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성전문학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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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성전문학교 (普成專門學校)

정의

1905년 지금의 서울인 한성에 설립되어 일제강점기를 거쳐 해방 직후까지 존속했던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이자 전문학교로, 고려대학교의 전신이다.


보성전문학교 초창기 교정 사진이다.

설립 배경과 목적 및 의의

내우외환으로 국운이 기울어지며 열강의 이해가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서 "민족과 국가를 구하는 길은 오직 청년 학도를 가르치는 교육의 힘을 기르는 데 있다"는 '교육구국'의 신념을 가지고 대한제국의 이용익 선생이 보성전문학교를 설립했다.

광무황제의 가장 측근이며, 배일 친러파였던 이용익은 러일전쟁에서 일본의 승리가 확실시되는 가운데 납치되어 갔던 일본으로부터 귀국했고, 당시 근대국가를 경영할 정치·경제·법률 등에 밝은 전문적 인재가 없어 대한제국이 위기에 놓인 것임을 절감하여, 그러한 인재를 양성하기 위해 보성전문학교를 세운 것이다.

이렇게 세워진 보성전문학교는 한국최초의 민간인에 의한 근대적 고등교육기관으로, 신교육 보급을 통한 국가자강 및 민족주의의 교육적 실현과 항일 민족 투쟁의 산실이었으며, 근대적 학문의 발상지였다는 역사적 의의를 가진다.


명순구 법학전문대학원장 : “보성은 논어에 등장하는 말로 널리 인간성을 계발한다는 의미다."[1]


건물의 역사

1905년 4월 3일 종로에 있던 러시아어 학교인 관립한성아어학교[2] 건물을 빌려 개교 Image01.png
1906년 이용익은 아어학교에 이웃한 박동 소재 김교헌 소유의 대저택[3]을 매입하여 학교 시설을 정비. 부속출판사 “보성사”도 설립. Image02.png
1918년 박동을 아예 떠나 낙원동의 서북학회 회관[4]을 임차하여 사용하기 시작. Image03.png
1922년 천도교 본부의 이전[5]에 따라 송현동에 건물 신축 및 이전. Image04.png
1924년 ‘ㄷ’자 모양의 서양식 건물을 신축. 건물 앞마당에 회화나무가 보임.[6] Image04.png
1934년 경영권을 인수한 인촌 김성수가 안암동에 현재의 본관을 신축하면서 종로를 완전히 떠나 안암동에 정착. Image05.png


연원 및 변천

  • 이용익이 1905년 4월 3일 창설.


  • 이용익이 해외 망명중 서거, 손자 이종호가 잠시 학교 경영의 책임을 맡았으나 안중근의 의거에 연루되어 구금되자 경영난에 봉착.


  • 1910년, 그것을 구제하기 위해 천도교의 손병희(孫秉熙)가 인수. 이렇게 해서 재정적 위기는 면할 수 있게 되었으나, 동시에 나라의 독립을 상실한 해이기도 했기 때문에[7] 일제 총독부의 본격적인 간섭이 시작됨.


  • 총독부는 1915년 3월 사립학교 규칙과 동시에 전문학교 규칙도 아울러 공포. 같은 해 4월 1일부터 시행된 전문학교 규칙에는 “본령에 의하여 설치하는 전문학교가 아니면 전문학교라 칭할 수 없다.”고 하였음. 이에 따라 보성전문학교의 교명은 보성법률상업학교로 격하됨.


  • 1920년 2월에 교장으로 취임한 고원훈이 총독부 당국에 전문학교로의 승격을 거듭 타진하는 한편, 김병로 등이 재단법인 기성회를 조직하여 널리 사회 독지가들에게 호소하기 시작.


  • 전국 각지의 사회 인사 58명이 도움을 주어, 1921년 12월 28일, 보성전문학교라는 교명을 되찾음.


  • 1922년 일제의 조선교육령에 의해 3년제 전문학교로 개편.


  • 그 후 1932년에 총독부의 지나친 간섭 및 물가 변동, 재단 경영의 부진 등으로 학교가 불안정해지자 김성수가 경영을 인수.


  • 김성수는 민립대학 설립의 꿈을 펴기 위해 1934년 현재의 안암동 교사로 보성전문학교를 신축 이전.


  • 그 후 보성전문학교는 외적으로도, 내적으로도 거듭 발전함. 건물을 신축하고 최신 규모의 시설을 확충하는 동시에, 도서·민속고고품을 모집했고, 교과목 및 교수내용에 충실을 가했음. 뿐만 아니라 재학생 및 졸업생들이 사회 곳곳에서 활약하는 등 해를 따라 눈에 띄는 발전을 이루어나감.


  • 그러나 이러한 발전에 따라 총독부의 탄압도 강해짐. 그들은 보성의 농과 신설계획을 거부하였고, 1944년에는 교명을 경성척식경제전문학교로 고치지 않고는 존속할 수 없도록 함.


  • 1945년 해방 후 9월에 재단이사회가 개최됨. 모든 학사규정을 다시 보성전문학교의 그것으로 환원시켰다가, 1946년 8월 고려대학교로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됨.


현재

1945년 해방 후 1946년 8월 15일, 미군정청 문교부장이 설립 신청을 승인함에 따라 보성전문학교는 전문학교를 넘어 종합대학의 지위에 올랐다. 이름은 고려대학교로 정해졌다.

보성전문학교 이후의 고려대학교는 1955년을 기점으로 현대화되면서 현재까지 이어져, 명문사립학교로서의 입지를 더욱 공고히 하고 있다.

초대 총장으로 현상윤 선생이 취임한 이래 유진오 선생(2,3,4대), 이종우 선생(5대), 김상협 선생(6,8대), 차락훈 선생(7대), 김준엽 선생(9대), 이준범 선생(10,11대), 김희집 선생(12대), 홍일식 선생(13대), 김정배 선생(14대), 어윤대 선생(15대), 이필상 선생(16대), 이기수 선생(17대), 김병철 선생(18대), 염재호 선생(19대)에 이어 제 20대 총장으로 정진택 선생이 총장직을 이어오고 있다.

정진택 총장의 지도 아래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가는 사람 중심의 고려대학교 - 창의적 미래인재 양성, 세계를 변환시키는 대학"이라는 비전을 추진하고 있는 고려대학교는 세계 유수대학들과 어깨를 나란히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고 시대를 이끌어나가는 학문적 가치와 인류를 위한 사회적 가치를 세우며 미래사회를 준비할 창의적 인재를 양성하고 있다.

또한 교육, 연구, 행정 등 전 분야에서 상호 존중하고 배려하는 고대만의 문화인 '고대다움'을 바탕으로 '같이'의 가치가 활짝 피어나는 '사람고대' 실현을 이뤄나가고 있다.


<2023 고려대학교 홍보영상>


각주

  1. 원래 이용익이 생각한 교명은 중앙학교였는데, 고종이 하사한 교명에 따라 학교 이름을 보성이라 지었다.
  2. 현 종로 수송공원
  3. 현 조계사 터
  4. 현 종로 낙원상가 터
  5. 송현동에서 경운동으로 이전함.
  6. 이 회화나무의 씨를 받아 2019년 5월 법학신관 앞에 식재.
  7. 한일병합조약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