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서양
개요
박서양(朴瑞陽)(1885년 9월 30일 ~ 1940년 12월 15일)은 외과 의사, 화학자, 교육자, 독립운동가이다. 자는 봉출이며, 뒤에 서양으로 개명하였다. 백정의 아들로 태어 제중원의학교[1] 제1회 졸업생이 되었다. 그는 북간도에서 학교를 세우고 병원을 지었다. 박서양의 활동은 의료나 교육에 그치지 않았다. 박서양은 북간도 최대의 독립운동 조직인 대한국민회에서 군의로 활동했다.
정보
- 출생: 1887년 9월 30일, 서울특별시 종로구 관철동
- 국적: 대한민국
- 성별: 남성
- 사망: 1940년 2월 15일 (향년 55세)
- 학력: 제중원의학교 (졸업)
- 종교: 기독교 (개신교)
생애
제중원의학교
1900년 아버지 박성춘의 간곡한 부탁으로 선교사 에비슨의 덕으로 그해 10월 제중원 의학교(후의 세브란스 의학전문학교)에 입학하였다. 처음 허드렛일을 시켜 그의 됨됨이를 본 에비슨[1]은 그를 의학교에 입학시켰다고 한다. 1904년 에비슨이 세브란스 병원을 개업하자 박서양은 조선인 병원 조수가 되어 낮에는 의료활동을 돕고 밤에는 야간반 학생이 되어 공부하였다. 1906년 홍석후, 이승만, 김규식, 이교승 등과 함께 황성기독청년회에 나가 학생들의 교육을 맡았다. 특별히 그는 YMCA 학당의 부학감(부교감)을 맡아보기도 했다. 또한 제중원 의학교 재학 중 중앙학교에 초빙되어 화학을 가르쳤으며 이후 낮에는 소학교 교사로 밤에는 의학부 학생으로 다녔다. 또한 제중원의 의사 조수로 활동하면서 의사의 수술을 보조하였다. 1908년 6월 3일 제중원 의학교를 졸업하여 제1회 졸업생이 되고 6월 4일 의사 면허를 받았다.
교육 활동
- 그는 대한제국기 조선 초기 외과의사와 화학교사였다. 그는 졸업 후 모교에서 해부학을 가르쳤다. 또한 서울 승동교회에서 설립한 승동학교에 화학교사로도 출강하였다. 그는 직접 학생들을 상대로 산소와 수소를 이용한 공개 화학실험을 선보이기도 했다. 그러나 학생들은 박서양의 출신을 문제시 삼으며 교사인 그를 무시하기도 했다고 한다.
- 1917년 6월 30일 숭신소학교를 세워 교장이 되고, 직접 한 반을 맡아 학생들을 교육했다. 그는 교사 5명을 초빙하여 첫 반 28명의 학생들을 가르쳤고, 이후 연길현 27개 학교의 연합운동회에도 적극 참여하였다. 그는 소학교를 세워 아이들을 가르쳤을 뿐 아니라 독립군들의 의료도 도맡아 하였다고 한다. 그는 자신의 학교에 신분, 반상의 차별을 받지 않고 학생들을 받아들여 무료로 가르쳤으며 실력이 우수한 학생들의 중학교, 고등보통학교 진학을 주선해 주기도 했다. 1921년 숭신소학교의 학급을 증설, 4학급에 남자 25명, 여자 15명의 학생을 추가로 받아들이고 교사 5명을 더 충원하였다. 1923년 첫 졸업생 28명을 배출하였다.
방역활동
1909년 9월 콜레라가 창궐하자 김필순, 김희영, 안상호, 이석준, 박용남, 장기무, 한경교, 정윤해 등과 함께 자발적으로 방역 활동을 하기도 했다.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
1913년 세브란스의학전문학교의 조교수로 임명되었다. 이로서 한국인 최초의 전문학교 교수의 한 사람이 되었다. 1913년부터는 외과학 교실의 조교수와 부교수 역임하면서 병원 외과 환자를 진료하였다.
독립운동
독립운동 단체였던 대한국민회에 가입하여 독립운동에 뛰어들었으며, 대한국민회 군사령부에서 군의관을 맡기도 했다. 1919년 대한국민회 군의가 되었고, 1920년 5월 대한국민회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최진동의 북로독군부 등과 연합 정책 전개함에 따라 만주에서 벌어진 의병 전투에도 종군하였다.
다큐멘터리
KBS명작다큐메서 박서양 선생의 이야기를 다루었다.
각주
- ↑ 세브란스의학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