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수
개요
고려대학교 창립자이자, 대한민국의 제 2대 부통령으로 실력 양성 운동과 독립 운동을 지원하고 대한민국 임시 정부 수립에 도움을 준 사실로 독립 운동가로 인정 받았다가 일제 강점기 말기에 친일 행적이 드러나 재평가된 인물이다. 앞서 언급되었던 바와 같이 실력양성운동과 독립운동을 지원하고 동아일보를 이용해 물산장려운동[1]에 참여하는 등의 행동으로 독립 운동가로 활발히 활동하다가 동아일보가 정간되었다가 다시 발간되기 시작했을 때 학도병을 미화하는 등의 글을 써 동아일보에 큰 오점을 남기는 행적을 보였다. 이런 것 때문에 친일 행적이 온전히 김성수 자신의 의지였는지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으로 남아있다고 보는 시각도 존재한다.
정보
- 출생 : 1891년 10월 11일 전라도 흥덕현 부안면 인촌리 출생(現 전라북도 고창군 부안면 봉암리 인촌마을)
- 성별 : 남성
- 학력
- 1908년 10월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입학
- 1909년 4월 도쿄 긴조 중학교 편입
- 1910년 와세다 대학교 예과 입학
- 1911년 와세다 대학교 정경학부 입학
- 1914년 7월 와세다 대학교 졸업
- 1908년 10월 도쿄 세이소쿠 영어학교 입학
생애
김성수는 집안의 재력을 기반으로 교육과 언론 사업을 활발히 진행했다.
- 1915년 4월 중앙학교 인수
- 1917년 3월~1918년 3월 중앙학교 교장 재직
- 1919년 3.1 운동 참여
- 1920년 <동아일보> 설립 및 사장으로 재직
- 1922년 물산장려운동 참여
- 1931년 9월 중앙고등보통학교 교장 재직
- 1932년 3월 보성전문학교[2] 인수
- 1932년 6월 ~ 1935년 6월 보성전문학교 교장으로 재직
친일행적
1937년 6월 <동아일보>가 다시 복간되었지만 이 시기에는 일제강점기 말에 전시 상황에서 지원병을 모집하고 이를 미화하는 글을 기고하는 등의 친일 행적을 남겼다. 그러나 이런 글을 기고하는 와중에도 1937년부터 1942년까지는 법의 범위 내에서 실력양성운동을 지원하고 독립운동 단체인 흥업구락부에 가입하여 활동을 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1942년을 전후로 하여 조금이라도 남아있던 독립 운동의 행적은 사라지고 아예 친일파로 변절했다. 각족 신문에 내선일체 사상을 찬양하는 글과 학도병을 권유하는 글 등을 집중적으로 작성하는 친일 행적을 보였다. 그 결과 그 후 '선 항일, 후 친일' 인사로 분류되어 민간 단체가 발행한 친일인명 사전과 대한민국 정부 기관 친일진상규명위원회 보고서에도 수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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