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과 포드 행정부
4과 포드 행정부
학습목표
- 제럴드 포드는 어떻게 대통령이 되었으며 왜 그는 리처드 닉슨을 사면했는가?
- 포드 행정부가 직면한 경제문제는 무엇이었는가?
- 포드 대통령은 그의 임기 중에 대외정책에서 어떤 조치들을 취했는가?
- 미국인들은 독립선언 200주년을 어떻게 경축했는가?
요점
대통령이 된 후 제럴드 포드는 한편으로는 국내의 경제문제와 해외의 도전들에 맞서면서 갈라진 국론을 다시 통합하려고 노력했다.
핵심용어
- 스태그플레이션
- 전쟁권한법
- 헬싱키 협정
- 200주년
학습주안점
- 과정을 찾아보기: 본 과를 학습하면서 개요를 작성하시오. 로마수자로 주요 제목을 표시하고 대문자로 소제목을, 수자로 세부사항을 표시하시오.
배경
신임 대통령 제럴드 포드는 어려운 일을 떠맡았다. 포드는 자서전에서 1974년 8월 취임할 때의 상황에 관해 아래와 같이 썼다.
“닉슨의 사임으로 절정에 이르렀던 의심과 비행의 시대는 우리 국민의 마음에 상처를 남겼다. 국민은 선출된 지도자들과 그들이 이끄는 기관에 대한 신뢰를 상실했다. 국민의 신뢰를 되찾기 전에는 어떠한 일에도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 낼 수 없음을 알았다. 1960년대의 ‘뉴 프론티어’니 ‘위대한 사회’니 하는 약속들이 이러한 국가적 환멸에 일부 책임이 있었다. 이 나라는 더 이상 무슨 약속을 필요로 하지 않았다. 그 대신 실천을 갈구했다.” - 제럴드 포드, ‘치유의 시대’
포드 대통령은 사상 최악의 스캔들로부터 나라가 다시 일어서도록 힘써야 했다. 동시에 경제문제도 심각했고 베트남전쟁으로 인한 국론분열도 치유되어야 했다.
포드가 대통령이 되다
“제리(Jerry)” 포드가 스피로 애그뉴의 사임으로 1973년 10월 부통령에 임명되었을 때 그는 워싱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정치인 중 한 사람이었다. 미시건 대학교의 축구 스타로서 그는 1932년과 33년에 전국 우승 팀에서 뛴바 있고 대학 올스타 팀에 들었다. 법학과를 졸업하고 제2차 세계대전 중 해군에 복무한 후 그는 정치에 투신했다. 1948년 하원의원에 당선된 뒤 그는 1965년 공화당 원내대표가 되기까지 경력을 쌓아 올라갔다. 그는 자만하지 않는 노력형, 자수성가형 인물이었다.
- 사진 [포드 대통령과 그의 아내 베티 포드가 함께 서있는 사진]제럴드 포드 대통령과 새 영부인, 그의 아내 베티 포드(Betty Ford)의 취임선서 후의 모습이다.
포드는 스스로를 평하여 “재정문제에는 보수, 국내문제에는 중도, 외교문제에는 국제파”라고 했다. 그는 교육에 대한 연방 지원, 빈곤 구호 계획, 대중교통 투자 등 과도한 정부지출에 반대해 왔다.
반면에 그는 국방과 법질서 확립을 위한 지출을 지지했다.
닉슨은 의회에서 그 자신에 대한 지지를 끌어 올릴 수 있는 무난한 인물로 보았다. 그가 부통령직 인준을 받을 때 의회와 국민은 주로 그의 정직성, 진실성 그리고 안정적인 성격에 기대를 걸었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그가 대통령직을 승계해야 될 경우를 가상하면서 그의 자격에 의문을 가졌다. 긴 의회 경력에도 불구하고 그는 행정가로서 또 외교문제에 있어서 문외한이었다. 포드 자신도 취임하면서 “나는 포드이지 링컨이 아니다”고 자신의 한계를 시인했다.
닉슨이 1974년 8월 사임하자 포드는 미국 역사상 최초로 국민이 직접 선출하지 않은 대통령이 되었다. 대통령직을 승계한 다른 부통령들은 대통령선거의 런닝메이트로서 선거로 선출된 사람들이었다. 공석이 된 부통령에 포드는 전 뉴욕주 지사 넬슨 록펠러(Nelson Rockefeller)를 지명했다. 이로써 대통령과 부통령이 다 같이 선출이 아니라 임명으로 그 자리에 오른 특이한 상황이 만들어졌다.
닉슨 사면
포드는 미국역사에 기록된 격동기의 끝에 대통령에 취임했다. 온 국민은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인해 실망했다. 사건의 와중에 많은 미국인들은 이 나라의 헌법이 닉슨을 이겨낼 수 있을까 의문을 가졌다. 대통령의 탄핵이 이루어지리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았다. 미국 역사상 단 한번, 1868년 앤드루 잭슨 대통령이 탄핵재판을 받았다. 포드가 대통령이 되었을 때 미국은 나라를 워터게이트의 수치로부터 구해 낼 지도자를 필요로 하고 있었다.
이러한 대중의 분위기에 응하여 포드는 “소통, 화해, 양보, 협조”를 제창했다. 미국인들은 그를 따랐다. 타임지는 “명랑하다고까지 할 수 있는, 지난 여러 해 동안 볼 수 없었던 좋은 분위기가 워싱턴에 찾아 들었다.”고 썼다.
그러나 갑자기 포드는 일부 사람들의 지지를 잃었다. 닉슨의 사임 후 한 달이 채 못 되어 그는 닉슨이 저질렀을 수 있는 “모든 범법행위”로부터 그를 사면해 주어 형사 처벌을 면하게 했다. 전국 TV에 나와 포드 대통령은 자신이 신과 양심에 묻고서 닉슨과 그의 “충실한 부인과 가족”에 대하여 올바른 조치를 결정했다고 설명했다.
“그들의 비극은 미국의 비극이며 우리 모두가 그에 관련되어 있습니다. 이 비극은 누군가 종지부를 찍지 않으면 끝없이 계속될 수 있습니다. 나는 대통령인 나만이 이것을 할 수 있다는 결론에 도달했고 내가 할 수 있는 것이라면 나는 이를 해야 합니다. 나의 양심은 이 비극의 이야기책을 단호하게 덮고 봉인할 헌법적 권한이 대통령인 내게 있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나의 양심은 단순히 국가적인 안정을 선언할 뿐만 아니라 그것을 보장할 모든 수단을 사용하는 것이 나의 의무라고 말해 주고 있습니다.” - 제럴드 포드, 1974년 9월 8일
- 사진 [닉슨의 사진을 떼고 포드의 사진을 거는 모습]역사 속의 한 장면: 베티 포드는 그녀의 남편을 “우연히 부통령이 되고 우연히 대통령이 되어 불명예스런 지도자를 대체한 사람”이라고 묘사했다.
- 결과를 예측하기: 그가 리처드 닉슨을 사면했을 때에 어떤 정치적인 위험을 감수했는가?
- 학습이해도 확인: 워터게이트 사건 당시의 대중의 분위기를 서술하시오. 포드는 이 분위기에 어떻게 대응했는가?
포드는 사면에 대해 어느 정도의 비판을 예상했지만 광범한 부정적 반응을 제대로 예측하지 못했었다. 닉슨에게 충성한 측근 여러 사람이 워터게이트 사건에서의 역할로 인해 감옥에 가게 되었다. 그런데 전 대통령 닉슨은 아무 처벌도 받지 않게 된 것이다. 일부 여론은 포드 대통령의 조치를 지지했으나 그의 관대한 행동은 큰 반발에 직면했다.
일부 논객들은 닉슨 사임시 묵계가 있었다고 주장했고 많은 사람들이 신임 대통령의 판단이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포드 대통령이 대중 앞에 연설할 때 사람들은 야유를 던졌고 이는 존슨이나 닉슨 대통령이 베트남전쟁에 대해 연설했을 때 같았다. 이러한 부정적 반응에 대처하여 그는 10월에 하원 위원회에 나와 사면 이유를 밝혔다. 워터게이트 사건과 사면에 다 같이 분개한 국민들은 1974년 중간선거에 상당수의 공화당 의원들을 낙선시켰다.
경제문제
워터게이트 사건에 쏠려 있는 동안 국민은 다른 문제에 대하여 덜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한 가운데 국가적 상황이 일부 악화되고 있었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새 정부는 적대적인 의회를 맞아 제대로 방향을 잡지 못했다.
경제 침체
여러 달 동안 워터게이트 사건에 빠져 있느라 닉슨은 경제상황에 잘 대처하지 못했다. 1974년 인플레이션은 과거보다 심한 11퍼센트 수준에 달했다. 1974년 1월 5퍼센트이던 실업률은 그 해 말에는 7퍼센트를 넘어섰다. 대체로 경제의 활력을 반영하는 주택 건설도 이자율이 오르면서 저조한 모습을 보였다. 투자심리가 위축되어 주가도 떨어졌다.
보통 연방정부의 정책 입안자들은 경제 확대의 결과인 인플레이션이나 경기 침체의 결과인 실업 중 한 쪽을 택하여 대책을 세운다. 대부분의 경제전문가들은 한쪽이 심화되면 다른 쪽은 호전되는 것으로 믿는다. 예를 들어 인플레이션이 어느 정도 상승하면 실업률은 내려가는 것이 통례이다. 그런데 당시 미국에서는 경기 후퇴가 계속되는 가운데 인플레이션과 실업률이 동반 상승하는 기현상이 나타났다. 경제 전문가들은 이 상황을 스태그플레이션(stagflation)이라고 불렀다.
- 심화학습: 정부
- 사면[“미국에 대한 범죄에 관하여 탄핵의 경우를 제외하고 형의 집행 정지 및 사면을 명할 수 있는” 대통령의 권한은 헌법 제2조 제2절에 의해 부여되어 있다. 사면은 법정에서 유죄판결을 받은 사람에게 부여되지만 닉슨에 대한 포드 대통령의 사면은 재판이 이루어진 적이 없이 실행되었다. 닉슨은 범죄의 혐의에 대해 유죄판결을 받은 바 없지만 그가 사면을 받았다는 것은 그가 유죄라는 것을 인정한 것으로 여겨진다.]
- 도표: 스태그플레이션, 1970-1979
[1970년에서 1979년까지 실업률과 인플레이션의 상승을 보여주는 도표]
- 도표를 해석하기: 포드 행정부는 대공황 이래 최악의 경제 침체를 겪었다.
- 정보를 분석하기: 1970년대에 소비가 물가가 어떻게 변화했는지 서술하시오. 실업률은 언제 최고조에 달했는가?
포드가 취임할 때 미국은 불경기에 접어들어 있었는데 이는 프랭클린 루스벨트 대통령이 대공황기에 백악관에 들어온 이래 처음 있는 일이었다. 포드의 대처 방식은 1930년대 초기의 허버트 후버 대통령처럼 먼저 국민의 신뢰를 회복하는 것이었다. 1974년 10월 초 그는 WIN(Whip Inflation Now) 즉 ‘인플레이션 억제’라고 불리는 경제계획을 의회에 제출했다. 대통령은 국민들에게 빨간색과 흰색 도안의 WIN 배지를 차고, 지출을 줄이며, 에너지를 절약하고, 텃밭을 가꾸어 채소 값 상승에 대처할 것을 요청했다. WIN운동은 국민이 자발적으로 생활양식을 바꿔야 하는 것인데 실질적인 유인 수단이 없었다.
이 운동은 곧 빛이 바랬다.
결국 포드는 더 직접적인 조치의 필요성을 느꼈다. 연방준비은행은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해 화폐공급을 억제했으나 불경기는 더욱 악화되었다. 정리해고가 늘어갔고 1975년 실업률은 8퍼센트를 넘어섰다. 의회는 불경기 대처 지출방안을 승인했다. 정부지출 축소라는 그의 신념을 접고 포드 대통령은 실업수당 증액과 수십억 달러에 달하는 감세조치를 단행했다. 경기는 약간 회복세를 보였으나 인플레이션과 실업은 계속 높은 수준에 머물렀다.
의회와의 갈등
그의 오랜 의회 지도자 경력에도 불구하고 포드 대통령은 빈번히 민주당이 지배하는 의회와 부딪혔다. 그는 근본적으로 정부역할의 제한을 추구하였는데 이에 반해 의회는 정부가 경제 문제에 더욱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원했다. 제럴드 F. 텔호스트(Jerald F. terHorst) 대통령 공보비서관은 포드의 다정다감한 마음씨가 그의 정부관과 어긋나는 예를 다음과 같이 소개했다:
“백악관 앞에서 옷을 제대로 입지 못한 학생아이를 보면 그는 자신의 셔츠를 벗어 입혀주었다. 그리고 집무실로 들어가서는 학교 무상급식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 제럴드 F. 텔호스트
포드 대통령은 소비자 보호처 신설과 교육, 주택, 의료보호 재정지원 법안들을 거부했고 의회는 프랭클린 피어스(Franklin Pierce) 대통령 이래 가장 많이 대통령의 거부를 무효로 하는 재 결의로 맞섰다.
대외정책
대외정책에 있어서 포드 대통령은 대체로 닉슨의 방향을 쫓아 데탕트를 추구했다. 그는 헨리 키신저를 국무장관에 유임시키고 1974년과 75년에 해외 순방에 나섰다. 그는 유럽 지도자들과 만나고 미국 대통령으로서 처음 일본을 방문했다. 포드는 또 중국을 방문하여 닉슨이 열어놓은 정치, 통상관계를 다졌다. 아프리카와 여타 지역에서 장기간의 식민통치로부터 독립한 국가들과 관계를 발전시켰다.
동남아시아
동남아시아 정책에서 포드 대통령은 닉슨이 초래한 의회와의 불화에 대한 대가를 치렀다. 1973년 의회는 닉슨의 ‘제왕적 대통령’ 행세에 반기를 들어 그의 비토를 무효로 하고 전쟁권한법을 통과시켰다. 이법은 대통령이 의회로부터 공식적인 전쟁선포 승인을 받지 않고 해외의 사태에 개입하는 것을 제한하려고 만들어졌다. 법조문은 대략 아래와 같다:
1. 해외의 전투에 병력을 파견한 경우 48시간 이내에 대통령은 그 결정에 대한 이유와 예상되는 참전기간을 의회에 고지한다.
2. 의회 승인 없이 60일을 초과하여 병력이 해외에 주둔하지 못한다.
3. 의회는 대통령에게 병력의 귀환을 요구할 수 있다.
1975년 봄, 월맹은 월남군에 대하여 새로운 공세에 나섰다. 포드 대통령은 월남이 공격을 물리칠 수 있도록 군사원조를 제공하는데 동의를 요청했으나 의회는 이를 거부했다. 대다수 미국인들은 베트남사태에 다시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고 의회는 필요하면 전쟁권한법을 발동해서라도 미국이 전쟁에 발을 들여놓는 것을 저지하고자 했다.
- 사진 [포드와 브레즈네프가 웃으며 악수하는 모습]닉슨의 데탕트 정책을 지속하면서 포드 대통령은 소련의 서기장 레오니드 브레즈네프와 다른 지도자들을 1975년 핀란드 정상회담에서 만났다.
4월말 월남 수도 사이공의 함락이 임박했다. 포드 대통령은 수천 명의 미국인과 월남인들을 철수시키는 공수작전을 승인했다.
월남 패망 이후에도 동남아시아는 미국 대외정책의 문제꺼리로 남았다. 1975년 5월 크메르 루즈 공산 캄보디아 군인들이 근해를 항해하던 미국 상선 마야구에즈(Mayaguez)호를 나포했다. 미국의 항의가 무시되자 포드 대통령은 배를 되찾기 위해 해병대를 보냈다. 선원들은 구조되었으나 41명의 미국인이 사망하는 큰 희생을 치렀다. 후에 조사가 진행되어 캄보디아측이 배와 선원을 돌려보낼 준비를 하고 있었음이 밝혀졌다. 정부로서는 그러나 이 사건이 이 지역에서의 미국의 약세를 불식하는 기회가 되었다고 보았다.
유럽과 소련
다른 영역에서 포드 대통령은 헬싱키 협정에 서명했는데 이는 1975년 핀란드 정상회의에서 체결된 일련의 유럽안전보장을 위한 협정들을 가리킨다. 미국, 캐나다, 소련 그리고 약 30개 유럽국가들이 현존 국경을 존중하면서 경제적으로 협력하고 인권신장을 위해 함께 노력하기로 약속한 것이다. 포드는 또한 핵무기 제한에 대한 희망을 가지고 소련과의 전략무기제한협정(SALT)을 계속 추진했다.
미국의 탄생일
미국인들은 독립선언서 채택 200주년이 되는 1976년 7월 4일을 기념하여 전국적으로 경축행사를 가졌다. 여름철 내내 작은 마을과 대도시에서 행진, 음악회, 에어 쇼, 정치 강연, 불꽃놀이 등이 벌어졌다. 사람들이 다들 워터게이트, 베트남전쟁 그리고 경기침체에 우울해 있던 때 이 경축행사는 국가적 분위기를 고양하는데 크게 기여했다.
7월 4일 200척이 넘는 범선들이 뉴욕 항으로 들어오는 모습을 여러 나라의 수많은 사람들이 바라보았다. 전국의 도시들에서는 이날 화려한 불꽃놀이와 긴 퍼레이드를 펼쳤다. 200주년 경축행사에서 사람들은 수년간에 걸친 침울함을 떨쳐버리고 낙관주의가 도래함을 느꼈다.
- 사진 [뉴욕 항으로 범선들이 들어서는 모습]독립선언 200주년을 경축하기 위해 범선들이 장관을 이루며 자유의 여신상을 지나 항해하고 있다.
- 추론하기: 이 배들은 이 나라의 과거 중 어떤 이미지를 상기시켜 주는가?
4과 평가
단원 이해도 평가
1. 1970년대에 스태그플레이션과 경기침체는 경제에 어떤 손실을 끼쳤는가?
2. 전쟁권한법의 목적은 무엇인가?
3. 헬싱키 협정에는 어떤 나라들이 가입했으며 합의된 내용은 무엇인가?
4. 독립선언 200주년을 맞이하며 무엇을 기념했는가?
비판적인 사고와 글쓰기
5. 결과를 예측하기: 포드가 닉슨을 사면하지 않았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겠는가?
6. 뉴스 기사를 작성하기: 1976년 7월 6일 한 지역 신문의 머리기사를 작성하시오. 최근의 사건들의 맥락 속에서 이날 가진 전국적인 경축의 의미를 서술하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