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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주제'''==
* 시사단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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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사단(試士壇)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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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A%B5%90%EB%82%A8%EB%B9%88%ED%9D%A5%EB%A1%9D 교남빈흥록]''' 2)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8B%9C%EC%82%AC%EB%8B%A8_%EB%B9%84%EB%AC%B8 시사단 비문]''' 3)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B2%9C%EC%A3%BC%EA%B5%90_%EC%B4%88%EA%B8%B0_%EC%A7%80%EB%8F%84%EC%9E%90%EB%93%A4 천주교 초기 지도자들]''' 4)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A7%84%EC%82%B0%EC%82%AC%EA%B1%B4 진산사건]''' 5)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9E%90%EC%82%B0%EC%96%B4%EB%B3%B4 자산어보]'''
  
 
===국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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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단(試士壇)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조선후기 남인은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이후 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영조대 무신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실각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남인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정조 12년(1788)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부터였는데, 남인의 정승 임명은 갑술환국 이후 거의 8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조선후기 남인은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이후 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영조대 무신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실각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남인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정조 12년(1788)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부터였는데, 남인의 정승 임명은 갑술환국 이후 거의 8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 후 노론, 소론과 함께 정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남인은 정조 15년(1791)에 일어난 진산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천주교인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나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치적으로 파장이 커진 이유는 이들이 근기남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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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제공의 우의정 임명 후 노론, 소론과 함께 정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남인은 정조 15년(1791)에 일어난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A7%84%EC%82%B0%EC%82%AC%EA%B1%B4 진산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B2%9C%EC%A3%BC%EA%B5%90_%EC%B4%88%EA%B8%B0_%EC%A7%80%EB%8F%84%EC%9E%90%EB%93%A4 천주교 초기 지도자들]'''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나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치적으로 파장이 커진 이유는 이들이 근기남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남인은 뿌리는 동일하지만 활동 지역과 기반을 중심으로 영남남인(영남)과 근기남인(경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근기남인들 중 성호 이익의 제자 일부는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제 관계 뿐 아니라 혼인으로 얼키설키 연결되어 있어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근기남인에서 주요한 인물이었던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가환·정약용 등도 천주교를 믿었는데, 권일신이 지방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라도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윤지충의 경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포교로 인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따라서 윤지충·권상연 둘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기남인 중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인물 전체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당시 남인은 뿌리는 동일하지만 활동 지역과 기반을 중심으로 영남남인(영남)과 근기남인(경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근기남인들 중 성호 이익의 제자 일부는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제 관계 뿐 아니라 혼인으로 얼키설키 연결되어 있어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근기남인에서 주요한 인물이었던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가환·정약용 등도 천주교를 믿었는데, 권일신이 지방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라도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윤지충의 경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포교로 인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따라서 윤지충·권상연 둘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기남인 중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인물 전체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다행히 이 사건은 정조가 나서서 권일신만 유배 보내는 선에서 무마되었지만 정조가 근기남인의 수장인 채제공을 위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덮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근기남인은 사학의 무리와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근기남인이 추숭을 주도하기 어렵게 되면서 이를 도울 우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채제공은 근기남인과 뿌리를 같이 하는 영남남인에게로 눈을 돌려, 진산사건 다음 해 봄인 정조 16년(1792) 3월에 정조의 측근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남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산별시를 치르고 합격자 명단인 『교남빈흥록』을 간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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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행히 이 사건은 정조가 나서서 권일신만 유배 보내는 선에서 무마되었지만 정조가 근기남인의 수장인 채제공을 위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덮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근기남인은 사학의 무리와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근기남인이 추숭을 주도하기 어렵게 되면서 이를 도울 우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채제공은 근기남인과 뿌리를 같이 하는 영남남인에게로 눈을 돌려, 진산사건 다음 해 봄인 정조 16년(1792) 3월에 정조의 측근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남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산별시를 치르고 합격자 명단인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A%B5%90%EB%82%A8%EB%B9%88%ED%9D%A5%EB%A1%9D 교남빈흥록]'''』을 간행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정조와 채제공의 우군으로 포섭된 영남남인은 그 해 여름 영남의 선비 만 명이 참여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할 것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중앙정계의 여론은 온통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쏠리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죽을 때 까지 정계의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게 된다. 이는 정계의 프레임 전쟁에서 남인이 의제를 선점하고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큰 변화였지만 근기남인의 사학 혐의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희석시키고 근기남인의 고립을 막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를 통해 정조와 채제공의 우군으로 포섭된 영남남인은 그 해 여름 영남의 선비 만 명이 참여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할 것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중앙정계의 여론은 온통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쏠리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죽을 때 까지 정계의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게 된다. 이는 정계의 프레임 전쟁에서 남인이 의제를 선점하고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큰 변화였지만 근기남인의 사학 혐의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희석시키고 근기남인의 고립을 막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 때 치러진 도산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도산서원 앞 송림에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 비석의 비문을 채제공이 직접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순조 1년(1801)에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근기남인 중 천주교를 믿었던 권철신과 이가환은 사형에 처해지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짓고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되었는데 최근에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때 채제공은 이미 죽은 뒤였으나 생전에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사후에 관작을 박탈당하고 도산별시를 기념해 세웠던 비석과 비각도 파괴되었다가, 1823년에 채제공이 복권된 이후에야 비석과 비각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의 시사단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시험 장소였던 송림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단을 쌓아 비석과 비각을 그대로 위로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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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치러진 도산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도산서원 앞 송림에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 비석의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8B%9C%EC%82%AC%EB%8B%A8_%EB%B9%84%EB%AC%B8 시사단 비문]'''을 채제공이 직접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순조 1년(1801)에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근기남인 중 천주교를 믿었던 권철신과 이가환은 사형에 처해지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http://dh.aks.ac.kr/~classics/wiki/index.php/%EC%9E%90%EC%82%B0%EC%96%B4%EB%B3%B4 자산어보]'''』를 짓고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되었는데 최근에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때 채제공은 이미 죽은 뒤였으나 생전에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사후에 관작을 박탈당하고 도산별시를 기념해 세웠던 비석과 비각도 파괴되었다가, 1823년에 채제공이 복권된 이후에야 비석과 비각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의 시사단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시험 장소였던 송림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단을 쌓아 비석과 비각을 그대로 위로 옮겨 놓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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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sadan and its Relation with the Namin (Southerners) and Cathol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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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sadan and its Relation with the Namin (Southerners) and Catholicism'''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 Namin (Southerners) lost their influence as a political faction after being dismissed due to the Gapsulhwanguk incident(1) during King Sukjong reign, and were overthrown in central politics on charges of participating in the Musinran(2) of King Yeongjo's reign. Later, the Namin rose to prominence in the central political circles after the appointment of Chae Je-gong (1720 -1799) as Third State Councilor (우의정) in the 12th year of King Jeongjo (1788). The appointment of a person belonging to the Namin took place almost 80 years after the Gapsulhwanguk incident.After the appointment of Chae Je-gong as Third State Councilor, the Namin became one of the pillars of politics along with the Noron (Old Doctrine faction) and the Soron (Young Doctrine faction). But they were greatly affected by the Jinsan incident in 1791 in the 15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When their mothers died,  Yoon Ji-chung (1759-1791) and Kwon Sang-yeon (1751-1791), Catholics living in Jinsan, Jeolla Province, were executed for burning Shinju (the tablet of the dead) without holding a mourning ritual. The reason why the political repercussions were so great was that they were closely related to the Namin in Gyeonggi-do Province.
 
  
At that time, based on their residence, the Namin were divided into the Yeongnam Namin and the Geungi (Gyeonggi) Namin. Some of the disciples of Yi Ik (1681-1764) came to believe in Catholicism. It spread rapidly as they were inter-connected not only by their personal relationships between the teacher and the disciple, but also by marriage. The main figures who believed in Catholicism were Kwon Cheol-sin (1736-1801), Kwon Il-sin, Yi Ga-hwan (1742-1801), and Jeong Yak-yong. As Kwon Il-shin actively engaged in local missionary work, Catholicism was spread in Jeolla-do, and Yoon Ji-chung joined Catholicism due to the mission of Jeong Yak-jeon (1758~1816), an elder brother of Jeong Yak-yong (1762-1836). Therefore, it did not end with the problems of both Yoon Ji-chung and Kwon Sang-yeon, but it was an event that could be turned into a whole group of people who were friendly to Catholic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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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n the late Joseon Period, the Namin (Southerners) lost their influence as a political faction after being dismissed due to the Gapsulhwanguk incident[1] during King Sukjong reign, and were overthrown in central politics on charges of participating in the Musinran[2] of King Yeongjo's reign. Later, the Namin rose to prominence in the central political circles after the appointment of Chae Je-gong (1720 -1799) as Third State Councilor (우의정) in the 12th year of King Jeongjo (1788). The appointment of a person belonging to the Namin took place almost 80 years after the Gapsulhwanguk incident. After the appointment of Chae Je-gong as Third State Councilor, the Namin became one of the pillars of politics along with the Noron (Old Doctrine faction) and the Soron (Young Doctrine faction). But they were greatly affected by the Jinsan incident in 1791 in the 15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When their mothers died,  Yoon Ji-chung (1759-1791) and Kwon Sang-yeon (1751-1791), Catholics living in Jinsan, Jeolla Province, were executed for burning Shinju (the tablet of the dead) without holding a mourning ritual. The reason why the political repercussions were so great was that they were closely related to the Namin in Gyeonggi-do Provi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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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at time, based on their residence, the Namin were divided into the Yeongnam Namin and the Geungi (Gyeonggi) Namin. Some of the disciples of Yi Ik (1681-1764) among the Geungi Namin came to believe in Catholicism. It spread rapidly as they were inter-connected not only by their personal relationships between the teacher and the disciple, but also by marriage. The main figures who believed in Catholicism were Kwon Cheol-sin (1736-1801), Kwon Il-sin (1742-1791), Yi Ga-hwan (1742-1801), and Jeong Yak-yong (1762-1836). As Kwon Il-shin actively engaged in local missionary work, Catholicism was spread in Jeolla-do, and Yoon Ji-chung joined Catholicism due to the mission of Jeong Yak-jeon (1758-1816), an elder brother of Jeong Yak-yong. Therefore, the Jinsan incident in 1791 did not end with the problems of both Yoon Ji-chung and Kwon Sang-yeon, but it was an event that could affect a whole group of people who were friendly to Catholicism.
  
 
Fortunately, King Jeongjo ended the case with only Kwon Il-shin being exiled, but there was a controversy that King Jeongjo covered the case without expanding it for Chae Je-gong, the head of the Geungi (Gyeonggi) Namin. Therefore, the Geungi Namin were suspected of being involved in a group of Catholics, forcing their activities to shrink.
 
Fortunately, King Jeongjo ended the case with only Kwon Il-shin being exiled, but there was a controversy that King Jeongjo covered the case without expanding it for Chae Je-gong, the head of the Geungi (Gyeonggi) Namin. Therefore, the Geungi Namin were suspected of being involved in a group of Catholics, forcing their activities to shrin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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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t this time, Chae Je-gong was already dead, but was later stripped of his post and title for defending Catholicism during his lifetime. In addition, the monument and the pavilion of Sisadan erected to commemorate the Dosan Byeolsi were destroyed. It was not until 1823 that they were restored. With the construction of Andong Dam in 1975, Sisadan, which was the test site, was flooded, so a 10 meter high stone mound was built underneath Sisadan to prevent it from becoming submerged by rising waters.
 
At this time, Chae Je-gong was already dead, but was later stripped of his post and title for defending Catholicism during his lifetime. In addition, the monument and the pavilion of Sisadan erected to commemorate the Dosan Byeolsi were destroyed. It was not until 1823 that they were restored. With the construction of Andong Dam in 1975, Sisadan, which was the test site, was flooded, so a 10 meter high stone mound was built underneath Sisadan to prevent it from becoming submerged by rising wa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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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n incident in 1694 (the 20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in which the Namin, the ruling class of Joseon, tried to remove a group of people trying to reinstate the abandoned Queen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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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an incident in 1694 (the 20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in which the Namin, the ruling class of Joseon, tried to remove a group of people trying to reinstate the abandoned Queen M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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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a rebellion led by the Soron such as Yi In-jwa in 1728
(2) a rebellion led by the Soron such as Yi In-jwa in 1728
 
  
 
===참고자료===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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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kiss.kstudy.com/thesis/thesis-view.asp?key=1833883 김문식 「교남빈흥록을 통해 본 정조의 대영남정책」 퇴계학보 110권 0호,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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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www.gomunseo.or.kr/board/boardArticleView.do?boardId=1&boardArticleId=698&menuId=6&page=1 정재용 「18세기 말 ~ 19세기 초 의리문제를 둘러싼 안동지역 남인과 노론의 대립」 안동대학교,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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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1464637 허태용 「정조대 후반 탕평정국과 진산사건의 성격」 성균관대학교,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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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43594&cid=46615&categoryId=46615 「안동 도산서원」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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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9690&cid=46656&categoryId=46656 「시사단」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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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terms.naver.com/entry.nhn?docId=559690&cid=46656&categoryId=46656 「문화재청」 국가문화유산포털]
  
 
=='''노드리스트'''==
 
=='''노드리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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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언적 || Actor || 이언적(李彦迪,_1491-1553)
 
| 이언적 || Actor || 이언적(李彦迪,_1491-15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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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 || Actor || 퇴계(退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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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계이황 || Actor || 퇴계이황(退溪李滉,_1502-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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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트워크 그래프'''==
 
=='''네트워크 그래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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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1년 6월 22일 (화) 13:40 기준 최신판

주제

  • 시사단(試士壇)과 관련된 남인과 서학(천주교)

1) 교남빈흥록 2) 시사단 비문 3) 천주교 초기 지도자들 4) 진산사건 5) 자산어보

국문

조선후기 남인은 숙종대 갑술환국으로 인해 실각한 이후 붕당으로서의 영향력을 상실했고, 영조대 무신란에 가담했다는 혐의로 인해 중앙정계에서 실각하였다. 이후 중앙정계에서 남인이 다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한 것은 정조 12년(1788)에 채제공이 우의정에 임명되면서부터였는데, 남인의 정승 임명은 갑술환국 이후 거의 80여 년 만에 이루어진 일이었다.

채제공의 우의정 임명 후 노론, 소론과 함께 정계의 한 축을 이루게 된 남인은 정조 15년(1791)에 일어난 진산사건으로 인해 큰 타격을 입게 된다. 전라도 진산에 살던 천주교 초기 지도자들인 윤지충과 권상연이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상을 치루지 않고 신주를 불에 태워버린 사건이 일어나 두 사람이 사형에 처해졌는데, 정치적으로 파장이 커진 이유는 이들이 근기남인과 밀접한 관계에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남인은 뿌리는 동일하지만 활동 지역과 기반을 중심으로 영남남인(영남)과 근기남인(경기)으로 나뉘어져 있었다. 근기남인들 중 성호 이익의 제자 일부는 천주교를 믿게 되었는데 이들은 사제 관계 뿐 아니라 혼인으로 얼키설키 연결되어 있어 천주교가 빠르게 전파되었다. 근기남인에서 주요한 인물이었던 이익의 제자인 권철신·권일신 형제와 이가환·정약용 등도 천주교를 믿었는데, 권일신이 지방 포교에 적극적으로 나서면서 전라도에 천주교가 전파되고 윤지충의 경우 정약용의 형 정약전의 포교로 인해 천주교에 입교하게 되었다. 따라서 윤지충·권상연 둘의 문제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근기남인 중 천주교에 우호적이었던 인물 전체로 비화될 수 있는 사건이었다.

다행히 이 사건은 정조가 나서서 권일신만 유배 보내는 선에서 무마되었지만 정조가 근기남인의 수장인 채제공을 위해 사건을 확대시키지 않고 덮었다는 논란이 일어났고, 근기남인은 사학의 무리와 연루되어 있다는 의심을 받으면서 활동이 위축될 수밖에 없었다. 당시 정조와 채제공은 사도세자 추숭을 계획하고 있었는데 이 사건으로 근기남인이 추숭을 주도하기 어렵게 되면서 이를 도울 우군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에 채제공은 근기남인과 뿌리를 같이 하는 영남남인에게로 눈을 돌려, 진산사건 다음 해 봄인 정조 16년(1792) 3월에 정조의 측근 이만수를 보내 도산서원에서 퇴계 이황에게 제사를 지내게 하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도산서원 앞에서 영남남인을 대상으로 하는 도산별시를 치르고 합격자 명단인 『교남빈흥록』을 간행하게 된다.

이를 통해 정조와 채제공의 우군으로 포섭된 영남남인은 그 해 여름 영남의 선비 만 명이 참여하는 ‘영남만인소’를 올려 사도세자가 억울하게 죽었음을 밝히고 사도세자를 왕으로 추숭할 것을 적극 주장함으로써 중앙정계의 여론은 온통 사도세자 추숭문제로 쏠리게 되었고 이후 정조가 죽을 때 까지 정계의 가장 큰 이슈로 부각되게 된다. 이는 정계의 프레임 전쟁에서 남인이 의제를 선점하고 주도할 수 있게 되었다는 점에서 기존과 다른 큰 변화였지만 근기남인의 사학 혐의에 쏠린 사람들의 관심을 희석시키고 근기남인의 고립을 막았다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는 일이었다.

이 때 치러진 도산별시를 기념하기 위해 정조 20년(1796)에 도산서원 앞 송림에 비석과 비각을 세우게 되었고, 이 비석의 시사단 비문을 채제공이 직접 짓게 되었다. 그러나 정조 사후 노론 벽파가 정권을 잡자 순조 1년(1801)에 천주교도에 대한 신유박해가 일어났고, 근기남인 중 천주교를 믿었던 권철신과 이가환은 사형에 처해지고 정약전은 흑산도로 유배되어 『자산어보』를 짓고 문순득을 만나 『표해시말』을 쓰게 되었는데 최근에 영화 자산어보가 개봉하기도 하였다. 이때 채제공은 이미 죽은 뒤였으나 생전에 천주교를 비호했다는 이유로 사후에 관작을 박탈당하고 도산별시를 기념해 세웠던 비석과 비각도 파괴되었다가, 1823년에 채제공이 복권된 이후에야 비석과 비각이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현재의 시사단은 안동댐이 건설되어 시험 장소였던 송림이 물에 잠기게 되면서 단을 쌓아 비석과 비각을 그대로 위로 옮겨 놓은 것이다.

영문

Sisadan and its Relation with the Namin (Southerners) and Catholicism

In the late Joseon Period, the Namin (Southerners) lost their influence as a political faction after being dismissed due to the Gapsulhwanguk incident[1] during King Sukjong reign, and were overthrown in central politics on charges of participating in the Musinran[2] of King Yeongjo's reign. Later, the Namin rose to prominence in the central political circles after the appointment of Chae Je-gong (1720 -1799) as Third State Councilor (우의정) in the 12th year of King Jeongjo (1788). The appointment of a person belonging to the Namin took place almost 80 years after the Gapsulhwanguk incident. After the appointment of Chae Je-gong as Third State Councilor, the Namin became one of the pillars of politics along with the Noron (Old Doctrine faction) and the Soron (Young Doctrine faction). But they were greatly affected by the Jinsan incident in 1791 in the 15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When their mothers died, Yoon Ji-chung (1759-1791) and Kwon Sang-yeon (1751-1791), Catholics living in Jinsan, Jeolla Province, were executed for burning Shinju (the tablet of the dead) without holding a mourning ritual. The reason why the political repercussions were so great was that they were closely related to the Namin in Gyeonggi-do Province.

At that time, based on their residence, the Namin were divided into the Yeongnam Namin and the Geungi (Gyeonggi) Namin. Some of the disciples of Yi Ik (1681-1764) among the Geungi Namin came to believe in Catholicism. It spread rapidly as they were inter-connected not only by their personal relationships between the teacher and the disciple, but also by marriage. The main figures who believed in Catholicism were Kwon Cheol-sin (1736-1801), Kwon Il-sin (1742-1791), Yi Ga-hwan (1742-1801), and Jeong Yak-yong (1762-1836). As Kwon Il-shin actively engaged in local missionary work, Catholicism was spread in Jeolla-do, and Yoon Ji-chung joined Catholicism due to the mission of Jeong Yak-jeon (1758-1816), an elder brother of Jeong Yak-yong. Therefore, the Jinsan incident in 1791 did not end with the problems of both Yoon Ji-chung and Kwon Sang-yeon, but it was an event that could affect a whole group of people who were friendly to Catholicism.

Fortunately, King Jeongjo ended the case with only Kwon Il-shin being exiled, but there was a controversy that King Jeongjo covered the case without expanding it for Chae Je-gong, the head of the Geungi (Gyeonggi) Namin. Therefore, the Geungi Namin were suspected of being involved in a group of Catholics, forcing their activities to shrink.

At that time, King Jeongjo and Chae Je-gong were planning to pay respect to Crown Prince Sado, but this incident made it difficult for the Geungi Namin to lead the memorial project, and they needed supporters to help them. Therefore, Chae Je-gong turned to the Yeongnam Namin who shared roots with Geungi men. In March of 1792, in the spring following the Jinsan Incident (1791), Chae Je-gong sent Yi Man-soo (1752-1820), a close aide to King Jeongjo, to hold a memorial service for Yi Hwang (1501-1570) at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도산서원). In order to commemorate this, a special state examination titled "Dosan Byeolsi (도산별시)" was held at Sisadan in front of Dosanseowon Confucian Academy for the Yeongnam Namin, and a list of successful applicants, "Gyonam Binheungrok (교남빈흥록)," was published. Through this, the Yeongnam Namin, who became supporters of King Jeongjo and Chae Je-gong, posted an appeal to the king called the "Yeongnam Maninso" in which 10,000 scholars from the Yeongnam region participated, claiming that Crown Prince Sado died unjustly and that he should be the king. As a result, public opinion in the central political community turned to the issue of Crown Prince Sado, and later became the biggest issue in politics until King Jeongjo died. This was a big change in that the Namin were able to dominate the agenda in the political framing war, but it was also meaningful in that it diluted the interest in those who were accused of Catholicism and prevented the isolation of the Namin.

In order to commemorate the special state examination "Dosan Byeolsi" held at this time, a monument and a pavilion were erected at Sisadan in front of Dosanseowon in the 20th year of King Jeongjo's reign (1796). Chae Je-gong composed the inscription on the monument himself. After King Jeongjo's death, however, when the Noron faction came to power, the persecution of Catholics occurred in 1801, and Kwon Cheol-shin and Yi Ga-hwan, who believed in Catholicism, were executed. Jeong Yak-jeon was exiled to Heuksando Island where he wrote "Jasan Eobo," a book on fish in the nearby southern sea, and met Moon Soon-deuk (1777-1847) to write "Pyohaesimal," which recorded Moon Soon-deuk's sea drift. Recently, the movie "Jasan Eobo" was released.

At this time, Chae Je-gong was already dead, but was later stripped of his post and title for defending Catholicism during his lifetime. In addition, the monument and the pavilion of Sisadan erected to commemorate the Dosan Byeolsi were destroyed. It was not until 1823 that they were restored. With the construction of Andong Dam in 1975, Sisadan, which was the test site, was flooded, so a 10 meter high stone mound was built underneath Sisadan to prevent it from becoming submerged by rising waters.


[1] an incident in 1694 (the 20th year of King Sukjong's reign) in which the Namin, the ruling class of Joseon, tried to remove a group of people trying to reinstate the abandoned Queen Min.     
[2] a rebellion led by the Soron such as Yi In-jwa in 1728

참고자료

노드리스트

문화유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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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사단 Heritage (경상북도유형문화재_제33호)_시사단
안동도산서원 Heritage (사적_제170호)_안동_도산서원

장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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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Place 흑산도(黑山島)
안동대학교 Place 안동대학교(安東大學校)

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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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남빈흥록 Record 교남빈흥록(嶠南賓興錄)
영남만인소 Record 영남만인소(嶺南萬人疏)
표해시말 Record 표해시말(漂海始末)
자산어보 Record 자산어보(玆山魚譜)
치제문 Record 치제문(致祭文)
금등문서 Record 금등문서(金縢之詞)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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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유박해 Event 신유박해(辛酉迫害)
도산별시 Event 도산별시(陶山別試)
사도세자추숭 Event 사도세자추숭(思悼世子追崇)
진산사건 Event 진산사건(珍山事件)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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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익 Actor 이익(李瀷,_1681~1764)
이만수 Actor 이만수(李晩秀,_1752~1820)
채제공 Actor 채제공(蔡濟恭,_1720~1799)
조선_정조 Actor 조선_정조(正祖,_1752~1800)
사도세자 Actor 사도세자(思悼世子,_1736-1762)
김종수 Actor 김종수(金鍾秀,_1728~1799)
권철신 Actor 권철신(權哲身,_1736-1801)
이가환 Actor 이가환(李家煥,_1742-1801)
윤지충 Actor 윤지충(尹持忠,_1759-1791)
권상연 Actor 권상연(權尙然,_1751-1791)
문순득 Actor 문순득(文順得,_1777-1847)
정약전 Actor 정약전(丁若銓,_1758~1816)
이벽 Actor 이벽(李蘗,_1754-1786)
이언적 Actor 이언적(李彦迪,_1491-1553)
퇴계이황 Actor 퇴계이황(退溪李滉,_1502-15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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