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말
고려말
러시아와 중앙아시아의 여러 나라에 살고 있는 한인들은 자신들의 모국어를 고려말이라고 부른다.러시아 혁명 전 연해주의 한인 신문,잡지,교과서는 '대한국'또는 '한국','한인'이라는 말을 썼지만 러시아 혁명 후가되는 1920년대부터는 '고려','고려인','고려말'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민족주의에 바탕을 둔 애국계몽운동시기가 끝나고 소비에트 사회주의 혁명이 전개되면서 '고려'라는 말이 등장한 것이다.이주 후에는 조선,고려라는 말을 함께 썼으나 구소련의 해체 이후 공식적으로 고려,고려인이라는 말을 쓰기 시작하였다.고려말,고려음식.고렷법(한민족의 전통 예법이나 관습),고렷글(한국어로 쓰인 글),고렷사람/고렷사름(러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사는 한인),고려촌(한인들이 모여 사는 마을)등은 한인들이 일상적으로 쓰는 말이다
일제강점기부터 현대까지의 역사
소련 극동지역의 고려인들을 강제로 이주시켜 거주지를 재배치하려는 계획은 1937년 이전에도 여러 차례 시도되었다. 소련은 1927년에 포시에트와 우수리스크 거주 고려인들을 내륙지방으로 이주시키려고 하였고, 1928년에는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을 하바롭스크로 이주시킬 계획이 있었으나 성사되지는 못하였다. 그러나 이듬해에 블라디보스톡 고려인들은 하바롭스크로 이주하였고 일부는 만주로 그리고 일부는 조선 땅으로 이주해 버렸다.1931년에 만주 지역이 일본의 침략을 받기 시작하면서 극동 정세는 소련에 불리하게 작용하기 시작하였다. 소련 중앙정치 무대에서는 1934년의 레닌그라드 당제1서기이던 키로프의 암살 사건을 계기로 1930년대의 대숙청이 전개되었다. 숙청대상에는 소련 정권수립에 기여했던 혁명원로들도 포함되었고, 공산당 간부들도 다수 해당되었다. 이러한 정치탄압의 노선 상에 고려인 공산당 간부들도 예외가 될 수 없었다. 1937년 강제이주가 실행되기 직전에 극동 지역의 고려인 간부들이 당국의 보안기관에 의하여 체포되었고 그 수는 2,000~2,500명으로 짐작될 뿐 정확한 수치는 아직까지 확인되지 않고 있다.1937년에 접어들면서 극동 지역의 일부 고려인들 속에서는 강제이주에 대한 소문이 돌기도 하였으나 이러한 소문은 과거에도 여러 차례 있었기 때문에 별로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해 8월 21일에 모스크바에서 결정이 되고 9월부터 신속하게 실행되어야 하는 강제이주 집행이 실제로 이루어 질 때까지 고려인들은 평상시의 생활을 할 뿐이었다. 대략 실행 3~7일 전에 통고되고 이주열차로 이동해야 했기 때문에 갑작스러운 혼란과 어려움이 고려인 사회에서 나타났다.소련 중앙 당국의 결정에 따라 먼저 국경 지대에 거주하던 고려인들이 강제이주 열차에 올랐다. 이어서 당국은 9월 28일자 ‘고려인들을 극동주에서 이주시키는 결정’을 하달함으로써 극동주의 나머지 지역에 거주하던 모든 고려인들을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완벽하게 강제이주시키게 되었다.
(1)20세기 초 고려말의 역사
당시의 고려말을 분석해보면 대체로 육진방언의 특징을 보여주지만 비육진 함경도 방언도 보인다.이것은 연해주에 거주하는 한인들이 대체로 육진 지역 출신인이고 또 그 외의 함북 출신인들이 있었음을 일러주는 것이다.가령,육진방언은 어느 환경에서나 구개음화가 이루어지지 않았다.그러나 함북방언에서는 형태소 내부에서 구개음화가 이루어졌고 '명사+주격조사'의 환경에서는 구개음화가 이루어지지 않 았다.
(2)20세기 초~1937년까지의 고려말의 역사
이 시기는 자료가 많지 않아서 고려말의 실제 모습과 그 변화 과정을 설명하기는 쉽지 않다.다만 이주민의 변동을 통해서 짐작해볼 수 있다. 20세기 초에는 이주민의 수효가 급증한다.20세기 전후한 시기의 함북 육진 지방에는 대략 10만 명 내외의 인구가 거주하고 있었다.1906년에는 34,399명이었던 것이 국권 상실 이후에는 54,076명,1914년에 는 64,309명, 1923년 106,817명,1927년에는 170,000여 명에 이르렀다.이를 보아 20세기 초 이후에는 함경도는 물론 함경도 이외의 지역인들이 대거 이주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이로써 육진방언은 점차 위 축되고 고려말은 점차 새로운 방향으로 개신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또 러시아 공민이 되기 위해 러시아어 교육을 받고 또 러시아 정교에 관심을 두는 시기가 되면서 자연스럽게 모국어를 학습할 수 있는 시기로 변화하였다.마을마다 소학교가 들어섬으로써 교육기히가 확대되었다.상대적으로 비육진 방언 화자들은 육진 방언권의 영향에서 벗어나게 딤으로써 고려말은 육진을 제외한 함경도 지역의 방언으로 점차 변화의 길을 걷게 되었던 것이다.
(3)현대까지의 고려말
80년대 말에서 90년대 초에 이르러 소련의 개혁 개방과 뒤이은 소비에트 연방의 해체로 중앙아시아 한인들의 언어인 고려말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다.고려말이 함북방언의 한 변종이라는 점,모국어 사용이 연령에 비례하여 급격하게 줄어들고 있다는 점,중앙아시아 한인들의 공용어는 서울이나 평양말이 아닌 현지 고려말이 되어야 한다는 주장등이 담긴 글들이 발표되었다.젊은 사람들은 러시아어를 사용해도 친족 명칭은 러시아어식으로 '마마mama' '빠빠papa'라 한다.아래에 <현대 고려말 사용 현황>에 자세히 나와있듯이,고려말은 점점 쇠퇴하고 있다.
고려말 전사 및 표기법
(발음기호를 텍스트로 표현할 수 없기에 사진을 이용하여 나타냈다.)
(3)운율적 요소에 대한 전사
장음을 동반한느 상승조,하강조,저장조는 동일모음을 반복하여 전사하였다.음운론적으로는 2mora정도의 길이로 해석할 수 있을 것인데 어떤 예들은 중부 방언의 노년층에서 들을 수 있는 음장보다도 길어 2음절로 간주할 수 있는 예들이 있다.
예를 들어서
대애지(돼지),쇄애지(송아지)
표현적 장음은 [:],[::}으로 전사한다.
(1)고려말의 어휘적 특징
어휘는 동북방언의 그것과 큰 차이가 없지만 어휘량은 매우 적다.고려말로 나타낼 수 없는 사물의 명칭이나 개념은 러시아어 어휘를 사용하기 때문이다.이주 후 언어정책적인 측면에서 창조적으로 고려말을 갈고 다듬어 부려 쓴다거나 또 새말을 만들어 쓰는 일이 없었으므로 고려말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고 거의 정체된 상태에 머물게 되었다.때문에 이주후에 나타난 새로운 정치 경제 사회 문화나 과학 기술 용어는 모두 러시아어를 쓰게 되었다.그러나 고려말 어휘가 있기는 하지만 일상적으로 러시아어를 쓰기 떄문에 습관적으로 러시아어 어휘를 쓰는 경우도 많다.
다음은 고려말 어휘의 예시이다. 끼생게:더부살이 낼래리:말을 마구 해대는 사람 수수깨애기:수수께끼 오마벨:불가사리 지정거리다:투정하다
(2)고려말의 통사적 특징
(논문,도서관 책,답사를 통해서 고려말의 통사론에 대해 알아보려고 하였지만 통사론에 대한 자료는 찾지 못했고 아래의 내용이 전부이다..ㅠ)
- 통사적으로는 이중목적어 구문의 쓰임이 빈번하다는 점과 부정 부사 '아이(<아니)', '못'(모음 또는 'ㅎ'으로 시작하는 용언 앞에서는 '모')이 놓이는 위치가 특이하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다.부정 부사는 합성어의 어기 사이에 놓이고 또 보조 용언의 앞에 놓인다.예를 들어서 떠 못 나오(떠나지 못하오),먹어 못 보오(못 먹어 보오).그리고 'ㄹ(또는 ㄴ) 것 같다' 구문은 의존명사 '것'이 없이 쓰이는데 이는 동북방언이나 고려말이 가진 보편적 특징이다.예를 들어서 안개 길 가툴하다(안개가 낄 것 같다).
고려말의 음운론
(1)고려말의 음성 특징
러시아어의 간섭으로 'ㄹㄹ'을 러시아어 유음 'Л[l]로, 'ㄹ'을 'Р[r]'로 조음하는 경향이 있다.또 어두 'ㅅ'를 [z]나 [c=ts]로 발음하기도 한다.[w]를 [v]로 조음하는 것도 러시아어의 영향이다.그리고 '지'를 '즈'와 '주'의 중간음 정도로 발음하기도 한다.예를 들어서 나주다(나지다,없던 것이 새로 나타나다),가주다(가지다),-주(-지,부정어미) 등.
(2)고려말의 음운 체계
'죄'는 자음 뒤에서는 원순성이 약화되어 있다.예를 들어서 쇠고기를 쇠고기와 세고기 사이로 발음하는 것이다.그러다 어두 위치에서는 이중모음 [we]로 나타난다.예를 들어서 외국을 웨국으로,왼쪽을 웬짝이라고 발음하는 것이다.또 '쇠'를 '쇄'로 발음하기도 하는데 이는 육진방언의 영향이다.육진방언에서는 대체로 'ㅚ'가 'ㅙ'로 변화하였다.
(3)고려말의 음운 현상
1.구개음화 형태소 내부의 ㄷ(ㅌ) 구개음화는 완료되었다.그러나 아래 예처럼 특이하게도 비구개음화형을 쓰기도 하는데 이는 육진방언의 영향이다. 예:피 한고티두(피 한 방울도),빗고티(빗방울),물고치(물방울),오좀고치(오줌방울),다티다(다치다) 한편,형태소 경계(굴절)에서의 ㄷ구개음화는 원칙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으나 몇 예가 보인다.'빋','곧',젙'은 그 주격형(또는 서술격 조사 '-이-' 결합형)이 언제나 [비디],[고디],[저티]로 실현된다.그러나 특이하게도 '낟'은 모음으로 시작하는 조사 앞에서 /낮/으로 교체된다.즉,부사격 조사 '-으르' 앞에서도 /낮/으로 교체되어 교체 범위가 확대된 것이다. 예:낮으로 빼엡더마.그전에 싹 낮으로 베에.낮을르 빼서 싹 묶어서 이래 조배기로 햇놧스 음.그 담에 그담에는 마술게다두 실어딜이그.뱃단으 싹 낮을르 삐문,다른 걸르 무스거 빼에.그전이 직금 와서 깜빠이나 잇는두.(뜻:낫으로 베더군요.그전에 싹 낫으로 베어.낫으로 베어서 싹 묶어서 이렇게 15단씩 무지를 지어 놓았지.그 다음에 그 다음에는 말 수레 따위로 실어들이고 볏단을.싹 낫으로 베면,다른 걸로 뭘 베어(=낫 외에는 벼를 벨 것이 없었다는 말).그전이,지금 와서 콤바인이나 있는지.)
2.모음 역행 동화 'ㅣ' 모음역행동화는 수의적이기는 하나 활발한 편이다.예:사람-이->사림이, 아츰-이->아침이,총각이->총객이. 피동화주가 /ㅜ/, /ㅗ/일 때 '이'모음역행동화를 보여주기도 한다. 예를 들어서 죽이구>쥑이구, 꿀도둑이->꿀도됙이(땅강아지),다로기>다뢰기,목도기>목되기(목침).
3.음운 탈락 /ㅣ/나 활음 /y/앞에서 /ㄴ/이 탈락하는 현상은 수의적이다.예:단치 구냐아(구냥+-으),구야이(구멍이). /ㄷ/이나 /ㅈ/으로 시작하는 어미 앞에서의 /ㄹ/ 탈락은 수의적이다.예:살던~사던.살지~사지/
4.활용 어간의 말음이 /ㄴ,ㅁ/이고 뒤에 장애음으로 시작하는 어미가 결합되면 대체로 경음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예:아르 안구[앙구] 잇엇지.
현대 고려말 사용 현황
현재의 고려말은 그 기반에 육진방언적 요소가 잔존해 있는데 보수적인 육진방언의 음운특징은 함북방언의 영향으로 함북방언의 음운특징을 갖게 되었다.그러나 고려말은 하나의 독립된 언어로 발전하여 공용어로 쓰이는 단계로까지는 발전하지 못했고,또 러시아어라는 전혀 이질적인 언어와 접촉해 옴으로써 자신의 안에 러시아어적인 요소를 지속적으로 축적해왔고 급기야는 그 러시아어에 압도되어 사멸할 위기에 놓여 있다는 점에서 koine라 하기도 어렵다.
koine:한 언어에 속한 여러 지역방언들이 상호 접촉할 수 있는 사회적 환경이 마련되면서, 어느 한 방언을 근간으로 하고 ㅇ기에 다른 방언적 요소들이 뒤섞인 것.
강제 이주 이전에 연해주에서 언어습득기를 보낸 사람들 즉,80대 중반 이상은 대체로 모방언을 유지하고 있지만 대체로 70세 이하는 koine형태의 방언을 구사하며, 그 이후에(대체로 80년대 이후) 출생한 사람들은 거의 고려말을 구사하지 못한다.
1960년대에 이르러 한인공동체(집단농장)를 벗어나 도시로 진출하면서 고려말의 위상은 흔들리게 되었다.공동체에 남은 한인들은 주로 모국어를 썼지만 공동체를 벗어난 고려인들의 고려말은 가정방언(family dialect)의 형태로 남게 되었다.즉.밖에서는 지배언어(dominant language)이자 민족 간의 공용어인 러시아어를 쓰고 집에서는 고려말을 쓰게 된 것이다.게다가 새로운 정치,경제,경제,문화 또는 과학 기술 관련 어휘들이 모두 러시아어로 되어 있으니 불가불 러시아어를 쓸 수밖에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이 결과 집거지역이든 산거지역이든 지금은 대략 80세 이상의 노인층만이 고려말을 유창하게 구사할 수 있다.이들 노년층은 이중언어자이거나 현지 이민족의 언어까지 구사할 수 있는 다중언어자이다.이 노인층은 자신들끼리 만나 어울리거나 또는 단오와 같은 명절에 한인끼리 만나 대화를 나눌때만 고려말을 쓴다.가정에서는 러시아어와 고려말을 뒤섞어 쓰는 경우도 혹간 있지만 젊은 세대가 고려말을 모르니 러시아어를 쓸 수 밖에 없다.70대는 어느 정도 듣고 이해할 수는 있지만 고려말이 매우 서툴다.러시아어와 초보적인 고려말 어휘를 뒤섞어 쓰는 경향이 있고 러시아어 조음 습관에 젖어 있어 발음이 명료하지 않다.한인 집거지역에서 사는 이들은 도시에서 사는 이들보다 사정이 좀 낫다.이렇게 된 까닭은 80대 이상의 세대는 이주와 정착 및 독소전쟁의 와중에서 한인들만의 지역 공동체 안에서 모국어를 쓰고 자랐지만 70대 이하는 대체로 1950년대의 안정된 사회 환경에서 러시아어로 공부하고 새로운 사회에 적극적으로 적응하면서 살아왔기 때문이다.본국과의 접촉도 없는 데다가 한국어 교육마저 일찍이 폐지되었고 또 사회가 발전하면 그에 따라 관련 어휘도 증가하여야 하나 그 자리를 러시아어가 메운 까닭에 고려말은 점점 설 자리를 잃게 된 것이다.이주 초기에는 모국어로 쓴 문학 관련 출판물도 나왔고 고려일보 <레닌기치>와 같은 신문이 지금까지 간행되고 있지만 이것이 고려말을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동력은 되지 못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고려말의 흔적이 남아있는 지역이 있다.카자흐스탄과 탈디쿠르간이다. 지도에 보라색으로 표시를 하였다.
- 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은 약 130여 개의 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민족국가이다.각 민족은 자신의 민족어를 구사하기도 하나 민족 간의 대화에서는 러시아어를 쓴다.구소련이 해체된 후 카자흐어가 공용어로 지정되면서 카자흐어도 많이 쓰인다.
- 탈디쿠르간
탈디쿠르간에는 6,000여 명의 한인들이 거주하지만 이민족과 함께 사는 까닭으로 일상적으로는 러시아어를 쓴다.구술자는 50대의 아들.딸 및 30대의 손녀와 한집에 사는데 가족간의 대화는 러시아어로 이루어진다.50대의 자녀들은 간단한 한인 음식,친족명칭 등을 알 뿐이다.이들은 초보적인 고려말만 구사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