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가:카자흐스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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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자흐스탄 공화국(Республика Казахстан)
KazakhstanNK.png
인구 17,028,612 명 〈2013.07.01기준〉
면적 약2,724,900㎢(세계 9위, 한반도의 12배)
언어 카자흐어, 러시아어(공용어)
문자 끼릴문자
정부 대통령제
통화 텡게(Tenge)
GDP 1,423억 달러(2013년 1분기 기준)
국제전화 +7
도메인 .kz




개요

정식명칭은 카자흐스탄공화국(Republic of Kazakhstan)이다. 북쪽으로 러시아연방, 동쪽으로 중국·몽골, 남쪽으로 키르기스스탄·우즈베키스탄·투르크메니스탄에 접하고, 서쪽으로는 카스피해(海)에 면한다. 약 120개 민족으로 구성된 다민족국가로 우리 한민족도 9번째로 많은 약 10만 명(0.6%)이 거주한다. 세계에서 아홉 번째로 면적이 넓지만 대부분 스텝 지역인 탓에 인구에서는 세계에서 62번째, 인구밀도에서는 215번째에 불과하다. 중앙아시아 최대의 자원대국으로 원유매장량이 세계 17위에 이른다. 행정구역은 14개주(oblys), 3개시(qalasy)로 되어 있다.

자연

중앙아시아의 초원지대에 위치한 내륙국으로 북단은 모스크바, 남단은 한반도의 북부와 대략 같은 위도이다. 국토의 대부분은 평원으로 되어 있으나, 서부는 카스피해 연안저지와 투란저지, 중앙부는 카자흐 소화산대지, 북부는 서시베리아 저지로 되어 있다. 동부와 남부 산악지대는 만년설과 빙하로 덮인 해발 5000m가 넘는 톈산, 알타이 양 산맥이 솟아 있다. 그래서 동고서저형의 지세를 이룬다. 전체 면적 중 경작 가능지가 8.28%, 농경지가 0.05%, 기타가 91.67% (2005년)이다. 호소(湖沼)로는 서쪽의 카스피해와 그 동쪽의 아랄해, 그리고 중국과의 국경에 발하슈호(湖)가 있는데 모두 염호이다. 주요 하천으로는 이르티시, 우랄, 시르다리야, 추, 일리 등이 이들 호소로 유입하며, 오비강(江) 유역의 북부 일부를 제외하면 내륙에 광대한 유역 평야을 형성한다.

기후는 대륙성으로, 덥고 건조한 여름과 비교적 따뜻한 겨울이 교차한다. 북부가 엄동인 시기에 남부의 산록분지에서는 과수원의 꽃이 피는 등 기온의 차이도 상당하다. 1월 평균기온은 북부에서 -18℃ 전후이고, 남부에서는 -6~-2℃이며, 7월 평균기온은 북부에서 20~22℃이고, 남부에서는 26~30℃에 이른다. 강수량은 특히 적어서 전국의 연평균 강수량은 250mm 내외이다. 남쪽으로 갈수록 강수량이 적어지며 사막에서는 100mm 미만이고 산악지역에서는 1,000mm에 달하는 곳도 있다. 우계는 3~4월 경이며 이 기간 중에 일년 강수량의 대부분이 내린다. 아랄·카스피해의 대평원을 투란저지라 하는데, 강수량이 적어 대부분 스텝(短草草原) 또는 반사막을 이룬다. 이에 따라 여름의 고온과 풍부한 일조량을 이용한 농업이 행해지며, 건조에 대한 관개농업이 일찍부터 보급되었다. 시베리아로 연속되는 북부는 토양이 밤색토양과 갈색토양으로 부식되었으나, 다른 대부분의 평야는 부식이 적은 회색토로서 알칼리성 토양이다. 이에따라 식물도 반사막이나 사막성의 저목류이고, 동물은 야생토끼, 마르모트 등의 설치류와 여우, 늑대, 야생당나귀, 영양 등이 서식한다.

남부에 지진이 자주 발생하며,시르다리아강 등의 과도한 관개로 아랄해가 축소되고 주변 도시가 오염되고 있다. 카스피해도 과도한 살충제 사용 등으로 오염이 심해지고 있다.

주민

카자흐스탄은 인구밀도가 낮으며 약 120개의 민족이 거주하는 다민족국가이다. 민족 구성 비율을 보면 카자흐족 53.4%, 러시아인 30%, 우크라이나인 3.7%, 우즈베크인 2.5%, 독일인 2.4%, 타타르족 1.7%, 위구르인 1.4%, 기타 4.9% (1999년) 등이다. 한민족도 9번째로 0.6%인 약 10만 명이 거주한다. 원래의 카자흐족은 북쪽 서시베리아에서 남쪽으로 우즈베키스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에 분포하는 터키계 민족이지만, 몽골계의 체질을 갖고 있어 안면의 폭이 넓고 황색의 피부와 검은 수염이 있다. 원래 유목민이었으나 최근들어 정착생활을 하게 되었다. 오늘날 공장이나 광산 등의 기술자, 전문직의 종사자도 적지 않으나 대부분은 농목업에 종사한다.

두번째로 구성 비율이 많은 러시아인의 이입은 19세기 말부터 정책적 지원에 의한 농업이민으로 시작된 뒤, 20세기에는 들어와 중앙아시아의 근대화 작업에 따라 이주가 급증하여 1980년대까지 러시아인의 인구 비율이 카자흐족 등 원주민보다 높았다. 이들의 대부분은 알마티를 비롯한 5대 도시 등의 도시지역에 거주하며 제조업의 기술자, 관리인, 기타 전문직 등의 도시적 산업에 종사하고 있다. 구소련 시절 러시아인의 계획적인 대량이주로 아직까지 러시아인의 비율이 중앙아시아에서 가장 높은 30% 내외를 나타내고 있다. 1937년 연해주 지방에 거주하던 한민족이 일본에 협력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유 때문에 이곳으로 강제 이주되어 오늘날까지 거주하며 이들은 고려인으로 불린다.

제2차 세계대전 초에는 독일인이 볼가강 연안의 독일인 자치주에서 알마티 주변으로 강제로 이주되었고, 1942년에는 바크 유전지대를 목표로 한 나치스 독일군에 의해 크림 반도를 점령당했고, 북캅카스 지방도 침략당하였다. 그후 구소련군의 역공으로 독일군이 퇴각하자, 스탈린은 독일군에 대한 협력 여부에 따라 이 지역의 크림 타타르족과 체첸인들을 카자흐스탄으로 강제 이주시켰다. 스탈린에 의해 이곳으로 강제 이주당한 민족들 중 저항한 자는 용서없이 처형되었고, 갑작스런 이주 때문에 장시간의 화물 열차에 태워진 사람들 중 많은 수가 질병, 과로, 허기로 희생되었으며, 정착 과정에서도 음료수의 수질 불량과 영양실조, 과로로 유아와 노인의 사망이 늘었다.

구소련의 붕괴로 각 민족은 명예회복을 하였으나, 한국인·타타르족·체첸인 등은 강제 이주지에서 고향으로 복귀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특히 이곳 한국인 수는 약 10만 명으로, 우쉬토베 부근 지역에 정착하여 벼농사에 성공하였고, 근면함, 자녀교육, 탁월한 재능으로 성공한 사람이 많아서 오늘날 도시의 지식인·관리자로 활약하는 사람이 많다. 아직도 동성불혼, 결혼 후에 여자의 성을 바꾸지 않는 등 전통을 유지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원주민의 인구증가율이 높은 데 비하여 러시아인을 비롯한 유럽계 백인의 출생률이 낮아지고 정치적 불안 등의 이유로 다른 지역으로 이주해감에 따라 카자흐족의 비율이 높아졌다. 카자흐스탄의 인구성장률은 0.352%로 (2007년) 아주 낮으며 인구 1000명당 출생률은 16.23명, 사망률은 9.4명, 유아사망률은 27.41명(2007년)이다. 기대수명은67.22세로 낮은 편이다.

언어는 독립 후 민족주의적 분위기에서 민족 언어의 복권정책의 추진으로, 터키어(語)의 방언인 카자흐어를 제1의 공용어(정체인구의 64.4% 사용)로 정하였다. 그러나 카자흐족 이외에는 카자흐어의 해독률이 낮고, 러시아인의 비율이 중앙아시아 국가 중 제일 높고, 우크라이나인 등을 합치면 절반 이상이 러시아어를 선호하는 경향이 있어, 실제로는 러시아어가 공통어의 역할을 하고 있다. 언어문제는 공용어나 교육에서의 문제를 복잡하게 하고 있다. 문자는 19세기 후반 아라비아자문어(文語)가 만들어졌으나, 1938년 러시아자의 정자법(正字法)으로 변하였고, 독립 후에는 터키에서 배워 라틴 문자를 사용하기로 정하였다. 그 이유는 러시아어의 사용 비율이 높고, 중앙아시아 국가 중에서 러시아인을 비롯한 슬라브인의 비율이 가장 높으며, 그 외에도 구소련 시대에 러시아어의 공통어 정책으로 보급률이 높아졌고, 서구의 근·현대문명을 보급해준 언어였기 때문에 당분간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실정이라는 판단에서였다. 문맹율은 0.5%에 불과하다.

종교는 과거 소련의 사회주의에 의해 억압되어 왔으나, 독립 후 카자흐족을 중심으로 이슬람교가 기층문화의 하나가 되어 이슬람부흥운동으로 활성화되고 있다. 종교 분포는 이슬람교 47%, 러시아정교회 44%, 기독교 2%, 기타 7% 이다

역사

카자흐스탄은 동서양을 잇는 실크로드 교역로 상에 위치하여 오랫동안 양쪽의 서로 다른 문화나 산물을 연결해주어 민족의 이동과 성쇠가 복잡하였다. 오늘날 카자흐스탄의 주요 주민인 카자흐족의 기원은 15세기로 올라간다. 몽골제국을 구성하는 4개의 한국(汗國) 중 하나인 킵차크한국이 붕괴된 후, 15세기 중기에 그 일족인 샤이바니이가(家)의 아불 하일한이 우즈베크족을 이끌고 시르다리야강을 넘어서 서투르키스탄에 침입하여, 샤이바니 왕국을 세웠다.

이 때 일부의 집단이 분리해서 카자흐스탄(키르기스초원)의 중부와 남동부의 세미레체 지방에서 독립하여 카자흐족이라 불리게 되었다. 카자흐는 터키어로 ‘반도(叛徒)’, 즉 ‘본국에서 떨어져 나와 자유행동을 취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카자흐족 최초의 군주는 킵차크 한가(汗家)의 후예인 카심 한으로, 그 영역은 서쪽의 우랄산맥과 카스피해 북서해안에서, 동쪽으로 발하슈호(湖)에 이르렀다. 그러나 카심 한의 왕족이나 귀족이 카자흐스탄의 각지에 할거(割據)하면서 17세기 중반에 카자흐족 사회는 3개의 오르다(지역집단), 즉 대오르다(발하슈호 주변에서 시르다리야강 유역), 중오르다(키르기스초원 중부), 소오르다(아랄해 북부의 초원)로 나뉘어 카자흐 전체의 한은 없어지게 되었다.

카자흐족은 유목생활을 하였으나 일부는 상공업과 농업에 종사하였고, 종교는 수니파(派)의 이슬람을 믿었으나, 기본적으로는 유목민의 관습법에 따랐다. 제정러시아는 17세기 중반에 시베리아 정복을 거의 끝내고 우랄강 유역에서 서부의 이르티시강 유역을 연결하는 서시베리아 남측에 많은 요새를 구축해서 카자흐족의 침입을 막고, 동시에 이들 요새를 중앙아시아 진출의 거점으로 삼았다. 18세기 초 동방의 중가르의 침략에 고전하던 카자흐족의 한과 왕족은 차츰 러시아의 보호를 추구하게 되어 1740년에는 소오르다 등 일부가 러시아의 속국이 되었다.

1760년 대오르다·중오르다를 지배하던 아브라이 한은 중가르와 동투르키스탄을 정복한 청조(淸朝)의 군사력을 두려워해서 청조에 조공을 바치고 외교통상관계를 맺어 한의 권력을 강화함과 더불어 톈산북로[天山北路]의 일리와 우루무치와 통상을 해서 카자흐족의 말을 중심으로 한 가축과 청조의 견직물, 면포, 차 등의 교역을 19세기 중반까지 하였다. 18세기 중반 이후 러시아는 카자흐스탄 중부와 남부에 진출하여, 정치·군사면의 지배를 강화하고 식민지화를 기도하였으며 1850년까지 카자흐의 한과 왕족의 권력을 약화시키고 러시아의 문화를 도입하고 카자흐스탄 대부분을 정복하였다. 이와 함께 러시아인, 카자크인(코사크인)도 이주하기 시작하였다.

20세기에 들어 1917년 카자흐스탄 민족주의자들이 카자흐스탄의 완전자치를 요구하면서 자치정부가 수립되고, 1920년에는 카자흐를 포함해 키르기스자치공화국으로 발족, 올렌부르그를 임시 수도로 하였다. 1925년에는 카자흐스탄자치공화국이 되고 수도를 크질오르다에 두었으나 1929년 알마티로 옮겼다. 1997년 12월에 수도를 알마티에서 아크몰라로 옮겼다. 1936년 카자흐스탄 소비에트 사회주의공화국이 되었고, 1954년 구소련의 처녀지개척운동 때에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이 카자흐에 대량으로 이주했다. 구소련의 붕괴로 1991년 12월 독립을 선언하였다.

독립 후에도 공산당이 간판만을 바꾼 채 직접선거의 대통령제를 도입하여 공산당 제1서기가 당선되는 형태로 지도부가 계속 집권하고 있다. 이는 이행기의 정치적 혼란을 막는 데 큰 의미가 있으나 과감한 변신이 이루어지지 않아 개혁이 늦어지게 된다. 구소련 붕괴 직후, 모두가 주권국가를 표명할 때 카자흐스탄은 구소련의 영향 아래 그대로 존속하였고, 중앙아시아 국가 중 독립선언이 가장 늦어졌다. 그 이유는 중앙아시아 국가 중 북부지방과 도시를 중심으로 비교적 공업화가 진행되어 다수의 기업군이 있었고, 이 기업들이 다수의 러시아인을 포함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남부의 평야지대와 남동부의 산간지역의 농촌에 거주하고 있는 대부분의 카자흐스탄인들은 급격한 경제개혁으로 인한 이익이 러시아인에게 돌아가게 되는 손실과 성급한 민족주의의 고양이 가져올 러시아인 소외와 귀국에 따른 국가경제 피해를 심각하게 우려하고, 특히 러시아연방과의 긴 국경을 갖는 지정학적 측면에서 안전을 보장받기 위하여 신중한 대(對)러시아 정책을 견지하고 있다. 최근 카자흐스탄의 정세가 안정되고 있으나 구소련 연방의 다른 국가보다 풀어야 할 민족문제가 많다. 1991년 12월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Nursultan A. Nazarbayev)가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여 적극적으로 경제개혁 등에 몰두하여 왔다. 1998년 제정된 신헌법에서 대통령 임기가 5년에서 7년으로 연장되고 1999년 1월 실시된 조기 대통령선거에서 나자르바예프가 총 투표자의 79%의 지지로 재선되었다.

카자흐스탄의 현 대통령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


정치

1995년 8월 30일 국민투표에 의하여 채택된 신헌법에 따르면 카자흐스탄은 대통령 중심의 의회민주주의 공화국이다. 국민에 의하여 직접 선출되는 임기 7년(연임 가능)의 대통령은 국가를 대표하고 수상 등 각료를 임명하며, 특정 상황에서는 의회 대신 법률의 효력 발령권 등 강력한 입법권을 행사한다. 2005년 12월 4일 누르술탄 나자르바예프가 대통령에 재선되었다.

의회는 양원제로서 임기 6년의 상원의원은 47석(7석은 대통령이 임명)으로 지역 선거에서 선출되며 하원(일명 Mazhilis)은 임기 5년의 107석으로 대부분 선출된다. 하원의 9석은 소수민족을 대표하는 카자흐스탄 인민대회에서 간접 선출된다. 상원은 대통령의 제청으로 대법원장, 대법원 판사, 최고사법위원 등의 선출, 검찰총장 임명, 대통령 탄핵소추 심의권이 있으며 하원은 입법, 예산심의권, 중앙행정부처 감독권, 대통령 탄핵소추권 등이 있다.상원의원 선거는 2005년 12월 실시되었으나 정당별 의석 분포는 알려져 있지 않으며 하원은 2007년 8월 18일 총선에서 조국당(Nur-Otan)이 98석을 획득하였다. 정당별 득표비율은 조국당 88.1%, 농업당 (NSDP) 4.6%, 아크졸당(Ak Zhol) 3.3%, 아우일당(Auyl) 1.6%, 공산인민당 1.3%, 애국당 0.8%, 무소속 0.4%이며, 7% 이상을 득표하여야만 의석 확보가 가능하다. 정당은 이념과 정책 보다는 친(親)나자르바예프, 반(反)나자르바예프로 나뉘어져 있다. 이러한 의석 분포는 군소정당의 난립을 제도적으로 방지하고 있는 정당제도와 야당 결집 세력의 결여 등에 기인한다. 사법부는 44명의 법관으로 구성된 대법원, 주법원, 지방법원, 최고사법위원회 및 7명의 재판관에 의한 헌법위원회가 있다.

카자흐스탄의 외교는 현실외교로서 경제·정치·군사의 면에서 일관되게 러시아연방과 긴밀한 제휴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독자적인 군대를 가졌으나, 장비나 군요원의 부족으로 1992년 조인된 러시아연방과 카자흐스탄 간의 우호협력상호원조 조약에 의해 러시아연방의 지원과 안전보장을 확보하고 있다. 세미팔라틴스크에는 구소련시절의 핵실험장과 기타 군사상의 실험시설을 갖고 있었으나, 핵실험금지 조약에 조인하여, 1991년 시설이 폐지되었고, 그 후에 과학실험센터로 바뀌었으며, 우주산업기지 등 특수한 군사관계시설은 당분간 공동관리 체제로 되어 있다. 그외에 인접 중앙아시아 나라들과 집단안전보장조약에 조인하여 중앙아시아 안정의 확보를 기도하고 있다.

경제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경제적 자립이 달성될 때까지 러시아연방과의 기존 경제적 상호의존 관계를 최우선으로 하는 것을 기본적인 외교방침으로 하고 있다. 그러나 러시아연방 외교의 서구 일변도에 따른 아시아 정책의 결여가 마찰에까지는 이르지 않고 있으나 현안으로 부상되고 있다. 따라서 한편으로는 러시아연방과의 관계를 유지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주변 아시아 국가들과 교류를 확대해나가려 하고 있다. 구체적인 예로서 무역진흥의 화물수송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아시아 간선철도의 구상과 그 지선이 파키스탄·이란까지 뻗어 있어 해양의 항만과 연결된 무역확대 달성이 목표로 되어 있다. 이슬람 국가와의 외교에서는 이슬람이 유일한 종교가 아니지만, 이슬람 세계 부유한 국가와의 경제적 교류에서 얻어지는 이익의 관점에서 이슬람회의에 참여하고 있다.

최근 시장경제로의 전환을 위하여 미국, EU 등과 석유, 천연가스의 안정적인 채굴 및 수출 확보에 중점을 두고 실질 경제 협력 관계가 이루어지고 있으며, 미국의 대(對)아프가니스탄 및 대(對)이라크 전쟁 지지를 계기로 군사협력이 확대되고 있다. 중국과는 원유 가스공동 개발 및 통상확대를 위하여 전략적 동반 관계로 격상되었다 .

사회

카자흐스탄은 근대적 국민국가의 경험이 짧은 다민족국가로, 다수가 카자흐인이지만 러시아인도 거의 같은 비율을 차지하여 근대적인 국민성을 획일적으로 설명하기는 어렵다. 제정러시아 시대의 중앙아시아는 문맹률이 98%였으나 학교교육을 대대적으로 확충하여 문맹율이 0.5%(1999년)으로 낮아졌다. 최근 자료에 따르면 초등학교 88개교, 중고등학교 247개교, 대학교 63개교 등이 있다. 알마티에는 카자흐국립대학(10개 주간학부, 6개 야간학부, 6개 통신교육학부), 카자흐공과대학(11개 학부와 각 기업에 몇 개의 분교) 등이 유명하다. 그 외에 농업, 의학, 교육, 광산, 수의 등의 전문학교가 있다.

또한 1946년 설립된 카자흐 과학아카데미와 우주과학연구소가 있어 여기에 소속된 연구소가 40여 개나 된다. 라디오와 텔레비전 방송은 카자흐어와 러시아어 외의 여러 국어로 방송된다. 도시인구의 비율은 55.8%(2001)로 중앙아시아 국가 중 비교적 공업이 발달해 있어 가장 높다. 주요 도시로는 알마티, 카라간다, 우스티카메노고르스크, 첼리노그라드 등이 대표적이다. 인터넷 망이 발달하여 호스트수는 33,217개 (2007년), 사용자수는 124.7만명 (2006년)에 이른다

문화

구소련이 지배하기 이전 카자흐스탄인들은 유목농경의 경제적 바탕 위에 그들만의 문화가 뚜렷했다. 17, 18세기 경 이슬람교가 유입되었으나 생활에 흡수되기까지는 아주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결과 이슬람교 초기에는 카자흐스탄의 샤머니즘, 애니미즘적 요소가 공존했다. 또한 유목민적 생활방식과 문자의 부재로 인하여 그들의 문학은 구전역사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대부분의 전설은 바티르(batir)라는 전쟁영웅에 관한 이야기로 15, 16세기의 코블란디-바티르(Koblandy-batir), 에르 사인(Er Sain), 에르 타르긴(Er Targyn) 등이 있다. 이러한 이야기는 대부분 노래 형식의 읊조림으로 행해지며 전통악기인 북이나 만돌린과 비슷한 현악기인 돔브라(dombra)와 함께 공연되기도 한다. 이후 러시아의 지배는 더 이상 카자흐스탄인들이 전통적인 유목문화를 영위할 수 없게 만들었다.

다른 구소련연방과 마찬가지로 비슷한 문화적 활동, 즉 연극, 영화, 음악, 미술 등을 하게 되었다. 이 시대에 유명한 예술가로는 소비에트의회 마지막 의장이었던 소설가 아누아르 알림즈하노프(Anuar Alimzhanov), 시인 무크타르 샤크하노프(Mukhtar Shakhanov), 올즈하스 술레이메노프(Olzhas Suleymenov) 등이 있다. 그 후 소비에트 공화국의 붕괴로 카자흐스탄의 문화는 다시 자리를 찾는듯 하였으나 고급문화에 대한 대중의 이해 자체가 사라져 미국, 중국, 터키 등의 영화나 구 소련의 TV 영화, 멕시코의 TV 드라마 등의 대중 문화만이 만연하게 되었다. 이에 카자흐스탄의 문화 엘리트들은 다른 구소련 연방국가의 문화 엘리트들과 마찬가지로 문화적 침체를 경험하게 되었다. 겨울스포츠인 스키와 스케이팅의 인기가 많다.

교통과 통신

카자흐스탄은 철도 총연장이 13,700 km(2006년)이지만 전체 국토면적에 비하여 대단히 짧다. 유럽과 러시아의 1㎢당 철도 길이가 66km에 비하여 카자흐스탄은 4.9km에 불과하며, 철도망도 주로 전 구소련과의 연결망 위주로 건설되어 있다. 내륙국인 카자흐스탄의 경제적 자립을 달성하기 위한 무역진흥의 최우선과제는 화물 수송로 확보에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동안 카자흐스탄의 무역은 모스크바를 주거래 상대로 하였기 때문에 모스크바 연결망 이외에는 주변 국가들과의 수송로가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내륙국인 까닭에 파키스탄이나 이란 등 인접 국가들의 해항(海港)을 이용하든가, 또는 그 외의 철도를 정비하여 터키나 중국(아시아·태평양 지역) 등 인접국가로의 수송로를 확보해야 하는 어려움이 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아시아 간선철도(실크로드 철도), 즉 터키의 이스탄불에서 중국의 북경까지 1만 5천 km를 연결하는 계획이 세워졌다. 우선 1차로 카자흐스탄의 알마티와 중국 신장웨이우얼자치구[新疆維吾爾自治區]의 우루무치와의 1300km를 연결하는 선로 중에서 미개통부분 460km가 건설되어, 1992년 6월에 철도 운행이 개시되었다. 이 철도의 시발점은 중국의 황해 연안 상하이[上海] 북부의 롄윈항[連雲港]이며, 중국측과 중앙아시아측의 철도 궤도의 폭이 다르기 때문에 국경역에서 대차(臺車)의 교환을 해야 하는 불편한 점은 있다. 그러나 1992년 이후 화물수송량이 100만t에서 기하습수적으로 증가하여 그 중요성이 점점 커지고 있다. 아시아 횡단철도의 최종목적은 중국연안으로의 출구를 확보하여 한국과 일본을 포함한 아시아 국가들과의 무역을 증대하는 것이다. 아시아 간선철도의 지선은 이란과 파키스탄으로 연결된다. 이것이 완성되면 이란의 반다르압바스항과 파키스탄의 카라치 등 대상항(大商港)을 이용하게 되어 화물량은 비약적으로 증대될 것이다.

국내 도로망은 총길이 90,018km 중 포장도로가 84,104km이지만 고속도로가 없고 자동차 여행시설 등이 잘 구비되어 있지 않다. 러시아 평원으로 흘러들어가는 이르티시강, 아랄해로 흘러들어가는 시르다리아강을 따라 내륙 수로 4,000 km가 잘 발달되어 있지만 전국적인 수송로로서의 역할이 크지 않다. 항공로는 주로 모스크바 공항을 통해서 외국과 연결되었으나, 독립 후 인도의 뉴델리, 이란의 테헤란, 터키의 이스탄불, 그리고 유럽의 프랑크푸르트를 주 1~2회씩 운항하여 주변 국가와의 연결을 시도하고 있으나 아직도 불편한 점이 많다.

과학기술

카자흐스탄은 1992년 전기통신 민영화 촉진법이 제정되었고, 교통통신부(MOTC)는 통신 관련 규제 업무와 지구국, 이동시스템 등에 대한 면허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카자텔레콤은 국영 통신사업자로 국내중계망, 장거리망 등의 구축, 유지, 운용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다. 알테바는 국영 시내통신 서비스 사업자로 수도 알마티에서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1998년 현재 220만 회선을 확보하고 있으며, 약 13%의 회선 보급률을 나타내고 있고, 기존의 회선과 교환기의 현대화가 추진되고 있다.

셀룰러 전화 서비스는 1998년 현재 BECET인터내셔널만이 알텔이라는 이름으로 제공하고 있고, 2006년 기준 7만 8300명의 가입자를 확보하고 있으며, 러시아 및 중앙아시아 국가등과 13개 로밍 협정을 체결하였다. 인터넷 서비스는 렐콤, 카자텔레콤 등에 의해 제공되고 있지만 시장형성이 부진하다. 전국 방송사는 리카 TV, 카자흐스탄 텔레비전이 있다. 지역방송사는 KTK, TAN TV가 있다

카자흐스탄 지도


한국과의 관계

카자흐스탄은 1992년 1월 28일에 한국·북한과 동시에 정식 외교관계를 맺었다. 카자흐스탄과 한국은 1972년 무역협정, 1995년 양국간 관계 및 협력에 관한 일반원칙 선언, 과학기술협정, 문화협정, 1996년 투자보장협정, 1997년 이중과세 방지협정, 2003년 형사사범공조조약, 범죄인도조약, 2004년 원자력협력협정 등을 체결하였다. 나자르바예프 대통령(1990, 1995, 2003), 아브디카리모프 상원의장 (2001), 마미대법원장(2004)등이 방한하였으며, 노무현 대통령(2004), 전윤철 감사원장(2005), 김원기 국회의장(2005) 등이 카자흐스탄을 방문하였다. 두 국가의 경제·통상협력은 경제의 상호보완성에 기초하여 교역량이 2003년 이후 80% 이상 증가하고, 최근에는 중국을 통한 교역량 증가에 따라 다소 보합세를 유지하고 있으나 건축자재 및 자동차 분야 등의 약진에 따라 2006년에는 교역량이 균형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상황이다. 카자흐스탄의 WTO 가입추진에 따른 경제 자유화 및 국제유가 상승, 카자흐스탄의 건설수요 증가 등으로 양국간 교역량은 지속적으로 확대될 것으로 전망된다. 2005년 기준 대카자흐스탄 수출 2억 7255만 달러, 수입 2억 4160만 달러이다.

바깥 고리


연계 정보

관계 대상 문서 설명
uses 교육과정: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 교육과정, 2014년 조사 보고
uses 교과서목록:카자흐스탄 카자흐스탄 사회과 교과서 총목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