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生, 비구니)

biguni
Ehjkkims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6일 (금) 04:58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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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봉려관(蓬廬觀)스님은 근대 제주불교 최초의 비구니로서 근대 제주불교를 중흥시켰으며 항일독립운동과 사회활동에 헌신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865 제주도 화북리에서 출생
1899 관음신앙을 처음 받아들임
1901 관음신앙 확신
1907 해남 대흥사에서 유장스님을 은사로 청봉화상을 계사로 출가수계
1908 대흥사 제주도 담당 포교사 취임. 근대제주불교역사 상 최초로 부처님 오신 날 공식행사 개최
1909 한라산 관음사 최초 창건(개산조)
1911 법정사 창건
1913 불탑사 중창
1914 법정사 항일운동 주동자 강창규, 김연일, 방동화를 법정사로 이주시킴
1918 법정사 항일운동 견인
1919 ~ 제주 한림에서 서귀포까지 백인화보살과 함께 6-7개 사찰을 창건했지만 일본경찰에 의해 바로 철거당함
1924 관음사 중창불사 낙성. 제주불교협회 발기인으로 참여. 대흥사로부터 1,000원, 범종 340근을 희사 받아 성내포교당으로 운반
1925 성내포교당 창건. 성내포교당 관세음보살상 개금불사 회향. 성내포교당에서 보살계법회 개최. 성내포교당에서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 개최. 전 제주소년소녀웅변대회 개최에 의연금 출연.
1926 제주불교소녀단, 제주불교부인회를 창립해서 신여성 양성. 관음사 산남 포교소 서귀포 법화사 중창. 관음사 동북 포교소 백련사 창건.
1927 경영난을 겪던 제주유치원을 성내포교당에서 다시 개원
1930 제주불교유치원 창설 추진
1932 대흥사 제주포교소 고산 출장소 월성사 창건. 산천단 산신제단 중창.
1933 산천단 한라산신제 복원.
1935 제주중학강습원 주요설립자로 동참해 개교함
1937 제주시 산록북로 660번지 일대 5만평을 관음사 부지로 등기완료. 고산 월성사 봉불식 거행. 제주도 관음사 일본 오사카(大阪) 출장소 대각포교당 창건.
1938 제주도 구좌읍 관음사 출장 포교소 설립
1938 음력 5월 29일 한라산 관음사에서 입적(세수 74세, 법랍 32)
문중 두옥문중(斗玉)
수행지침 전법포교, 관음정진, 항일운동, 신여성 양성, 교육사업, 기근구제 등 대사회활동.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경우·대지월·화선·대혜·목련·성해·길만·원만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재준(2)→우청(3)→두옥(斗玉, 4)→유장(宥藏, 5)→봉려관(蓬廬觀, 6)→화선(7), 대지월(7), 성혜(7)[1], 길만(7), 원만(7)

활동 및 공헌

근대제주불교 최초 비구니

봉려관(1865-1938)스님은 1865년 6월 14일(음) 제주 화북리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은 안치복이고, 모친은 신씨이며, 차녀이다. 속명은 안려관이다.
1899년 집 앞을 지나던 비구로부터 관세음보살상을 건네받으면서부터 관음신앙을 처음 접하게 되었고, 봉려관스님 삶의 큰 전환점이 되었다. 이때부터 관음기도에 열중하던 안려관을 식구들은 못마땅해 했고, 그래서 1901년 집을 나와 화북리 같은 마을에 거처를 마련해 관세음보살상을 모시고 혼자 살며 관음기도에 전념했지만, 또 동리 사람들이 몰려와 “다시는 관세음보살을 부르지 말라”며 관세음보살상을 부수고 태워버렸고, 그리하여 또 다시 쫓기어 산천단으로 거처를 옮긴다. 산천단에 거처를 두고 불상을 구하려 다니던 안려관은 비양도에 불상이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1901년 늦봄 비양도로 향했다.

목선에 의지해 비양도로 가던 중 거센 풍랑을 만나 배가 거의 전복되려 한 상황에서 안려관은 지성으로 관세음보살 기도를 하였고, 깨어나 보니 비양도 바닷가 어느 집이었다.
관세음보살의 위신력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다고 확신을 한 안려관은 비양도에서 불상을 구하지 못하고 산천단 거처로 되돌아왔고, 관음신앙에 대한 확신을 갖고 관음정진에 더더욱 매진한다.
봉려관스님의 관음신앙은 향후 제주불자의 신앙관과 수행관 형성에 결정적 역할을 한다.
6년여를 제주 향촌을 다니면서 병자를 만나면 효능이 있는 약초를 알려주었고, 더불어 관음신앙도 전파하려 했지만 관음신앙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07년 9월 비단 염불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을 구제하면 더 좋겠다는 생각에 곧 출가 의지를 내고 배를 타고 목포로 향했다. 목포에 도착해서 주변 여기저기를 돌아보던 중, 대흥사에 가면 계를 받을 수 있다는 소식을 접하게 된다.

해가 설핏할 때 대흥사에 도착한 안려관의 행색은 남루하고 머리는 헝클어져 있었으며 몰골이 거지같아 주지스님이 한 번 보고는 더는 만나주지 않았다. 승려가 되고자 대흥사에 왔다고 말했지만,
2년의 행자생활을 하지 않아 계를 줄 수 없다는 답을 듣는다. 사중스님의 도움으로 며칠간 기거하면서 산중을 돌아보게 되었는데, 이때 온 몸의 살이 곪아 썩어가는 스님을 보게 되었고, 민간요법으로 완쾌시킨다.
그러자 대흥사 스님들은 안려관을 달리 보았고, 온 산중이 이 일로 설왕설래했으며,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던 안려관에게 대중공사를 거쳐 수계하기로 결정한다.
당시 청신암에 계시던 비구니 유장을 은사로, 비구 청봉화상을 계사로 1907년 12월 8일 드디어 승려가 된다. 근대제주불교역사 상, 최초 비구니가 탄생한 역사적 순간이다.

근대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우다

1908년 1월 제주 산천단 거처로 되돌아온 승려 봉려관은 대흥사에서 모시고 온 불상을 모시고 조석으로 예불을 게을리 하지 않았으며 관음정진에 전념한다. 1908년 4월 드디어 근대제주불교역사 상 최초로 승려가 집전한 부처님 오신 날 공식행사를 무사히 마친다. 이는 200여 년간 지속되었던 제주불교암흑기를 마침내 끝내고 근대제주불교역사를 써 내려가는 순간이다.
1909년 근대제주불교역사 상 최초 사찰인 한라산 관음사를 등짐을 져서 홀로 최초 창건한다. 봉려관스님은 한라산 관음사의 최초 창건주이고, 개산조이다.

봉려관스님은 역사적 가치가 있는 사찰인 불탑사, 고관사(조천포구의 관음사), 법화사는 중창하고, 항일운동 근거지로 법정사를 창건하였으며, 포교요충지에는 백련사, 월성사, 성내포교당, 소림사, 대각포교당(일본) 등의 포교당을 창건해서 근대 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운다. 한라산 관음사는 수행중심 사찰이라 하겠다.
봉려관스님은 1926년 제주불교소녀단, 제주불교부인회를 창설해서 신여성 양성에 힘을 기우렸고, 제주도 각 지역포교당마다 염불회를 조직해서 매월 염불법회를 개최하도록 했으며, 매년 2월에는 다함께 모여 1주일 내지 보름간 염불수행에 전념하는 행사를 봉행해서, 염불정진으로 제주 전 지역을 하나로 묶어내는 힘을 발휘한다.
제주도 상권중심지에 창건한 성내포교당은 불교관련 행사는 물론 제주불교협회를 비롯해서 불교관련 단체들의 활동 거점지 역할을 했고, 불교의식에 의거한 결혼식을 거행하고, 일반사회단체의 거점지 등, 제주불교중흥에 막중한 역할을 해낸다.
이렇게 해서 근대제주불교를 중흥시킨 봉려관을 훗날 사람들은 ‘제주불교 중흥조’라 부르고 있다.

비구니 항일독립운동가

1909년 7월 대흥사를 방문했던 봉려관은 당시 심적암에서 항일인사가 참사한 장면을 목격하게 되었고, 이때 항일의지를 다진다. 제주로 되돌아온 봉려관은 항일운동 하는 사람들이 목숨을 부지하면서 항일을 도모할 수 있는 장소를 물색했고, 그리하여 항일 인사 은신처로 창건된 것이 바로 1911년 최초 창건한 법정사이다.
1913년(또는 1914년) 한라산 영실 초막에서 차력훈련을 하며 지내던 강창규, 김연일, 방동화를 법정사로 이주시킨 후, 의식주는 물론 항일자금 조달, 사람이 필요하면 사람을 보내주고,위험에 처했을 때는 숨을 곳을 제공하는 등, 총만 들고 나가 싸우지 않았지 1918년 법정사항일운동을 견인시킨 주요한 역할을 해 낸다.
봉려관스님은 1918년 법정사항일운동 이후에도 방동화를 통해 항일자금을 제주도외 항일조직에게 전달했을 뿐만 아니라, 본인이 직접 대흥사에 가서 항일자금을 전달했다는 증언도 다수 있다.
1918년 법정사항일운동이 발발한 후, 수감된 항일인사들이 감형될 수 있도록 조력을 아끼지 않았고, 그리하여 조기 출감한 항일인사들은 봉려관스님에게 진 빚을 갚는다며 1926년 법화사 중창 시 함께 와서 거들었다고 한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방동화이다.
1909년 항일을 결심한 봉려관스님은 1938년 입적할 때까지 민족적 자존심을 되찾는 것에 게을리 하지 않았고, 후손의 증언에 의하면 봉려관스님이 갑자기 입적한 것은 항일운동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
제주여성항일운동가 고수선, 강평국, 최정숙 보다 먼저 항일운동을 하신 분이 바로 비구니 봉려관이다. 현재 비구니 항일운동가로서 공식적으로 거론된 분은 봉려관스님이 처음이고, 여성독립운동가 100인에도 선정되었다.

대사회활동

봉려관스님은 불교와 조국을 위해 헌신했을 뿐만 아니라, 지역주민, 사회단체와 연대해서 제주사회가 직면한 어려움 극복에도 앞장선다. 봉려관스님은 여성의 사회활동, 신여성 양성에도 힘을 기울이는데, 1925년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를 성내포교당에서 개최하도록 장소를 제공한다. 같은 해 ‘전 제주소년소녀 현상웅변대회’에 의연금을 출연하는 등 대사회활동에도 적극 참여하는 모습이다.

1927년 경영난을 겪던 제주유치원을 성내포교당으로 들어오게 해서 다시 개원하도록 하였고, 1930년에는 불교유치원 창설을 위한 발기인으로 참여한다. 더불어 당시 제주도는 중등학교 결핍으로 천여 명의 학생이 배움을 계속할 수 없는 사회문제를 안고 있었는데, 봉려관스님을 비롯해 제주불교협회가 만원을 출연하고, 해남 대흥사에서 만원을 보조받아 제주중학강습원을 마침내 개교한다.

봉려관스님은 제주불교소녀단과 제주불교부인회를 창설해서 신여성운동에 앞장섰으며, 제주가 흉년으로 힘들어지자 기독교, 천주교 등 지도자와 함께 기근구제회 집행위원으로 활동하며 사회구호활동에도 앞장선다. 1925년 황폐해진 동수천을 수리하고 재건해서 오가는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할 수 있게 하는 등, 봉려관스님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찾아서 했고, 맞닥뜨린 어려움을 탓하지 않고 남아있는 것에서 힘을 찾으신 분이다. 현재까지 제주불교역사를 되돌아보면, 봉려관스님을 뛰어넘는 업적을 남기신 분은 없다 할 수 있겠다.

입적이 남긴 의문

1938년 5월 29일(음) 오후, 공양주와 함께 관음사 주변으로 산책을 나섰던 봉려관스님은 식용버섯이 보이자 공양주에게 그 버섯을 채취해서 저녁에 대중스님들에게 국을 끓여 드리자고 하였고, 공양주가 국을 끓여 먼저 봉려관스님에게 한 그릇 드렸는데, 몇 수저 드시자마자 갑자기 쓰러지면서 바로 세연을 거두셨다. 공양주는 혼비백산해서 도망을 갔고, 봉려관스님은 관음사에서 화장을 해서 산골 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런데 사실은 그렇지 않았다. 관음사에서 화장을 마친 봉려관스님의 유골은 제주항아리에 담겨 관음사 주변 산에 묻혀 있었고, 제주 4.3이 끝나고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되고서야 비로소 대지월의 유언을 받은 손상좌 인흥스님이 봉려관스님의 유골을 찾아 분쇄한 후, 관음사 대웅전 앞 쪽에 산골 한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관음사 개산조의 유골이 화장 후 산골조차 못하고 매장되었다가 10년이 훌쩍 지난 후에야 비로소 산골 되어야 했을까! 게다가 봉려관스님은 생존 시 언론에 자주 노출되었지만, 유독 스님의 입적 관련 기사는 찾아볼 수 없다는 것 또한 쉽게 이해되지 않는다. 스님이 입적하신 후의 일련의 상황들은 합리적 의문을 갖기에 충분하다 하겠다.

제주불교 원로들은 독버섯 국을 드시고 입적하셨다는 구술을 한다. 그러나 안광호(1915-1989)스님을 비롯해 문도들은 독이 든 버섯국을 드시고 입적(독살)하셨고, 항일운동 한 것이 들통이 나서 독살 당했다는 구술을 일관되게 한다.
향후 봉려관스님 입적과 관련된 진실을 알 수 있는 문헌이 나오기를 희망할 뿐이다.

봉려관스님 생애와 업적 왜곡사건

200여년간 지속되었던 제주불교 암흑기를 마침내 끝내고, 일제강점기에 제주불교를 일으켜 세우고 중흥시켰으며, 조국의 아픔도 도외시하지 않았고, 당시 제주도가 직면한 사회적 어려움에도 사명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기여했던 봉려관스님의 생애와 업적은 당시 언론 매체의 기사, 문인들의 기행문, 학자의 글로 남아 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근대 제주불교를 대표하는 인물인 비구니 봉려관의 업적은 2002년을 기점으로 네 사람에 의해 고의적이고 조직적으로 왜곡되어 왔고, 시간이 지날수록 그 대담함은 사고의 범위를 넘어섰으며, 드디어 2017년 12월에는 근거문헌제시 없이 느닷없이 봉려관스님의 입적지까지 바꿔버리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봉려관스님이 한라산 관음사 최초 창건주이자 개산조가 분명함에도 불구하고, 조천 포구에 있었던 고려시대 사찰 관음사(훗날 봉려관스님에 의해 고관사로 개칭)의 역사를 마치 한라산 관음사의 역사인양 가져다 기술하고는, 봉려관 스님을 한라산 관음사의 중창주로 간주하려는 눈속임까지 한다.

뿐만 아니라, 봉려관스님이 한라산 관음사의 최초 창건주이고, 개산조이고, 초대 주지라는 것은 근거 문헌이 있는 분명한 역사적 사실임에도 불구하고, 1914년 가솔을 거느리고 군인 신분으로 제주에 들어와 훗날 봉려관의 권유로 승려가 된 비구를 초대주지라 한다. 그리고 1921년 처음 제주를 방문해서, 법회 또는 행사 참석을 위해 제주를 오갔고, 훗날 친일 승려에 이름을 올린 분을 관음사 최초 창건 증명법사라 하는 등, 웃지 못 할 일들이 지금도 제주도에서 일어나고 있다. 그런데 한라산 관음사의 최초 창건 증명법사는 대흥사 조실 청봉화상이다. 해당사찰의 최초 창건주가 비구이든 비구니이든 성별은 그다지 중요치 않다고 본다.

결국 2017년 두옥문도회, 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이 주축이 되어 봉려관스님의 생애와 업적을 되찾아 드리기 위한 검증이 시작되었고, 지금도 근대 제주불교 역사의 정사(正史)를 찾아가는 학술 세미나는 매년 개최되고 있다. 역사 왜곡은 범죄다. 봉려관스님의 직계 후손은 제주를 비롯해 부산, 대전, 담양, 경기도 등에서 사회복지 활동과 전법에 매진하고 있다.

사진 자료

참고자료

https://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4912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봉려관(蓬廬觀)스님 본항목 봉려관스님(蓬廬觀, 1865~1938) 蓬廬觀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봉려관스님(蓬廬觀,_1865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봉려관스님(蓬廬觀) 두옥문중(斗玉) ~의 일원이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유장스님(宥藏) ~의 수계제자이다
봉려관스님(蓬廬觀) 해남 대흥사(대둔사) ~에서 출가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청봉스님(淸峯)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봉려관스님(蓬廬觀) 항일독립운동 ~에 참여하다 성명 : 안려관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 관음사 ~을(를) 창건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 성내포교당 ~을(를) 창건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서귀포 법정사 ~을(를) 창건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 불탑사 ~을(를) 중창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 고관사 ~을(를) 중창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서귀포 법화사 ~을(를) 중창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 월성사 ~을(를) 창건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 백련사 ~을(를) 창건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 소림사 ~을(를) 창건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여자청년회 창립총회 ~을(를) 지원하다 성내포교당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불교부인회 ~을(를) 건립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불교소녀단 ~을(를) 건립하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제주중학강습원 ~의 주요 설립자이다
봉려관스님(蓬廬觀) 일본오사카 대각포교당 ~을(를) 창건하다

지도

  • 제주 관음사 : 제주도 제주시 아라일동 387 (제주시 산록북로 660)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한국비구니수행담록』과 『한국비구니명감』은 성해스님(性海)으로, 『한국의 비구니문중』은 성혜스님으로 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