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친왕
생애
의친왕 이강(李堈, 1877~1955)은 대한제국 제2대 황제 고종의 아들이며, 한동안 대한제국의‘잠재적 계승자'로 거론되었던 황족이다. 일제강점기에 직접적인 정치 활동을 벌인 인물은 아니었지만, 국권 피탈 이후 왕정 복벽을 꾀한 여러 독립운동 단체들은 그를 “대한제국의 정통성을 이어갈 인물”, 즉 복위의 중심축으로 추대하였다.
의친왕은 일본의 철저한 감시 아래 있었으므로 적극적으로 독립운동에 가담하지는 못했으나, 그가 지닌 왕실 정통성·반일적 태도·민중적 인지도는 복벽운동의 상징 자원으로 활용되었다. 결국 그는 행동하는 정치가라기보다, "맡겨진 역할을 통해 역사의 한가운데 서게 된 황족", 그리고 복벽운동의 정신적 중심"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 연도 | 내용 |
|---|---|
| 1877년 3월 30일 | 고종의 아들로 출생(어머니 장귀비) |
| 1891년 | 의화군으로 책봉 |
| 1893년 | 김사준의 딸 김덕수(金德修)를 정실 아내로 맞음 |
| 1894년 | 조선국 보빙대사(報聘大使)로 일본에 다녀옴 |
| 1899년 | 미국 유학 |
| 1900년 | 의왕(義王)으로 책봉, 후에 의친왕(義親王), 또는 의왕(義王)으로 불림 |
| 1900년대 초반 | 군사 교육 및 일본 유학 권유 받았으나 거부 |
| 1906년 | 강제 해군 유학 후 귀국, 일본의 황실 통제 강화 시기 |
| 1910년 | 한일병합 이후 왕공족으로 일본 감시 하에 생활 |
| 1910~1920년대 | 독립운동 단체들에 의해‘복벽운동의 상징적 지도자'로 추대됨 |
| 1930~1940년대 | 도박 및 가정 문제 등으로 일본 경찰 감시 하에 생활 |
| 1945년 | 해방 후 미군정하에서 서울 거주 |
| 1947년 | 왕공족의 법적 지위 소멸 |
| 1950~1955년 | 경제적 어려움 속 생활 |
| 1955년 5월 16일 | 서울에서 사망 |
생애 연표 타임라인
독립운동
대동단 독립선언서
이 선언서는 1919년 11월 28일 최대 비밀항일단체 조선민족대동단이 제2차 독립선언을 진행하며 선언한 독립선언서이다. 대한민국의 독립선언서에는 크게 네 가지가 있는데, 대한독립선언서, 2.8독립선언서, 기미독립선언서, 그리고 하나가 대동단 독립선언서다. 그만큼 독립운동의 역사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는 독립선언서임이 분명하다.
1919년, 고종황제의 차남 의친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망명하려던 '대동단 사건'이 수포로 돌아간 후 대동단은 일제의 대대적인 수사로 인해 붕괴 직전까지 가게 되었다. 그 와중에도 대동단은 3.1.만세운동에 이은 제2차 독립선언 만세운동을 기획하는데, 여성 독립운동가 이신애, 나창헌, 정규식, 백초월, 박원식, 이종진 선생 등과 함께 11월 28일 제2차 만세운동과 독립선언을 준비하며 33인의 대동단원의 동의를 얻어 대동단 독립선언서를 작성한다.
대동단은 자동차 3대를 구하여 오후 5시를 기해 만세운동을 전개하는데, 제1대에는 정규식이 타고 남대문의 조선은행 앞에서 출발하여 하세가와정과 광화문을 향하여 달리면서 대동단 독립선언서를 뿌리도록 하고, 제2대는 이신애와 박정선이 타고 동대문의 한일은행 지점 앞을 출발하여 종로경찰서로 향하면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며 보신각 쪽으로 달려가도록 하며, 제3대는 이정이 정동 배재학당 앞을 출발하여 종로경찰서를 향하여 달리면서 독립선언서를 뿌리도록 했다.
11월 28일 오후 4시 반경에 이신애, 정규식, 박원식, 이종진 등은 태극기와 「대한 독립 만세」라 쓴 깃발을 흔들며 앞장 서 대한 독립 만세를 높이 불렀다. 이에 안국동주재소의 경찰관들이 달려들어 이신애를 비롯한 모든 대동단 인사들을 체포했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
특히 의친왕은 평민이 되어 임시정부와 함께 하여 독립운동에 몸 바치기로 했다고 독립신문에 기고한대로 '의친왕' 혹은 '이강 공'으로 표기하지 않고, 본명 '이강'으로 표기하게끔 하였고, 1919년 11월을 대한민국 원년이라 표기하였다.
의친왕이 위와 같이 직접적인 협력을 하지 못 한 이유로는 일본의 감시하에 있었기 때문에 통신·만남 모두 통제되었고, 실제 서명·직접 참여는 거의 불가능하였기 때문이다. 허나 복벽주의 세력은 의친왕의 '반일적 성향'과 '정통성'을 명분으로 내세우며, 의친왕이 일본의 회유에 소극적·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기 때문에 복벽 세력은 그를 자연스러운 정통 계승자로 활용했다. 결국 역사학계는 의친왕이 '대동단독립선언서'에 실질적으로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해당 선언서가 성립하는 명분 자체를 제공한 상징적 협력자로 평가된다.
대동단 독립선언서 전문
대동단 독립선언서 전문
반만년 역사의 권위와 2천만 민중의 성충을 의지하여 국가의 독립됨과 우리 민족의 자주민 됨을 천하만국에 선언하며 또한 증언하노라. 근역 청구는 남의 식민지가 아니며 단군과 고구려의 자손은 남의 노예 종자가 아니다. 나라는 동방 군자요, 민족은 선진의 선인이었으나 움직이면 비틀거리고 다스림이 오래니 어지러움이 일어난다. 밖으로는 고래가 삼키는 듯한 강한 이웃이 있고, 안으로는 병든 나라의 간교한 역적이 있다.
5천년의 신성한 역사와 2천만 예의의 민족과 5백년 황황종족이 하루아침에 인명하니, 조정에는 순국의 신하가 있고 재야에는 절개를 지켜 죽은 백성이 있으나, 황천이 불쌍히 여기지 아니하고 국민이 복이 없어 황제 성명에 황급히 폐천의 욕을 당하여 사민이 거의 곧바로 민족이 섬멸되는 화를 받았으며, 남발하는 세금과 가혹한 법과 노예처럼 처우하고 부림으로써 민족이 안심하고 살 수 없는지라, 불평하여 외치면 강도로 다스려 찢어 죽이니 범부의 충의의 혼이 잔인한 칼 아래 쓰러진 자가 몇 천 몇 만 인가?
원한과 고통을 삼키고 마시며 와신상담의 십 개 성상을 지난지라.
어둠이 다하면 밝음이 돌아오고 막힘이 가면 태평함이 오게 되는 것은 천리의 호운이며 죽음에 처하여 삶을 얻고 오래 굽혀 일어남을 생각함은 도의 지극한 정리일세.
세계 개조의 민족자결의 이론은 천하에 드높고 우리나라의 독립국과 우리나라의 자유의 소리는 나라 안에 울려 퍼졌도다. 이제 3월 1일에 선언 독립하고 4월 10일에 정부를 건설했으나 간악한 저 일본이 시세의 추이를 살피지 아니하고 오로지 표범과 이리의 만성을 부려 무자비한 압억에 맨손의 도중을 총으로 죽이고 성읍 촌락을 불태우니 이것이 인류 양심에 참아 할 바인가?
우리 민족의 붉고 뜨거운 충성심은 결코 이러한 비정리적 압박에 움츠러들 바가 아니오, 날이 갈수록 정의 인도로써 용왕 매진할 뿐이로다. 만일 일본이 끝내 뉘우침이 없으면 우리 민족은 부득이 3월 1일의 공약에 의하여 최후 1인까지 최대의 성의와 최대의 노력으로 혈전을 불사코자 이에 선언하노라.
대한민국 원년 11월
조선민족 대표
이강(의친왕) 김가진 전협 양정 이정 김상열 전상무 백초월 최전구 조형구 김익하 정설교 이종춘 김세응 정의남 나창헌 한기동 신도안 이신애 한일호 박정선 노홍제 이직현 이내수 김병기 이겸용 이소후 신태연 신형철 오세덕 정규식 김황진 염광록
의친왕 복벽운동
1910년 대한제국의 국권 피탈 이후, 국내외 독립운동 진영은 크게 군주제 복원(復辟)을 통한 독립과 공화주의 체제 수립이라는 두 흐름으로 나뉘었다. 이 중 전통적 민족주의 세력·의병 계열·왕실 관료 출신·보수적 지방 유지층은 왕정 복벽을 통해 조선을 되살리려는 복벽주의 운동을 지속했으며, 그 중심 축으로 간주된 인물이 고종의 아들이자 대한제국 왕자였던 의친왕 이강이었다.
의친왕 본인이 조직적 정치행위에 적극 나선 것은 아니었지만, 복벽주의 세력들이 '정통 왕통을 잇는 복위의 중심'으로 추대한 인물은 거의 일관되게 의친왕이었다. 그의 존재는 복벽운동 전체의 상징과 정통성의 근거가 되었으며, 각종 비밀결사·독립단체의 계획·거사 구상에서 핵심적 좌표로 작용했다.
1910년 이후 일본의 무단통치가 시작되자, 국내 의병·유림·종교계·구관료층은 "나라의 체제를 회복해야 독립도 가능하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복벽 운동을 추진하였다.
이때 의친왕이 복벽운동의 중심 인물로 떠오른 데에는 다음과 같은 요인이 작용했다.
1. 고종의 아들로서 왕통의 정당성 보유
순종이 후사가 없고 정치적 활동도 제한되어 있었기 때문에, 차기 국왕 후보로서 의친왕이 지목되기 쉬웠다.
2. 국내 민중 인지도와 상징성
의친왕은 계급·지역 구분 없이 비교적 널리 알려진 황족이었고, 민중 사이에서는 고종·순종보다 더 직접적인 ‘복위의 가능성 있는 인물’로 인식되었다.
3. 일제의 감시 대상이라는 사실 자체가 상징적 의미
의친왕은 일본에 의해 철저히 감시·통제되었는데, 오히려 이것이 복벽주의자들에게는 "일제가 가장 두려워한 복벽 후보"라는 인상을 강화했다.
→ 이 시기에 왕실 복위 구상에서 의친왕은 사실상 '복벽의 기둥 인물'로 자리 잡았다.
추가적으로 의친왕은 일제의 강한 감시 속에서도 다음과 같은 행적을 통해 복벽주의 세력이 그를 더 강력하게 '복위의 중심'으로 인식하도록 만들었다.
1. 노골적 친일 협력 거부
일본이 왕족을 회유하기 위해 제시한 여러 관직·특권을 의친왕은 거절하거나 소극적으로 대응했다.
2. 조선 황실의 체면과 권위를 지키려는 행동
일본이 왕실의 의례·작위를 낮추려 했을 때, 이에 반대하며 항의하는 모습을 보였다.
3. 민중에게 친근한 이미지를 유지
평소 공개 활동에서 권위적이지 않고 소탈한 태도로 ‘민중이 따르는 왕자’라는 평가가 퍼졌다.
복벽주의자들은 이러한 행적을 근거로 → “의친왕은 일본에 굴복하지 않은 마지막 정통 황족”이라는 이미지를 강화했다.
결국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직접적으로 협력했다기보다는 복벽운동 세력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준 느낌이 강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