독립운동의 중심이 '공화주의·근대 민족주의'로 넘어갔다는 점에 있다. 왕정 복벽은 민중에게 매력적이었지만, 근대 국가 체제에 부합하는 해법으로는 점점 멀어졌다. 시대 변화 속에서의 이념적 변화에 부딪히게 된 것이다.

비밀결사 특성상 대형 무장 조직이나 자금 조달이 쉽지 않았고, 계획 단계에서 중단된 봉기 구상이 많았다. 또한 일본의 정보 통제와 감시로 인해 정기적인 활동조차 매우 어려워 실행력이 부족했다는 측면이 존재한다.

추가적으로 조선국권회복단은 의친왕을 복위 대상으로 삼았지만, 의친왕 본인과의 직접적 교류가 거의 불가능했다. 이는 운동의 정당성을 넓히는 데 장애가 되었다.

그럼에도 조선국권회복단은 초기 식민통치기에서 대한제국의 정통성·국권 회복 의지를 끊기지 않게 유지했다는 점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평가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단체의 실질적 영향력은 제한적이었으나 독립운동사 초기의 사상·정통성 기반을 지탱한 역할을 했다.
공화주의 중심의 독립운동과 달리 전통적 정치문화와 항일의식을 결합한 유일한 계열이었다.
유림·의병의 항쟁 정신을 이어주는 가교 역할을 수행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