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독일 전체를 위한 "화합, 정의,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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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2월 10일 독일의 콜(Kohl) 연방총리와 겐셔(Genscher) 외교장관이 모스크바에서 소비에트연방과 협상한다. 고르바초프는 동서독의 통일에 동의한다.
3월 18일 동독에서 실시된 첫 자유선거에서 "독일을 위한 동맹(Allianz für Deutschland)"이 승리한다. 로타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 CDU-Ost)가 동독의 총리가 된다.
7월 1일 서독과 동독은 경제• 통화•사회통합을 결성하였다.
7월 14일 콜(Kohl) 총리와 겐셔(Genscher) 외교장관이 소비에트연방과 재차 협상한다. 고르바초프는 전독일이 NATO 가입하는 것에 동의하였다.
8월 23일 동독의 인민의회는 동독이 10월 3일부터 기본법의 효력범위로 편입될 것을 결정한다.
8월 31일 "통일조약"이 서독과 동독 사이에 체결되었다.
9월 12일 "독일조약"이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2+4회담에서 결정되었다. 2차 세계대전 승전국들은 독일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기로 한다. 또한 오더-나이세(Oder-Neiße)-국경이 폴란드와의 국경으로 확정되었다.
10월 3일 독일통일은 자주적으로 이루어졌다.
12월 2일 58년만에 다시 전독일을 대표하는 의회를 선출하는 자유선거가 실시되었다.
M1 1990년 10월 3일 0시00분
베를린 연방의회 의사당 건물 앞의 모습이다. 분단 40년만에 독일은 다시 통일되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45만에 독일은 완전한 주권을 회복한다. 베를린 자유의 이 올리는 가운데 독일의 국기가 휘날린다. 폭죽이 터지고 베를린 주민들과 방문객들이 독일연방공화국의 국경일로 지정될 "독일통일의 날"을 축하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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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국민을 상실한 국가
1990년 초 동독에서는 시위 때마다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 "독일, 통일 되어야 할 조국(Deutschland, einig Vaterland)!" 등의 구호가 울려 퍼졌고 개혁에 대한 요구는 점점 더 커졌다. 그 밖에도 "독일마르크(DM)가 도입되면 여기 있고, 도입되지 않으면 우리가 서독으로 가자(Kommt die DM, bleiben wir, kommt sie nicht, geh'n wir zu ihr)!"라는 구호도 울려 퍼졌다. 매달 수십 만 명의 동독 주민들이 동독 정권에 등을 돌리고 서독으로 넘어갔다. 결국 의회선출을 위한 자유선거가 3월 18일로 앞당겨 실시되었다.
동독에서 자유선거로 선출된 의회 선거전 기간이 워낙 짧아 의회선거가 정당에 따라 상당히 불리한 경우도 있었다. 녹색당을 제외한 서독의 정당들은 선거유세와 홍보자료를 이용해 동독의 파트너 정당들을 지원했다. 사회주의통일당(SED)의 후신당인 민주사회주의당(PDS)은 잘 정비된 조직과 자금이 확보된 상태였다. 반면 "신포럼(Neues Forum)" 등과 같은 시민운동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동맹 90(Bündnis 90)"은 당 조직을 정비해야만 했다. 신당들은 타자기, 복사기 등과 같은 기본적인 장비에서부터 심지어 종이도 부족한 상태였다. (동독의) 기민당(CDU)이 선거전에서 승리하였다. 기민당(CDU)은 서독 모델을 따른 사회적 시장경제체제의 실현과 독일 통일의 달성을 전면에 내세웠었다. 수 많은 평론가들은 선거전의 승리는 "마르크"의 승리이자 선거 직전에 경제통합과 독일마르크(DM)의 도입을 예고한 콜(Kohl)총리의 승리라고 말했다.
동독에 독일마르크(DM)이 도입되다 1990년 4월 12일, 동독은 수립된 지 40년만에 처음으로 자유선거를 통해 정부를 선택하였다. 동독주민들은 대부분은 동독이라는 국가를 거부하고 있었고 로타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 CDU-Ost)가 이끌게 된 새로 선출된 정부에게 무엇보다도 동서독의 통일을 위한 서독과의 협상과 최종적으로는 동독의 해체를 주요 과제로 부여하였다. 독일 통일에 있어서 중요한 첫 단계는 7월 1일부터 유효한 "경제• 통화•사회통합"의 결성이었다. 서독과 동독은 단일 경제권을 형성하게 된 것이었다. 다시 말해 동독에서도 사회적 시장경제체제의 원칙에 입각한 경제생활이 가능해진 것이었다. 동시에 독일마르크(DM)가 동독이 도입되었다. 임금, 임대료, 연금, 예금 등은 모두 1:1 비율로 환전되었다. 4천마르크 이상의 예금이나 기업 부채의 경우에만 1:2의 환전비율이 적용되었다. 동독 주민들은 당장 임금이 인상되지 않았는데, 물가가 인상되고 지출규모가 커져 어려움을 겪었다.
M2 "혁명의 깃발"
(동독 캐리커처, 1990년)
동독, 서독에 편입되다 7월 초 2차 조약을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일명 "통일조약"이라 불리는 이 조약의 초안을 만드는 과정에 각 연방주의 대표들이 참여하였다. 8월 23일 밤 동독의 의회인 이민의회는 다수의 동의로 10월 3일 동독이 "독일연방공화국의 기본법 효력영역" 즉, 서독에 편입되는 것을 결정하였다. 일주일 후 동베를린에서 이 통일조약이 정식 체결되었다. 이 조약에 따라 동독 지역에 서독의 법이 적용되었고, 목표는 몇 년 안에 전독일 지역에서 균일한 생활수준을 달성하는 것이었다.
독일과 2차 세계대전의 승전국들 동서독의 통일은 미국, 소비에트연방, 영국, 프랑스의 동의 없이는 불가능했다. 2월 콜(Kohl) 총리와 겐셔(Genscher) 외교장관이 모스크바 방문 시 소비에트연방의 동의를 얻어냈다. 고르바초프는 독일 통일에 동의하였다. 한 가지 조건이 있었다. 통일독일이 NATO에 가입하지 않아야 한다는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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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담"
7월 초 런던에서 소비에트연방 및 바르샤바 조약 기구의 기타 회원국들과의 협력에 대한 NATO회의가 개최되었었다. 독일에 대한 막대한 금액의 경제지원 때문에 고르바초프는 자신의 조건을 양보하였다. "2+4회담"(동서독의 외교장관과 4대 강국의 외교장관이 모인 자리)에서 나머지 문제점들에 대해서도 신속하게 합의가 내려졌다. 결론적으로 승전국들은 독일과 베를린에 대한 모든 권한을 포기하였고 오더-나이세(Oder-Neiße)-국경이 폴란드의 서쪽 경계로 확정되었다.
1990년 10월 2일 즉, 독일의 통일이 선언된 지 몇 시간이 지나지 않아 승전국들의 군인들이 베를린에서 철수하였고 인민의회는 자연적으로 해산되었다.
M3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2+4 합의문에 서명하는 장면
좌측에서 우측으로: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미국), 더글라스 허드(Duglas Hurd, 영국), 에두아르드 셰바르드나제(Eduard Schewardnadse, 소비에트연방), 롤랑 뒤마(Roland Dumas, 프랑스), 있었고 로타 드 메지에르(Lothar de Maizière, 동독), 한스-디트리히 겐셔(Hans-Dietreich Genscher, 서독)
M4 새 독일연방공화국의 모습
1949년 11개의 독일 주가 "독일연방공화국"을 수립하였다. 1952년에는 3개 주가 바덴뷔르템베르크주로 통합되었고, 1957년에는 10번째 연방주로 자를란트주가 추가되었다. 서베를린은 1950년 이래 특별 권한을 가진 서독영토였다. 동독의 통합으로 독일의 연방주는 16개로 늘어났다. 구 동독 지역에는 총 5개의 주가 생겼다.
2.5 인구수는 각 연방주의 인구수이며
단위는 100백만 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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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5 동독에서의 선거전
5a 동독 기민당(CDU-Ost) 본(Bonn) 소재 기민당 사무소에서 발행되고 서베를린에서 인쇄된 동독 기민당(CDU-Ost)의 선거홍보용 인쇄물의 내용이다: "독일을 위한 동맹(Allianz für Deutschland)"은 다음을 추구한다. 조국의 재건을 위해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를 도입해야 할 것이다. 사회적 시장경제체제는 서독에서 자유, 부, 사회복지를 가능케 했다. 더 이상 모험을 하거나 "제3의 길"을 가거나 무모한 도전은 하지 않겠다. 서독은 1945년 어떻게 하면 노력과 열정으로 나라를 세울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서독의 발전을 가능케 한 정당이 우리를 지원하고 있다. 서독의 기민당, 콜 총리처럼 우리도 모두를 위한 부, 조국의 통일을 달성하고자 한다. 출처: 안드레아스 그린베르크(Andreas Grünberg): Wir sind das Volk! Der Weg der DDR zur deutschen Einheit. Stuttgart 1990, p. 113
5b "동맹 90(Bündnis 90)"
"동맹 90(Bündnis 90)"의 선거전용 팜플렛
"동맹 90(Bündnis 90)"
시민을 위한 시민
신포럼(Neues Forum)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 평화와 인권 이니시어티브(Initiative Frieden und Menschenrechte)
M6 모스크바에서 보내온 긍정적 신호
6a 현상 결과 소비에트연방의 지도부와 콜(Kohl) 총리와 겐셔(Genscher) 외교장관의 협상 결과에 대해 1990년 2월 11일 베를린의 "타게스슈피겔(Tagesspiegel)"은 다음과 같이 보도하였다. 모스크바(로이타/dpa). 소비에트연방의 지도부는 독일의 콜 총리의 설명을 듣고 독일의 통일은 독일이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라고 입장을 밝혔다. 통일 시점과 방법 모두 독일이 결정할 문제라는 것이다. 고르바초프는 소비에트연방이 독일 통일을 존중할 것이라고 명시적으로 이야기했음을 콜 총리가 협상 후 모스크바에서 언론에 공개하였다. 연방정부는 서구 동맹국가들과 군사동맹에 가입하는 문제를 논의할 것이라고 밝혔다. 콜 총리는 또한 고르바초프와의 협상결과는 역사적인 결과라고 평가했다. 그는 자신과 고르바초프는 동독 주민들의 대대적인 서독 입국과 그로 인한 문제점들을 함께 걱정하였다고도 덧붙였다. 출처: Andreas Grünberg: Wir sind das Volk! Der Weg der DDR zur deutschen Einheit. Stuttgart 1990, p. 107
6b NATO 가입에 대한 동의 1990년 7월 콜(Kohl) 총리와 겐셔(Genscher) 외교장관은 새로운 회담을 위해 모스크바와 고르바초프의 고향인 카우카소스의 한 마을을 방문하였다. 2일 간의 협상 끝에 통일독일의 NATO가입을 소비에트연방이 동의했고, 이에 대해 고르바초프는 다음과 같이 밝혔다. 우리는 예를 들어 NATO 등과 관련해 긍정적 변화가 있을 것이라 예상했다. 왜냐하면 바르샤바 조약은 마지막 회의 때 독트린을 수정했기 때문이다. 이는 블록 관계를 변화시키기 위한 즉, 군사적 블록에서 정치적 블록으로의 변화를 위한 우리의 노력과 요구를 나타낸 것이었다. 우리는 마지막으로 런던에서 개최된 NATO 회의로부터 중요한 신호를 받았다. 이는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기타 유럽 국가들도 오해 없이 받아들이고, 중요한 긍정적 변화를 가져오는 신호였다. 만약 런던에서 우리에 이어 두 번째 단계로서의 노력이 이루어지지 않았더라면, 우리의 만남은 더 이상 진전이 없었을 것이다. 지난 양일 간의 협상을 다음과 같은 독일어 표현으로 마무리 할 수 있을 것 같다. '우리는 현실정치를 했다.' 출처: Chronik '90. Dortmund 1990, p. 63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1990년 동독의 상황과 당시 선거전 때 각 당의 선거공약 및 선거결과를 비교하라. (VT, M2, M5a, b) (2) 독일의 상황을 지켜보던 관찰자들은 1990년 독일통일을 위한 외교정치적 상황이 급변하는 것을 보고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급변의 원인은 무엇일까? (M3, M6a, b)