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동독: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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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1 전력을 다해 전진?
호르스트 하이트칭거(Horst Haitzinger)가 1989년 8월 그린 캐리커처다. 말풍선 속에 소개된 이 표현은 캐리커처가 탄생하기 직전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했던 한 연설에서 사용했던 표현이다. 동독에서는 동독창설 40주년을 준비하고 있던 때였다. 그 누구도 사회주의 국가였던 동독이 몇 주 후 세상에서 사라져 버릴 것이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정치적 압박과 감시 "당은 항상 옳다…" 사회주의통일당(SED)의 1950년도 당가의 한 소절이다. 이 소절의 내용은 수십 년 동안 유효했다. 당과 지도부에 대한 비판은 "반역 행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과 단체들이 끊임없이 사회주의통일당(SED) 정권에 저항하였다. 특히 개신교 교회의 보호 하에서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 평화운동, 환경보호운동 또는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기 위한 활동들을 추진하였다. 국가는 비판적인 작가와 예술가들의 활동을 금지시킴으로써 대응하였고, 그 밖에도 이러한 사람들은 구금하거나 추방하였다. 동독 정부는 매우 넓고 촘촘한 감시 시스템을 갖고 있었다. 감시 시스템의 중심에는 "슈타지"라 불리던 "국가보안부"가 있었다.
적응과 사적 영역으로의 도피 정치적 억압과 감시로 인해 동독 주민들은 일터나 학교에서 정해진 규칙에 적응해야만 했다. 직장인들은 각종 대회와 정기적인 집회 및 운동에 참여해야만 했다. 사회주의통일당(SED)는 학교로 하여금 학생들을 "사회주의적 인물"로 양성하도록 즉, 무기를 이용해서라도 사회주의를 수호할 의지가 있는 성인으로 양성하도록 하였다. 따라서 학교에서는 "국가시민교과(Staatsbürgerkunde)"가 중요한 과목이었다. 그 밖에도 "방어수업(Wehrkunde)" 시간에는 무기 다루는 법을 배웠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어린 개척자(Junge Pioniere)" (1-8학년) 단체의 회원이었다가 "자유독일청년(Freie Deutsche Jugend)" (9-12)의 회원이 되었다. 왜냐하면 이러한 단체의 가입 여부 및 단체에서의 활동 정도가 성적에도 영향을 주었기 때문이다. 당과 국가에 대한 충성도는 "상급학교(Erweiterte Oberschule)" 진학과 상급학교 졸업 시 아비투어(Abitur) 응시 여부를 좌우하였고 결국 대학진학도 좌우했다. 수 많은 청소년들과 성인들은 당과 국가의 개입을 최대한 피하고자 마치 작은 틈새에 숨듯 개인적인 삶으로 도피하였다. 집에서 "파티"를 열거나 친구와의 만나 대화를 하고, 작은 오두막 집인 "다체(Datsche)"로 소풍을 가며 시간을 보내는 것이 전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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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 사회주의체제 하에서의 학교생활
2a 수업의 목표
11학년의 "전투계획(Kampfplan)" 중 발췌:
2. 우리는 소비에트연방 및 다른 사회주의국가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지킬 것이다.
- 우리 학급의 모든 학생들은 소비에트연방과 모든 "독일-소비에트 친선단체(Deutsch-sowjetische Freundschaft)"의 회원들과의 우호적 관계를 지켜나갈 것을 선언한다.
3. 우리는 조국에서 사회주의의 실현을 위한 현재와 미래의 노력에 참여할 것이다.
- 우리는 숙제를 베끼지 않고 오직 우수한 학업성취도를 달성하기 위하여 공부할 것이다.
- 우리는 사회적으로 유익한 일들만 함으로써 우리 학교를 더 아름답게 만들어 나갈 것이다. 모든 학생은 이를 위해 최소 10시간씩 투자할 것이다.
4. 우리는 FDJ 조직을 더 강화하기 위해 투쟁할 것이다.
- 우리는 모든 회원들이 구체적인 과제를 수행하고 이에 대해 정기적으로 보고하도록 할 것이다.
출처: 볼프강 라우테만(Wolfgang Lautemann), 만프레드 슐렌케(Manfred Schlenke): Geschichte in Quellen. Bd. VII 1980, p. 314
2b 군사훈련(Fahnenappell) 동독의 작가 라이너 쿤체(Reiner Kunze)는 1976년 "아름다운 시간들(Die wunderbaren Jahre)"라는 책을 발행하였다. 이 책은 동독에서의 일상생활을 소개한다. 그 결과 쿤체는 동독의 작가협회에서 제명되었다. 쿤체는 1977년 서독으로 이주하였다. 그가 쓴 "아름다운 시간들"이 서독에서 영화로 제작되었다. 동독에서는 학교에서 매일 아침 군사훈련(Fahnenappell)이 실시된다. 모든 학생들이 참여해야 하는 훈련이다. 월요일 아침 X 소재 상급학교의 교장이 깃발 옆에 제복을 입고 서 있다. 교장은 인민군의 장교들이 입는 이 제복을 특별 훈련 때만 입었다. 교장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학생이 인민군의 장교를 멍청하고 덜 떨어졌다고 표현하는 것은 용납될 수 없는 일이다. 이러한 학생들과 가까이 지내지 않도록!" 관구사령부 대표는 노동자의 아들이자 11학년 학생인 N을 장교후보로 추천하려고 했었다. 관구사령부 대표는 N에게 교장을 보면 알 수 있듯 장교들은 모든 분야의 교양이 풍부한 사람이라고 설득했다. 그러나 N은 교장이 오히려 "편협"해 보인다고 답했다. 교장의 교육 방침 때문에 학생들은 일방적인 교육을 받으며 스스로 생각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깃발은 토요일에 철거되었기 때문에 단상에는 계속 깃발이 걸려 있었고 학생 N은 11표의 반대와 1표의 기권으로 FDJ에서 제명되었다. 사전에 부모회의가 열렸었고, 회의에 참석했던 부모들은 자고 있던 딸을 깨웠다. "그 놈 편 들면 큰일난다! 그 놈을 편드는 얘기는 절대 하면 안 된다!" 부모회의에 이어 학급회의가 열렸다. "N의 편을 드는 사람은 노동자계층의 입장에 반대하는 사람이다." 결국 토론자로 선정된 모든 학생들은 각자 N에 대해 부정적인 이야기들을 늘어 놓았고 그 모든 이야기를 종합하자 N은 불손한 인간이며, 학교친구들을 불안에 빠뜨리고 극단적인 사상을 가진 사람이라는 결론이 도출되었다. 한 여학생은 N을 장교로 추천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냐고 실망스럽게 물었다. (3일 후) N은 수업 시간에 참석할 수 없게 되었다. 친한 친구들에게 담임선생님이 말했다. "우리 몰래 N과 연락을 하면 자네들도 위험해질 수 있네." N의 퇴학을 허가해달라는 학교측의 요청이 베를린에 접수되었다. "귀하의 아들을 독일민주공화국의 그 어떤 상급학교에서도 받아주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이유는 알려진 그대로 입니다. 이 조치로 귀하의 아들이 다시 독일민주공화국의 젊은 시민으로서 취해야 할 입장과 태도를 취할 수 있기를 희망합니다." Reiner Kunze: Die wunderbaren Jahre. Frankfur/Main 1976, p. 60-63
2c 동기 라이너 쿤체(Reiner Kunze)에게 한 지인이 E라는 도시에서 한 학생이 자살을 했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다음날 아침 여러 학급의 학생들이 검정 완장을 차고 등장했다. 그러나 학교 측에서는 검정 완장이 저항을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하겠다고 밝혔다. 죽은 학생이 기독교 청소년 단체의 회원으로 해골 그림이 그려져 있고 "예수 그리스도"라고 쓰여진 메모를 남기고 죽었기 때문이라고 했다. 아비투어를 앞둔 학생들이 먼저 완장을 벗었다. 죽은 학생과 같은 학급 학생이 아닌 몇몇 아이들은 담임선생으로부터 장례식에 참석해도 좋다는 허가를 받았지만, 교장의 지시로 그 허가는 다시 철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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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사는 노력 했지만, 교장의 마음을 돌리지 못했다. 당원들은 죽은 학생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못하도록 주의를 받았다. 장례식 날에는 수업 시간 내내 학생들이 감시를 받았고 교실문도 잠겨져 있었다.
Reiner Kunze: Die wunderbaren Jahre. Frankfur/Main 1976, p. 60-63
M3 추방
싱어송라이터인 볼프 비어만(Wolf Biermann)은 자신을 사회주의 작가이자 가수로 정의했지만, 사회주의가 실현되는 국가에 민주주의적 권리들이 부재하다고 생각했다. 동독정부는 그가 서독에서 공연을 하는 동안 그를 추방했고, 서독과 동독에서 다수의 시위가 일어났다. 당시 동독에서 인기 가수였던 니나 하겐(Nina Hagen)은 항의의 뜻으로 서독으로 갔다.
M4 감시
당과 다른 생각을 가진 그리고 그 생각을 공개적으로 말하는 시민들이 있었따.
대대적인 감시 조치가 도입되었다. 특히 군과 경찰의 감시 차량이 니치케(Nitschke) 가족의 집 앞에 나타났다. 이 차량은 모든 방문객을 감시하고 일부 방문객들은 사진으로 찍어 두기도 했다. 니치케 박사와 그의 아내가 집을 나설 때는 승용차로 두 사람을 따라 다니며 감시하기도 하였다. 동시에 전화가 끊겼고, 모든 우편물이 압수되었다.
출처: Süddeutsche Zeitung, 1990년 11월 3/4일
M5 사회주의자로 살기?
사회주의적인 생활방식은 무엇보다 좁은 의미에서의 개인적 삶에 영향을 미쳤다. 노동과 정치가 우선시 된 사회 속 개인은 직업인으로서 또는 인민으로만 존재할 뿐, 여성이나 남성, 성인이나 청소년으로서 개인 삶의 이력이나 이해, 댄스 애호가나 축구 팬, 한 가정의 아버지 등으로서는 존재하지 못하였다. 동독 정부는 개인 삶의 영역을 사회주의적 생활방식으로 포괄하지 못하였다. 그런데 동독 주민들은 점점 개인 삶의 영역에 집중하는 현상을 보였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농업부문에서 집단농장 체제가 운영된 이후 농업조합의 건물들은 그대로 방치하는 반면 개인 가정집을 수리하고 꾸미는 일에 집중하기 시작한 메클렌부르크 농민들이다. 사람들은 힘들게 달성한 부를 개인이 마음껏 누리지 못한다고 불평하였다. 더 이상 공동체를 위해 희생하기 싫다고 불평하였다. 이러한 불평은 최근 들어 점점 커졌다. 서독에서는 호수가에 건설을 하는 것이 금지되어 있음에도 동독 주민들이 건물을 지을 만큼 개인 소유의 집에 대한 요구가 커지고 있다는 사실이 보도되기도 했다. 실질적으로 지난 몇 년 사이 마그데부르크 출신의 한 교육자가 말한 것처럼 "물질적인 부분, 즉 자동차, 자기집, 모터보트 등"에 대한 동독주민들의 요구가 심각한 문제가 될 만큼 커졌다.
헤르만 루돌프(Hermann Rudolph): Die Gesellschaft der DDR - eine deutsche Möglichkeit? München 1972, p. 92
M6 사회주의적 동독 역시 독일 국가다!
귄터 가우스(Günter Gaus)는 1974년에서 1981년 초까지 "독일민주공화국 소재 독일연방정부의 대표부 대표"(동베르린)직을 역임했다. 임기 말기에 함부르크 주간지 DIE ZEIT와 한 긴 인터뷰 내용 중 발췌한 내용이다:
p. 37 가우스: (동독)이 동블록의 서쪽 경계에 있는 부분입니까 아니면 독일 땅입니까? 라는 이 질문에 대해 답을 드리지요. 동독은 사실 두 가지 다 입니다. 다시 말해 (이 사실을 우리는 종종 잊곤 하는데) 동독은 독일 국가입니다. 동독은 어떤 면에서는 제가 봤을 때 서독보다 더 "독일스러운" 부분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차이트: 좀 더 구체적으로 설명 해 주실 수 있을까요? 가우스: 네 가지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첫 번째로는 제가 봤을 때 산업화의 속도가 느리다는 것은 분명 좋은 점도 있습니다. 물론 지난 세기 독일 역사에서 버려야 할 것들도 더 오래 잔존한다는 단점도 있습니다(특히 원한 형태로 잔존하는 문제점 때문에 다른 민족들과의 관계에 있어서 문제가 되기도 한다). 그러나 어째거나 동독의 경우 전통이 외부의 요소들과 덜 섞이고 덜 희석되었습니다. 두 전째로는 역사에 대한 관심이 더 크다는 점입니다. 물론 큰 틀에 맞는 역사를 취사선택하는 현상은 동독에서도 발견됩니다. 그러나 이러한 현상은 어디에서나 발견되는 현상입니다. 우리도 그렇지 않습니까? 우리도 우리가 원하는 부분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 그러나 동독에서는 역사에 대해 우리보다 훨씬 더 의식적인 관심을 보이고 있습니다. 그래서 서독에서 보다 특정 인물이나 시기들이 더 잘 알려져 있습니다. 차이트: 우리보다 동독이 더 "독일스러운" 또 다른 이유는 무엇입니까? 가우스: 세 번째로 (이 점도 문화적 유산의 수용, 역사에 대한 관심과 관련이 있는데) 아무런 거리낌 없이 VOlkskunde, Volkslieder를 배운다는 점입니다. 동독에서는 이러한 부분에 상당히 많은 열정을 쏟고 있습니다. 반면 서독에서는 저와 같은 50년대 생들부터 미국 문화를 수용하고 나치들이 가르쳐 준 독일의 Volkslieder에 대해서는 거부감을 갖기 시작했습니다. 네 번째는 동독 주민들이 주어진 상황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거나 주어지 상황에 적응하도록 강요 받기 때문에, 자신이 살고 있는 고장과 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차이트: 네 가지 특징에 대한 설명을 듣고 나니 다음과 같은 질문을 드리고 싶습니다. 동독은 과연 더 "독일스러운" 것일까요? 아니면 단지 덜 현대적인 것일까요? 가우스: 이 주제에 대해서는 여기에서 이야기를 마쳐야 할 것 같습니다. 안 그러면 제가 실수를 할 것 같네요. 6년 반 동안 하지 않았던 실수를 이제 와서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이야기를 계속하다 보면 제가 잠시 방문한 국가에 대한 상황에 대해서 공개적으로 평가를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전 그런 적이 전혀 없었는데 이제 와서 그런 실수를 저지르고 싶지는 않습니다. 귄터 가우스(Günter Gaus): Texte zur deutschen Frage. Darmstadt 1981, p. 47-49
M7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통제를 받는 국가와 국민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정치국이 모든 중요한 결정을 내렸다. 국가보안부는 8만6천명의 정규 직원들 둔 기구였다. 그 밖에도 50만 명 이상이 국가보안부의 첩자로 활동하였다. 다시 말해 동독 주민 30명 중 하나는 첩자였다. 국가보안부는 약 6백만 명의 동독주민에 관한 보고서를 작성하였다.
SED 사회주의통일당
Politbüro 정치국
Staatssicherheitsdienst ("Stasi") 국가보안부 ("슈타지")
"Neues Deutschland" "신독일"
Nachrichtenagentur ADN ADN 통신
Medien 매체
Bildungswesen 교육 분약
Hochschule 대학교
Oberschule 상급 학교
Kindergarten 유치원
Lernen 학습
Zentralverwaltungswirtschaft 중앙계획경제
Industrie 산업
Handwerk 수공업
Landwirtschaft 농업
Arbeit 노동
Planerfüllung 계획 달성
Gesellschaft 사회
Nationale Front: 민족전선
Parteien 정당
Massenorganisationen 대중기관들
Kontrolle 통제
Mitglied 회원
Staat: 국가
Staatsrat 국가평의회
Ministerrat 각료회의
Volkskammer 인민의회
Nationaler Verteidigungsrat 국방평의회
Justiz 사법기관
Gesetze Verordnung 법 규정
Wahl 선거
Urteile 판결
Bürger 시민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사회주의통일당(SED)이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기술하라. (M7)
(2) 사회주의통일당(SED)이 국가와 사회에 미치는 영향이 개인에게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가? (VT, M2a-c, M3-M5)
(3) 국가와 사회에 대한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영향력이 효과가 있었는지 여부를 논하라. (VT, ㅡ1, M2a-c, M5)
(4) 귄터 가우스(Günter Gaus)가 언급한 네 가지 특징에 대해 토론하라. (M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