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본관은 덕수(德水), 자는 여해(汝諧). 고려 이돈수(李敦守)로부터 내려오는 문반(文班)의 가문으로, 이돈수(李敦守)의 12대손이다.
이순신은 어릴 때부터 기개와 용맹함이 뛰어났으며, 문관의 자질을 보였다.
같은 마을에 살았던 유성룡의 『징비록(懲毖錄)』은 이순신의 어린 시절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이순신은 어린 시절 얼굴 모양이 뛰어나고 기풍이 있었으며 남에게 구속을 받으려 하지 않았다.
다른 아이들과 모여 놀라치면 나무를 깎아 화살을 만들고 그것을 가지고 동리에서 전쟁놀이를 하였으며, 자기 뜻에 맞지 않는 자가 있으면 그 눈을 쏘려고 하여 어른들도 꺼려 감히 이순신의 문앞을 지나려 하지 않았다.
또 자라면서 활을 잘 쏘았으며 무과에 급제하여 발신(發身)하려 하였다.
또 자라면서 말타고 활쏘기를 좋아하였으며 더욱이 글씨를 잘 썼다.”
-유성룡 <징비록>-
이순신은 선조 9년 식년무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권지훈련원봉사(權知訓鍊院奉事)로 관직에 나갔다.
여러 관직을 거쳐 조산보만호 겸 녹도둔전사의가 되었는데,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중앙에 군사를 요청을 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고, 갑자기 호인이 침범하여 막을 수 없게 되자 피하였다.
이 일로 이순신은 죄를 문책당하였고, 백의종군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추천으로 관직 생활을 이어가다가 47세에 되던 해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가 되었다.
왜침이 있을 거란 소문에 전쟁을 미리 대비하였다.
이순신은 옥포에 정박중인 일본인 함대 30여척을 불화살로 격파하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옥표해전이라 부르며, 이순신의 최초의 해전이라고 칭해진다.
이순신은 계속해서 해전의 압승을 거두었다.
한산도 대첩의 경우에는 이순신의 전략전술이 돋보이는 해전이었다.
한산도 대첩은 한산도 바다에 일본배를 유인하여 격파한 전투이다.
이순신은 일본배를 한산도 앞바다로 유인하기 위해 견내량으로 판옥선 몇 척을 보내었다.
일본배는 판옥선을 집중 공격하며 조선과의 전투에서 승리를 예상하였으나, 한산도 앞바다에 조선 배를 보고 함정에 빠졌음을 깨닫는다.
일본배를 유인한 판옥선은 기다리고 있던 조선 배와 연합하여 진영을 이루고, 일본배는 오도가도 못한 채 조선의 포에 무참히 배가 깨어졌다.
한산도 대첩 이후 이순신은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받았다.
이후 일본과 명 사이에 강화교섭이 이루어졌지만, 서로의 요구를 충족하지 못한 채 결렬되었다.
1597년 일본은 다시 한 번 조선을 침략하여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고니시 유키나와와 그의 부하 요시라는 경쟁자인 가토 기요마사를 제거하기 위해 조선에게 그의 도해 날짜를 알려주었다.
조정은 이순신에게 나가 싸울 것을 명령했으나, 이순신은 불확실한 정보라 생각해 출전은 주저하였다.
이순신이 마지못해 출전을 했지만, 이미 요시라는 조선에 도착한 뒤였다.
이에 조정은 이순신을 다시 문책했고 원균이 삼도수군통제사를 대신하였으며 다시 백의종군을 하게 됐다.
하지만, 원균이 칠천량에서 대패를 하자, 조선은 다시 이순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기용할 수 밖에 없었다.
복귀된 이순신은 명랑해전에서 일본 함대 133척을 단 31척의 배로 격파한 성과를 올렸다.
이후 도요토미히데요시가 죽자 일본군에게 철수 명령이 떨어졌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시마즈 요시히로에게 자신의 탈출을 도와달라고 요청을 했고, 시마즈는 유키나가를 구하기 위해 순천으로 나아갔다.
1598년 이순신은 고니시 유키나가와 구원군을 공격했다.
이순신은 이 전투에서 탄환을 맞아 죽게 되었는데, 자신이 죽으면 군대가 동요할까 두려워 전투가 끝나기 전에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이순신의 죽음을 본 몇 병사들은 유언에 따라 전투가 끝날 때까지 이순신이 죽었음을 알리지 않았고, 전투가 끝난 이후에야 소식을 듣고 통곡을 하는 사람이 많았다.
이순신의 죽음이 조정에 알려지자 선조는 관원을 보내어 조의를 표하였다.
1604년 선무공신 1등으로 봉해졌고, 덕풍부원군에 추봉, 좌의정에 추증되었다.
1793년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이순신의 묘소는 충청남도 아산시 음봉면 어라산에 있으며, 왕이 친히 지은 비문과 충신문이 건립되었다.[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