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 동독에서 일어난 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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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9년 가을 8월/9월 수 천 명의 동독주민들이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한다.
9월 10일 동독에서는 시민운동이 시작된다.
9월/10월 20만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라이프치히에서 시작된 월요시위에 참여하면서, 자유선거와 민주주의를 요구한다.
10월 18일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가 물러난다. 후임자인 에곤 크렌츠(Egon Krenz)는 대화와 개혁을 약속한다.
11월 4일 50만명 이상의 동독주민이 동베를린에서 사회주의통일당(SED)-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한다.
11월 9일 베를린장벽과 동서독 간 경계가 개방되고, 모든 동독주민에게 여행의 자유가 주어진다.
M1 1989년 11월 9일 밤, 베를린
"내 평생 가장 행복한 순간은 11월 9일이었다. 우리는 텔레비전에서 국경이 개방되는 것을 보고 프리드리히가로 나갔다. 정말 믿을 수 없는 일이었고 어머니는 말했다. '서독으로 건너갈 수 있다 해도 가지 마라! 혹시 서독에 정착할 사람만 가게 해주는 지도 모르잖니. 다시 못 돌아오게 하면 어떻게 하냐?' 사람들은 동서독 경계 수비병들에게 물어보기 시작했다. 잠시 후 한 장교가 와서 말했다. '경계가 개방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동물원으로 갔다. 한 밤중에. 우리는 전혀 피곤하지 않았다. 동물원에서 하차를 하는 순간, 정말 너무나 벅찼다. 드디어 진짜 세상에 나온 기분이었다. 동독에서 수 많은 동독자동차가 몰려왔다. 사람들은 자동차 지붕에 올라가 춤을 추고 술을 마셨다. 정말 상상도 못할 장면이었다. 우리는 새벽 5시까지 그곳에 있었다. 나는 지각하지 않고 학교에 갔다. 나는 그날의 일을 절대 잊을 수 없다."
동베를린에 사는 한 17세 청소년의 이야기, in: Vera Maria Baehr: Wir denken erst seit Gorbatschow. Protokolle von Jugendlichen aus der DDR. Recklinghausen 1990, p. 34 이하
현실이 상상을 초월하라 "우리는 동독의 보른홀머가에 삽니다. 나는 벌써 밖에 나가 서 있었고, 아버지는 강아지랑 내려오면서 외쳤어요. 다들 서쪽으로 간다! 우리도 가자!" 잠옷에 코트를 걸쳐 입은 이 남자는 1989년 11월 9일 서베를린에 나타났다. 1989년 11월 9일 밤 일어난 사건은, 몇 일 전에만 해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장벽, 철조망 등이 설치된 일명 '죽음의 띠'가 생겨난 지 28년이 지난 어느 날, 동서독 주민들은 브란덴부르크문을 통과해서 동서독을 마음대로 넘나들 수 있게 되었다. 장벽이 개방되던 날 밤 수 천 명의 사람들이 동서독 경계를 넘었고, 수 백만 명의 동독주민들은 그 주의 주말에 처음으로 서독을 방문하였다.
"우리도 나가자!" 1989년 5월 7일 지방선거의 결과는 동독에서 40년 동안 반복되었던 뻔한 결과였다. 공산당이 98.85%의 지지율을 받았다. 이 결과가 조작되었다며 일어난 시위는 간신히 제압될 수 있었다. 9월 초 헝가리는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했다. 약 2만5천 명의 동독주민들이 한 달 사이 서독으로 탈출했다. 이 길이 다시 막히게 되자, 수 천 명의 동독주민이 프라하와 바르샤바 소재 독일대사관을 점거하였다. 그들은 동독정부가 그들에게 서독으로의 여행을 허가 해줄 때까지 대사관을 점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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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2 동독으로부터의 탈출 - 서독이 목적지
프라하에 있는 서독 대사관은 4천명 이상의 탈주자의 목적지였다. 수 많은 사람들이 대사관의 높은 담장을 기어 올라갔다. 긴 협상 끝에 대사관으로 피신한 동독 주민들은 여행허가를 받았다. 이들은 동독의 특별열차를 타고 동독을 관통해 서독으로 향했다. 그들은 서독에서 환영을 받았다. 열차의 문이 열리고 동독주민들은 자유의 몸이 된다.
그들은 문이 열리지 않는 기차를 타고 동독을 관통해 서독으로 이동하였다. 동독 기차역마다 많은 사람들이 서서 "우리도 나가자!"라고 외쳤다.
저항세력이 힘을 합치다 계속되는 탈출행렬에 힘입어, 철저하게 억압되었던 저항세력들이 대중 앞에 나섰다. 교회의 보호 하에서만 비밀리에 만나던 시민운동가들은 "신포럼(Neues Forum)", "민주주의 지금(Demokratie Jetzt)", "사회민주주의당(Sozialdemokratische Partei)" 같은 단체를 결성하였다.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용기를 내 사회주의통일당(SED) 정권에 대항하여 시위에 참여하였다. "우리는 여기 남는다!" 그들은 동독을 떠나기보다 동독을 개혁하기를 원했다. 특히 라이프치히에서 일어난 월요시위는 매주 점점 더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에리히 호네커(Erich Honecker)의 퇴진 10월 7일 동독을 설립 40주년을 맞았다. 이날을 기념하여 동독의 대표이자 서기장이었던 에리히 호네커는 사회주의 국가들의 원수를 초청하였고 그 자리에서 사회주의통일당(SED)의 권력이 얼마나 안정적인지 입증하려 했다. 그는 개혁이 필요성을 주창하고 더 이상 군사적 개입을 통해 정권 유지를 돕지 않겠다고 한 미하일 고르바초프의 경고를 무시하였다. 그리고 시위와 저항운동을 폭력적으로 억압하였다. 시위대에 대한 무자비한 대응을 보고 일부 간부들의 생각이 바뀌었다. 에리히 호네커는 월요시위 역시 폭력적으로 진압하겠다고 했지만 이는 실천되지 않았다. 호네커는 10월 18일 자신이 이끌던 당의 압력에 의해 물러나야 했다.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새 서기장이 된 에곤 크렌츠(Egon Krenz)는 정치적 "변혁"을 약속하고 당의 위상을 사람들의 지지를 회복함으로써 되찾고자 하였다. 그러나 점점 더 많은 주민들은 민주주의와 자유를 요구하였다. 결국 첨예화된 긴장을 해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으로써 11월 9일 동서독 경계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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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또는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
오래도록 바라던 여행의 자유가 허용되자, 위기가 닥쳤다. 동독 주민들은 서독과 자신들의 생활을 직접적으로 비교하게 되었고 동독의 경제와 환경이 얼마나 낙후되고 파괴되었는지를 알게 되었다. 시위는 계속되었고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독재에 대항하면서 외치던 구호 "우리가 국민이다(Wir sind das Volk)!" 대신에, "우리는 한 민족이다(Wir sind ein Volk)"라는 구호가 울려 퍼졌다. 분단된 독일의 통일을 요구하는 주민들의 목소리였다. 그것이 현실을 최대한 빨리 개선할 수 있는 방법으로 여겨졌던 것이다. 정부는 이러한 동독 주민들의 요구를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동독의 신임 총리인 한스 모드로우(Hans Modrow)(SED)가 서로 독립된 두 국가의 연맹 체제를 논하던 사이, 서독의 헬무트 콜(Helmut Kohl) 총리는 하나의 연방국가 체제를 구상하고 있었다. 어떤 방식이든 모두가 통일은 몇 년이 더 걸릴 거라 예상했었다.
사회주의통일당(SED)의 종말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불법행위에 대한 새로운 발견들이 계속해 공개되자 12월 1일 에곤 크렌츠 서기장 역시 물러나야만 했다. 당시까지 동독을 지배했던 독재당은 헌법을 통해 보장되던 지배권을 포기하고 완전히 해산되기 직전 "민주사회주의당(PDS)"라는 새 이름을 채택하였다.
교회의 역할 동독에서는 이미 오래 전부터 개신교 교회들이 사회주의통일당(SED)의 독재에 대해 불만을 가졌던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장소였다. 성경에 근거한 "검 대신 쟁기"라는 구호 하에 1980년 무장해제와 학교에서의 군사교육 반대를 요구하기 위한 평화운동이 시작되었다. 예배, 기도회, 교회절기 등은 교회의 보호 하에 뜻을 같이 하는 사람들이 모여 토론하고 시위를 준비하기에 좋은 기회를 제공해주었다. 예를 들어 라이프치히의 니콜라이-교회에서 매주 월요일 열린 기도회가 훗날 큰 영향력을 행사한 월요시위를 탄생시켰다. 저항세력의 가장 대표적인 사람들은 주로 목사들이었다. 동독에서 일어난 혁명이 평화롭게 진행될 수 있었던 것도 바로 이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M3 평화롭지만 매우 효과적
교회 앞에서 진행된 침묵시위, 촛불시위 등의 비폭력적인 방법에 점점 더 많은 주민들이 동참하여 폭력적으로 대응하는 경찰과 군에 대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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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측 그림: Westen 서(독)
M4 동독에서 서독으로의 이동
그래프와 캐리커처를 설명하라.
M5 1989년 9월 10일 "신포럼(Neues Forum)"의 창립선언
(최초의 전국적인) 이 야권단체의 창립회원들 중에는 화가인 베르벨 볼레이(Bärbel Bohley)와 의사 옌스 라이히(Jens Reich)도 있었다.
우리 나라에는 국가와 사회의 소통이 단절되어 있다. 우리는 상품공급이 확대되고 생필품 공급이 더 잘 이루어지기를 바라지면, 그것이 발생할 사회적, 경제적 비용도 생각해보게 되며 무절제한 성장에 반대한다. 우리는 경제활동을 위한 자유공간을 원하지만, 치열한 경쟁사회가 되는 것을 원하지는 않는다. 우리는 기존의 것을 지키면서 새로운 것을 받아들임으로써, 더 절약하며 덜 환경파괴적으로 살아가고자 한다. 폭력으로부터 보호받는 삶을 원하지만, 그렇다고 국가의 감시와 횡포 속 삶을 원하지는 않는다. 게으름뱅이와 입만 살아 있는 사람들은 그들이 차지하고 있던 편한 직장에서 물러나야 하면, 사회적 약자와 보호대상자들이 차별을 받지 않도록 해야 한다. 사회의 모든 모순을 밝혀내고, 각 사회구성원의 의견과 필요를 들어주고 고려하기 위해서는 법치국가, 경제, 문화의 과제에 대한 민주주의적 대화가 가능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사회를 변화시키고자 하는 동독의 모든 주민들에게 신포럼(Neues Forum)에 가입할 것을 촉구하는 바이다. 때가 되었다!
출처: 카를스 쉬데코프(Charles Schüddekopf) 발행: Wir sind das Volk. Reinbek 1990, p. 29
M6 1989년 10월 9일 대화와 비폭력을 요구하다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 월요시위가 시작되기 직전 비폭력 시위가 선언된다. 지휘자인 쿠르트 마주르(Kurt Masur), 연예인 베른츠-루츠 랑게(Bernd-Lutz Lange), 신학자인 페터 침머만(Peter Zimmermann) 그리고 사회주의통일당(SED) 지역대표 뵈츨(Wötzel), 마이어(Meyer), 폼머트(Pommert)가 이 성명서에 서명을 했다. 이 성명이 시위 중에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않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성명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우리는 같은 걱정과 책임감 때문에 이 자리에 모였다. 우리의 삶은 이 시에서 일어나는 변화에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 우리는 이 땅에서 사회주의의 유지에 관하여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 할 수 있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앞서 언급한 사람들은 이 대화의 장이 라이프치히에서 그치지 않고 정부와의 대화로 발전할 수 있도록 모든 시민들에게 그들이 힘과 권리를 모아주기를 요청하는 바이다. 여러분, 평화로운 대화가 가능하도록 여러분의 마음을 모아주십시오.
출처: Andreas Grünberg: Wir sind das Volk! Der Weg der DDR zur deutschen Einheit. Stuttgart 1990, p. 36
M7 11월 9/10일 밤
18시 58분: 기자회견
동독의 한 방송사에서 생방송으로 방영된 한 기자회견에서 정치국 소속의 귄터 샤보브스키(Günter Schabowski)가 동독 각료회의의 결정사항을 발표하였다. 이 소식은 몇 분 후 AND 통신을 통해서도 보도되었고 곧 전세계로 퍼져나갔다:
아무런 조건 없이(여행목적, 친인척 관계 제시 없이) 해외로 여행신청이 가능해졌다. 여권 및 허가를 담당하는 인민경찰청 내 부서에서는 출국을 위한 비자를 즉각 발부하게 된다. 동독 주민들은 모든 동독의 국경통과 지점을 통해 항시 서독 및 서베를린으로 이동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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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시00분: 소문이 퍼지다
동베를린에서는 보도된 내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실감하는 사람이 없는 듯했다. 서베를린으로의 국경통과 지점에는 그 이전이나 다를 바 없이 한산했다. 그러나 점차 보른홀머(Bornholmer)가에 있는 통과 지점이 열렸다는 소문이 퍼지기 시작했다.
21시00분: 검문소로 인파가 몰리다
갑자기 상황이 바뀌었다. 수 많은 사람들이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인발리덴(Invaliden)가, 존넨알레(Sonnenallee), 보른홀머(Bornholmer)가 통과 지점 앞에 줄을 서서 서독으로 가려고 기다렸다. 여행을 위한 서류를 갖춘 사람들은 통과절차를 마쳤다.
22시00분: 자동차경주를 하듯 국경으로 차가 몰리다
마치 자동차경주를 하듯 수천 대의 동독 트라비 및 바르트부르크 차량이 국경을 향해 달렸다. 경쟁은 점점 더 커졌다. 수 많은 동베를린 주민들은 철망 사이로 국경수비원을 향해 여권을 내밀고 출국 도장을 찍으라고 외친다. 통과절차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23시14분: 차단기가 열리다
국경수비대는 몰려오는 인파를 더 이상 막을 수 없었다. 한 간부가 차단기를 열라는 명령을 내렸다. 수 천명이 서베를린으로 향했다. 각 통과 지점마다 감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었다. 낯선 사람들끼리 얼싸안고 눈물을 흘렸다. 서베를린 사람들은 도로변에 서서 환호했고 동독 차량들은 그 사이를 달렸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일이 실감나지 않았다. 여기저기에서 '믿을 수 없어.' '내가 살아 생전 이런 날을 겪게 되다니.' 또는 베를린 사투리로 '이게 꿈이야 생시야!'하는 소리가 들렸다. 브란덴부르크문 양쪽에는 수천 명의 사람이 모여들었다. 국경수비대와 경찰의 방해 없이 사람들은 차단장치를 제거하고 장벽 위로 기어올랐다. 수 많은 사람들은 어깨동무를 하며 '오늘처럼 행복한 날이여!'라는 노래를 부른다.
출처: Chronik '89. Vollständiger Jahresüberblick in Wort und Bild - Die Wende in der DDR, 1989, p. 88
M8 1989년 11월 9일 밤 기쁨과 의아함
서베를린 주민들이 두 명의 국경수비원을 환영하는 모습이다.
M9 1989년 11월 9/10일 본(Bonn)
의외의 결과에 대한 의외의 반응:
안네마리 겡커(Annemarie Renger, SPD) 연방하원 부의장은 베를린에서 일어난 사태로 연방하원 회의를 일찍 종료하였다. 회의가 끝나자 몇몇 의원들은 국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몇몇을 제외한 대부분의 의원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국가를 불렀다. "화합, 정의, 자유…". 국가를 부르는 행위는 정해진 식순에 따라 이루어지곤 했는데, 장벽이 무너지자 정치적 성향에 관계 없이 모두 기쁨에 일어나 모두 국가를 불렀다. 의원들은 무엇보다 베를린 장벽이 설치되던 당시 베를린의 시장이었던 빌리 브란트(Willy Brandt)에게 시선을 집중시켰고, 그를 껴안았다. 그는 벅찬 모습으로 의회를 떠났다.
출처: Chronik '89. Vollständiger Jahresüberblick in Wort und Bild - Die Wende in der DDR, 1989, p. 93
질문과 심화 탐구 제안
(1) 동독에서 일어난 혁명의 원인을 정리하라. (VT, M2-M4)
(2) 1989년 9월 "신포럼(Neues Forum)"이 추구한 목표를 정리하라. (M5)
(3) 동독에서 일어난 혁명이 비폭력적으로 진행될 수 있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VT, M1, M3, M6-M8)
(4) 1989년 11월 9/10일 일어난 사건에 대한 동서독 주민들의 반응을 묘사하고 평가하라. (M1, M4, M7-M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