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인종과 국가 간 갈등 -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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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 공사주의 파르티잔(Partisan) 대표였던 티토(Tito)는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설립을 선언한다.
1991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의 독립선언에 반대해 유고슬라비아 군대가 개입한다. 내전이 일어난다.
1998 세르비아가 코소보를 공격하고 코소보 주민들은 대대적인 피난 길에 오른다.
1999 NATO가 세르비아에 맞서 코소보에서 일어난 알바니아와 세르비아 민족 간 갈등에 개입한다.
M1 코소보 지역 출신의 피난민들, 1999년
동서갈등의 종식은 동블록 국가들고 유럽연합에 가입해 유럽의 통합과정에 큰 진전을 가능케 했고, 평화로운 공존을 실현시켜주었다. 그러나 동시에 동블록과 소비에트연방의 해체는 후신국가들의 경쟁과 그 동안 극복된 듯 보였던 국가주의적 갈등이 새롭게 대두되었다. 특히 유고슬라비아에서 그랬다.
"다양한 민족의 혼재" 1치 세계대전 종식 이후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이 해체되면서 탄생한 국가인 유고슬라비아는 세르비아(코소보와 보이보디나 지역을 포함), 몬테네그로,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마케도니아를 포괄하는 국가였다. 이들 국가에는 발칸민족들이 뒤섞어 살고 있었고, 민족은 국가나 영토로 전혀 구분이 되지 않는 상태였다. 19세기 서유럽과 중부유럽에서 대두되기 시작한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개념은 이미 과거 오스만 제국 점령 당시 독립운동 과정에서도 이미 큰 호응을 얻은 바 이었다. 세르비아인들은 자신들이 민족구성이나 영토 면에서 대세르비아제국을 구성하는 중심이라고 보았고, 크로아티인들은 자신들이 세르비아-정교회와 이슬람의 확산을 막아주는 로마-카톨릭 보호장벽 역할을 한다고 보았다. 그러니 이러한 민족 간 갈등은 일어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불타오르는 갈등 단일민족국가에 대한 열망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유고슬라비아가 (특히 독일과 이탈리아 군에 의해 점령되어) 동맹국가들인 독일, 이탈리아, 헝가리, 불가리아에 의해 여러 부분으로 분리되면서도 커졌다. 크로아티아는 1941년 파시즘적인 우스타샤(Ustascha)-정권 하에서 독립국가로서의 위상을 차지하는 듯했으나, 그 결과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들은 박해를 받기 시작했다. 점령세력과 크로아티아의 우스타샤-정권에 반대하여 얼마 지나지 않아 다양한 저항단체들이 결성되었지만, 이들 단체들끼리도 갈등이 있었다. 점령세력을 물리치기 위한 민족 내 전쟁의 결과 약 1백만 명의 목숨이 희생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르티잔단체들은 소브에트연방의 도움 없이도 점령군으로부터 벗어나는 데 성공함으로써, 소비에트연방의 점령을 방지할 수 있었다.
p. 73 2차 세계대전 이후 공산주의 파르티쟌의 대표 티토가 1945년 자체적인 방식으로 사회주의를 실현하고 소비에튼연방과의 단절을 과감하게 감수한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의 설립을 선언하였다. 사회주의국가로서 단행한 이 "특수한 선택" 때문에 소비에트 연방은 티토를 압박하였지만, 그 덕분에 티토는 계속 존재하던 민족적 갈등을 완전히 해결하지는 못해도 통제할 수는 있었다. 소비에트연방의 몰락으로 소비에트연방으로부터의 압박이 사라지자 결국 오래된 분쟁의 씨앗이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내전… 티토가 1980년 사망한 지 5년이 지나자 유고슬라비아에서는 자치권을 원한다는 최초의 뚜렷한 움직임들이 눈에 띄기 시작했다. 특히 경제적으로 좀 더 우세한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는 다원주의 민주주의와 시장경제체제로의 전환을 위한 개혁에 대한 목소리가 커졌다. 슬로베니아와 크로아티아에서는 자체 헌법이 제정되고, 자유선거가 실시된 이후 1991년 독립이 선언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보스니아와 헤르체고비나도 독립하고 결국 마케도니아도 독립하였다. 유고슬라비아연방의 해체가 시작되자 연방의 중심국가였던 세르비아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Slobodan Milosevic) 대통령이 연방군과 자원병들을 투입하였다. 먼저 슬로베니아에 투입한 후 크로아티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 차례로 투입하였다. 유혈 내전이 시작되었고 결국 연방의 모든 국가들로 번져나갔다. 세르비아는 그 덕분에 차지하고 있던 영토를 확대할 수 수 있었다.
… 그리고 "민족 청소" 전쟁은 영토를 둘러 싼 권력 싸움에 민족적, 종교적 갈등이 더해지면서 점점 더 심각해졌다. "민족 청소"라는 명분 하에 수 백 만 명의 사람들이 도시와 농촌에서 추방을 당했다. 이슬람교도들, 크로아티인과 세르비아인들이 크라이나, 슬로베니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를 떠나야 했고, 알바니아인들은 코소보를, 헝가리인들은 보이보디나를 떠나야 했다. 고문과 사형은 매일 같이 이어졌고, 수 백 개의 마을은 불에 타 폐허가 되거나 약탈을 당했다. 무엇보다 주민의 90% 이상이 이슬람교 알바니아인들인 코소보에서 자행한 세르비아의 일들에 대해 NATO가 개입하였다. NATO는 1999년 유럽과 미국에서 상당히 논란이 되었던 조치를 취했는데, 세르비아 전역을 폭격함으로써 코소보를 점령하였던 것이다. "파란-군모"라는 별칭을 가진 코소보 평화유지군(KFOR)이 결성되어 코소보의 평화유지를 위해 활동하였지만 계속해서 일어난 인권침해가 일어나는 것을 막지는 못했다. 2008년 코소보는 독립을 선언했다. 이는 UN 회원국 대부분이 수용하였지만, 러시아가 지원하고 있는 세르비아는 인정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코소보 문제가 어떻게 계속될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M2 유고슬라비아의 내전
수 십 년 동안 평화롭게 공존하던 사람들이 내전이 일어나자 서로 적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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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3 "… 제노사이드에 희생되다"? 세르비아 문제에 관한 2차 세르비아 지식인 회의 결과 (1994년): 유고슬라비아 사회주의 연방공화국으로부터 슬로베니아, 크로아티아, 마케도니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가 독립한 이후 세르비아 문제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게 되었다. 세르비아인들은 신생국가들에 흩어졌고 또 다시 힘 없이 제노사이드(대량학살)에 노출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안 가정들을 근절시키고, 세르비아인 소유의 집과 재산을 파괴하고, 세르비아인들의 묘지와 교회를 파괴하는 것은 세르비아에 대한 공격의 몇몇 예일뿐이었다. 이러한 형태의 공격은 새롭지도 않은 일이고, 예상 밖의 일도 아니었다. 오랜 적이 새로운 몇몇 적의 도움을 받아 세르비아 민족을 분열시키고 결국에는 말살시켜는 이러한 시도는 같은 세기 안에 세 번째(1914-1918, 1941-1945, 1991년 이래)였다. UN과 EU 등의 기구로 대표되는 국제사회는 세르비아 민족의 자치권 행사를 받아들여주지 않았다. (…) 세르비아인들은 정쟁을 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 세르비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자신만의 국가를 건설할 수 있도록 해준 다른 민족에게 인정해준 것과 같은 권리와 원칙을 세르비아인들에게도 보장해주어야 할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세르비아도 세르비아인들로 구성 된 현대적인 민주주의 법치국가를 건설할 수 있어야 한다고 요구한다. (…) 세르비아 민족의 국가 건설 이외의 대안은 없다. Rezolucija Drugog kongresa srpskih intellektualaca o sprskom pitanju danas (세르비아 문제에 관한 2차 세르비아 지식인 회의 결과), in: Republika Nr. 91, 1.-15. Mai 1994, p. 40. 독일어 자료: Osteuropa 11/1994, p. 646-647 출처: Karl-Heinz Gräfe, Der Balkan - Pulverfass Europas?, Tempora, Quellen zur Geschichte und Politik, Verlag Klett p. 67
M5 코소보에서 자행된 "인종 청소"
1990년대 초 코소보의 상황에 대해서 위협받고 있는 민족들을 위한 단체의 동유럽담당관 펠리시타스 로더(Felicitas Rohder)의 보고:
M4 유고슬라비아의 해체 1991-199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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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6 NATO의 코소보 공급, 1999년
"거룩한 세르비아 땅" 암젤펠트(코소보 폴예)에 사는 알바니아인들에게는 예외적인 상태가 몇 년 째 일상이 되었다. (…) 벨그라드 정권은 공식 전쟁이 아니라도, "순수한 민족으로 구성된 대세르비아"를 만들기 위한 조치들을 취한다. (…) 10만명의 알바니아인들은 지난 20년 동안 일자리를 잃었다. 그들 모두 가족이 있는 사람들이다. 다시 말해 알바니아인들의 해고로 50만 명에 달하는 코소보 주민들이 피해를 입었다. 25만에서 40만 명의 알바니아인들은 고향인 코소보를 떠났다. 경찰의 공격, 학대, 공개재판, 집안 수색, 길거리에서 당한 강도와 살인으로 인해 공포에 질려, 그리고 해고와 주거지의 강압적 몰수나 임대계약의 갑작스러운 해지로 생존의 기반을 상실해 떠났다. (…) 학교교육에서도 세르비아화가 실시되었고 알바니아 전통은 공적 부분에서 모조리 제거되면서 자라나는 세대는 완전히 새롭게 교육받고 자라도록 하고 코소보에 살았던 알바니아인들에 대한 기억이 서서히 살아지게 하려 했다. 알바니아 모국어, 역사 그리고 뿌리에 대해 배울 수 있는 곳이 없어졌다. (…) 1992년 여름 이후 코소보에는 세르비아인 이민자와 전쟁의 한복판인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 크로아티아로부터 점점 더 많은 피난민들이 정착하게 되었다. (…) 5천개의 주택이 신설될 예정이지만, 오로지 세르비아인과 몬테네그로인들에게만 제공될 주택이다. Luchterhand Flugschrift 5: "Ethnische Säuberung" - Völkermord für "Großserbien". Eine Dokumentation der Gesellschaft für bedrohte Völker. 발행: Tilman Zürich, Hamburg/ Zürich 1993, p. 157-158 출처: Karl-Heinz Gräfe, Der Balkan - Pulverfass Europas?, Tempora, Qeullen zur Geschichte und Politik, Verlag Klett, p. 68
M7 코소보 1999: 정당한 전쟁?
7a "탱크와 동맹군 vs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
미국 클린턴 대통령은 세르비아인들을 대상으로 세르비아에 NATO군이 공급할 것이라고 알리는 한 방송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1993년 3월):
그(세르비아 밀로세비치(MIlosevic, d. Verf.) 대통령)은 보스니아와 크로아티를 아무런 이유 없이 공격했고 대대적인 유혈사태가 발생 한 이후에야 공격이 중단되었다. 그는 또한 코소보에 사는 알바니아인들을 상대로 잔인한 만행을 시작했다. 이는 코소보에 있는 무장단체를 대상로 한 전쟁이 아니라, 탱크와 동맹군이 무장도 하지 않은 민간인을 공격하는 폭력사태다. 코소보에 사는 주민 10명 중 하나는 추방을 당한 상태다. (…) 이 순간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자기 아들들에게도 그들이 반대하고 막아보려고 하느 무의미한 싸움을 싸우라고 강요한다.
Frankfurter Allgemeine Zeitgung, 1995년 3월 27일 p. 4
7b "죽은 자 중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가?" 헝가리의 작가 기오르규 콘라드(Gyorgy Konrad)는 이에 대해 1999년 다음과 같이 썼다. "NATO의 개입은 살인을 멈추겠다는 의도였지만, 결국에는 더 많은 살인을 조장했다. NATO 폭탄 투하로 피난길에 오른 수 많은 알바니아인들의 생명을 앗아가자, 많은 우려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그러나 세르비아 민간인의 사망에 대해서는 모두가 침묵하거나 죽은 이들을 욕보이는 이야기만 들렸다. 죽은 자 중 누가 착하고 누가 나쁜 것일까? (…) 폭탄은 국가와 국가 간의 전쟁을 위한 수단이지, 인간의 생명을 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다. Frankfurter Allgemeine Zeitgung, 1995년 4월 30일 p.31
7c "그렇다면 무엇을 죽여야 했는가?" 당시 독일의 요시카 피셔(Joschka Fischer) 연방외교부장관은 1999년 7월 19일에 한 한 인터뷰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핵심적인 질문에 대해서는 고민이 되지 않았어요. 밀로세비치(Milosevic)의 국수주의적이고, 파시즘적인 정책이 펼쳐지게 해서는 안 됩니다. 그리고 필요하다면 이를 막기 위해 무기를 동원해 싸워야 합니다. (…) 우리도 군사적으로 개입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인류에 대한 범죄행위가 바로 우리 이웃국가에서 일어났고 유럽 전체가 위험에 빠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 밀로세비치(Milosevic)가 민족청소를 하던 그 3월에 우리가 개입하지 않았더라면 무엇을 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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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8 라칵(보스니아) 마을의 학살
1999년 1월 코소보-알바니아인 민간의 시체 45구가 발견되었다. 이 사진은 전세계인이 보았다.
손을 다리 사이에 끼우고 앉아서 코소보-알바니아 인들에게 정말 미안하지만, 정말 돕고싶지만, 안전보장이사회의 결의가 없어서 도와줄 수 없다고 했어야 했을까요? 우리가 사는 세상은 도대체 어떤 세상입니까? 코소보 사태에 관한 독일의 요시카 피셔(Joschka Fischer) 연방외교부장관과의 인터뷰 (발췌), "tageszeitung", 1999년 7월 19일. 출처: www.auswaertiges-amt.de/www/de/ausgabe_archive?archive_id=874 (PDF 다운로드 가능) (17.10.2004)
M9 다문화사회의 실현가능성 없는가?
19994년 이에 관한 동남부 유럽 역사학자인 준트하우젠(Sundhausen)이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사례를 들어 설명한다.
이론적으로는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가 하나의 국가가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는 이 국가가 보스니아인들로 구성되었을 때만 가능한 일이다. (…) 실질적으로는 20세기 초 그리고 세계대전 사이 시기가 끝나갈 무렵 세르비아인들과 크로아티아인들이 국가를 설립하기 시작하고 보스니아인들의 국가 설립이 어려워지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불리해졌다. 결국 남은 방법은 다문화사회로 가는 것이었다. 게다가 언어, 출신, 고향, 역사적 경험 등을 공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다문화사회 건설은 어느 정도 가능성도 있었다. 각 민족들의 국가주의자들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주민들은 지난 수십 년 동안 서로에 대한 증오를 간신히 억누르며 살았다고 주장하지만, 이는 근거 없는 주장일 뿐이다. 실질적으로 도시에서는 다문화사회가 형성되어 문제 없이 유지되었었다. 서로 다른 민족의 사람들이 나란히 이웃으로 살았을 뿐 아니라 서로 친구가 되거나 부부가 되기도 하였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민의 삼분의 이는 가까운 친인척 중에 "다른" 민족 출신의 사람을 안다고 한다.
1990년대 초 이래 국가주의자들(특히 세르비아와 크로아티아 진영의 국가주의자들)이 다문화사회를 해체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았다. (…)
이 프로세스의 폭력성은 "발칸-정서" 또는 특히나 "발칸-폭력성"이랑은 관련이 없다. 수 많은 증거들은 처음부터 계획된 폭력이었음을 보여준다.
Holm Sundhausen: "Unzeitgemäße" Identität? In: Ost-West-Informationen, Nr.1/1994, Graz 1994, p. 13
출처: Karl-Heinz Gräfe, Der Balkan - Pulverfass Europas?, Tempora, Qeullen zur Geschichte und Politik, Verlag Klett, p. 81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M3과 M4의 지도를 보면서 "자기 민족이 살고 있는 곳"에서 그 민족만의 국가를 건설한다는 것이 왜 어려운지 설명하라.
(2) M3과 M5에 나타나 있는 서로 다른 입장을 각기 뒷받침할 근거들을 찾아내라.
(3) M1과 M6-M8를 토대로 세르비아에 대한 NATO개입에 관한 찬반을 논하라.
(4) M9에 소개된 다문화사회에서 평화로운 공존의 가능성과 그 어려움들에 대해 정리하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