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일연스님(一衍, 1947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8일 (수) 07:19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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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서안(棲岸) 일연(一衍)스님은 봉녕사와 동학사의 승가대학에서 전법과 포교활동에 전념했으며, 방치된 동학사 남매탑의 정비에 노력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47 강원 평창 출생
1965 신도안 용화사에서 원담(圓潭)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6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0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72 동학사 강원 졸업
1973 조계종 중앙교육원 제6기 교육 수료
1980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 졸업
1980~1981 석남사, 내원사 안거 성만
1980~1990 단일계단 1~6회 행자교육 습의사
1982~1984 석남사에서 3년 결사
1985~1986 호경스님 문하에서 유식학 이수
1986~1992 봉녕사 강원 중강[1]
1992 묘엄(妙嚴)스님으로부터 전강
1994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졸업
1995 행자교육 비구니 수계 산림갈마사
1995~1996 불교방송 『능엄경』 강의
1995~2000 동학사 학장 및 주지
2004 안심사 주지
문중 삼현문중(三賢)
수행지침 출가위승(出家爲僧)이 기세사호(豈細事乎)아!! 비구안일야(非求安逸也)며, 비구온포야(非求溫飽也)며, 비구이명야(非求利名也)라. 위생사야(爲生死也)며, 위단번뇌야(爲斷煩惱也)며, 위속불혜명야(爲續佛慧命也)며, 위출삼계도중생야(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생활신조 부처님과 부모님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수행 정진
저서 및 작품 『능엄경 이야기』, 『인도불교사』 외 다수
상훈 전국 대학 미전 서예부문 은상 수상(1989) 외 다수
특기 서도(書道)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인목(仁牧)·인덕(仁德)·인성(仁性)·인욱(仁旭)·인호(仁晧)·인벽(仁碧)·인공(仁空)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대은(大恩, 7)→견성(見性, 8)→대오(大悟, 9)→원담(圓潭, 10)→일연(一衍, 11)→인목(仁牧, 12), 인덕(仁德, 12), 인욱(仁昱, 12), 인호(仁淏, 12), 인벽(仁碧, 12), 인공(仁空, 12)

활동 및 공헌

[일연스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96
[일연스님]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299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01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참석(2004년)]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05
[남매탑]
사진출처: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302

출가의 계기

서안(棲岸) 일연(一衍)스님은 1947년 5월 12일 강원도 평창군 평창면에서 아버지 오용근과 어머니 이종남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해주이며, 이름은 오금자이다.

한 스님이 목에 염주를 걸고 들어오는 태몽을 어머니가 꾸고 난 뒤 탯줄을 목에 걸고 태어난 일연스님은 동네 할머니들한테 염주를 걸고 태어났다는 소리를 들으며 자랐다.

당시 대부분이 그렇듯이 스님의 집안 역시 몹시 가난했다. 하지만 자녀 교육에 대한 열정이 각별했던 어머니 덕분에 스님은 중학교를 졸업하고 고등학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러나 졸업을 불과 몇 달 남겨두고 살던 집마저 남의 손에 넘어가 버린 탓에 더 이상 공부를 계속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낙담하지 않은 스님은 독학으로 사서를 배우고 공부를 계속하여 나중에는 사법고시 시험을 보고 싶다는 원대한 계획을 갖게 되었다.

스님은 당시 포교당 주지였던 이장호 스님에게 가르침을 받았는데, 이장호 스님이 다른 곳으로 옮겨 가게 되자 『사서삼경』을 계속 배울 수 있도록 진천 용화사를 소개해주셨다.

이에 스님은 진천으로 가서 이해송스님에게 소학과 대학을 배웠다. 이때 이해송스님이 『초발심자경문』도 함께 가르쳐주신 덕분에 발심의 기반으로 삼게 되었다.

어릴 때의 불연

스님은 전생에 불연(佛緣)이 깊었던지 어려서부터 여느 아이들과 사뭇 달랐다. 국민학교 3~4학년 때의 일이다. 예전에는 사람이 죽을 때 메는 상여를 보관해 두는 곳집(상엿집)이 공동묘지 근처에 있었는데 스님의 고향에서도 예외가 아니었다. 어느 화창한 이른 봄, 학교 에서 일찍 돌아온 스님은 친구들과 함께 나물 캐고 진달래 꺾으러 동구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다른 아이들은 나물을 캐느라 부산한 틈에 우연히 무덤 가에 다다른 스님은 순간 나이 답지 않게 문득 ‘죽음의 문제’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게 되었다. ‘사람은 누구나 살다가 저렇게 죽게 되는구나! 만약 나중에 나도 죽는다면 과연 어떻게 될까?’ 하는 물음에 이르자 스님은 그만 아찔해졌다.

또 한 번은 집 마루에 걸터앉아 있는데, 때마침 어느 스님 한 분이 대문 앞을 지나갔다. 그 모습이 얼마나 순결하고 고귀해 보였는지 한동안 일연스님은 ‘내가 만약 스님이 되면 저런 모습을 갖출 수 있을까.’ 하고 부러워했다. 이때부터 스님의 세계에 대해 막연히 동경하게 되었고, 이런 생각들이 쌓여 출가의 원동력이 되었던 것이다.

출가

스님이 신도안 용화사에서 출가한 것은 당시 진천 용화사 주지로 계시던 이해송 노스님이 청양 봉서암으로 백일기도 하러 가실 때 스님도 글을 배우러 따라간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곳에서 백일기도 해제를 할 때까지 스님은 고향 선배와 공부는 물론 생활까지도 같이 하였다. 그 후 기도가 끝나고 해제를 하자 해송 노스님께서 당신 가족이 사는 계룡산을 구경시켜 주겠다기에 따라갔다.

해송스님은 가족이 있는 팔정사로 가시고, 스님 일행은 용화사 아래에 있는 내봉암이란 보살 절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다. 암자의 보살이 스님에게 어디에서 왔느냐고 묻기에 강원도 평창에서 왔다고 대답하였다. 그러자 보살이 ‘저 건너 용화사에 강원도에서 오신 비구니스님이 있다.’고 말하는 것이었다. 다음날 아침 스님은 고향에서 오셨다는 비구니스님을 찾아뵙고 인사를 드리고 싶었으나 마침 그 스님께서 부재 중이라 절 구경만 하고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돌아오는 길에 이해송 스님께서 약수암을 둘러보게 하신 다음 그곳 주지스님에게 스님을 가리키며 “이 학생이 출가할 생각이 있으니까 잘 부탁한다.” 하고 소개를 시켜주었다. 그런데 알고 보니까 그곳에 계시는 스님은 일연스님의 속가 친척으로 숙모 뻘 되시는 분이었다. 내봉암 보살의 이야기를 대충 듣고는 내가 잘 아는 조카 아이라고 하면서 기왕 출가할 바라면 자신에게 출가를 시키라며 집으로 편지를 띄우셨다. 스님께서는 속가의 인연이 있으니 기왕이면 다홍치마라고 스님 앞으로 출가를 하면 좋겠다고 생각하셨던 것이다.

그러나 편지를 받으신 스님의 아버지는 절에 가서 공부하는 것은 얼마든지 좋으나 삭발 만은 절대로 하지 말라고 만류하셨다. 농사지은 팥을 장에 내다 팔아 차비를 마련해주고 또 공부하다가 심심할 때 먹으라고 엿까지 애틋하게 챙겨주신 어머니 역시 반대하시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스님은 부모의 기대와는 달리 용화사에 도착하여 스님에게 인사를 올리고 나자 또다시 출가하고 싶은 마음을 누를 수가 없었다. 결국 스님은 1965년 용화사에서 원담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의 세속 나이 19살 때였다. 당시 용화사에는 노스님과 은사스님 두 분이 계셨는데 서로 연세가 비슷하셨다. 소박하고 순수한 성품으로 평생 대중 생활을 고집해 오신 노스님께서는 항상 마음을 비우고 사셨는데, 그런 청빈한 수행자의 모습은 스님에게 두고두고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은사 원담스님

은사스님인 원담스님은 용화사 살림을 맡고 계셨다. 원담스님은 늘 인자하고 또한 자비로우며, 스님이 마음 편히 공부할 수 있도록 물심양면으로 도와주신 참으로 넉넉한 분이셨다. 원담스님의 개방적이고 현대적인 사고와 사랑에 힘입어 스님은 어린 나이에 일찍 강원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 당시 강원으로 공부하러 가기란 무척 어려운 일이었다. 대부분의 스님들이 손수 탁발을 하여 강원에 다니기 일쑤였고, 은사스님들이 보내주지 않아 도망쳐 오기도 했던 시절이었다. 그러나 원담스님은 한 사람의 인재를 키운다는 생각으로 스님을 기꺼이 강원으로 보내셨던 것이다.

원담스님은 1960년대의 그 어려운 절집 살림을 꾸려가기 위해 하숙을 치셨는데 당신은 근근이 연명하면서도 스님의 학비는 물론 책값까지도 넉넉히 주실 만큼 자비로웠다.

스님이 출가할 당시 은사이신 원담스님은 이미 세수 예순이 넘으셨다. 동진이 아닌 33세에 혼자 되신 후에 신심을 내어 출가하신 분이었다. 스님이 은사스님을 모시고 산 것은 10년 남짓 된다. 하지만 그동안 강원에서 공부한 6년을 빼면 만 4년 정도 모시고 산 셈이다.

은사스님은 상궁 나인으로 궁에서 머물다가 결혼하였지만 일찍이 혼자되어 출가를 하셨다. 궁중에서 배운 바느질과 음식 솜씨가 뛰어났던 은사스님은 틈나는 대로 스님에게도 그 솜씨를 가르쳐주셨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을 대하는 예법에도 높은 품격을 갖추셔서 나이 어린 사람에게도 함부로 대하는 법이 없었고 심지어는 지나가는 걸인에게까지 고운 존칭어를 쓰셨다.

내생에는 어려서부터 출가하리라고 원을 세우고 늘 염불과 참선을 두루 수행하신 은사스님의 삶은 여여했다. 일연스님은 해송스님에게 이미 염불을 공부했기 때문에 출가한 다음 해인 1966년 범어사 조실 하동산 스님에게 사미니계를 수지 받았고, 그로부터 4년 뒤인 1970년 범어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모시고 구족계와 보살계를 수지하였다.

수학

1967년 21살 되던 해 스님은 동학사 강원에 입학했다. 그때의 강원은 지금과 달라서 학인의 수가 많아야 열 내지 스무 명 정도였다.

출가한 다음 해 봄날의 일이다. 용화사는 가난해서 땔나무조차 없었다. 그래서 스님을 포함하여 대중 대여섯 명이 산으로 솔방울을 따러 갔다. 그런데 산에 올라갔더니 저 멀리 마치 한 폭의 그림 같은 동학사에서 집을 새로 짓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호기심이 발동해 동학사를 향해 내려간 일연스님의 귀에는 여러 스님들의 글 읽는 소리가 들렸다. 어렸을 적에 소풍 갔다가 서당에서 들었던 소리와 닮았던 그 낭랑한 독경 소리는 마치 천상에서 울려 퍼지는 것만 같았다.

그 이튿날 스님은 당시 강원을 졸업하고 노스님을 시봉하러 온 사숙님에게 전날 본 곳에 대해 여쭈었다. 그러자 사숙님은 산 너머 있는 그 절은 ‘동학사 강원’이라고 일러주었다. 그 말을 들은 스님은 은사스님에게 날마다 조르고 조르다가 나중에는 만약 안 보내주시면 도망가겠다고 떼까지 써서 그해 여름 마침내 강원을 가게 되었다.

그즈음 강원에서 하는 공부는 전부 한문이었다. 하지만 『사서삼경』은 물론 『초발심자경문』까지 마친 스님은 아는 글자가 많았던지라 매일같이 하는 공부가 그저 재미있고 너무 좋기만 하였다. 그렇다 보니 세상에 이런 공부가 다 있나 싶어 놀라기도 하였고, 하루에 두어 줄 배운 것을 온종일 읽고 또 읽어도 신심과 환희심이 저절로 솟구쳤다. 배고픈 것도, 씻는 것도 모두 잊고 오직 글 읽는 것을 최고의 복으로 여기며 살았다.

돌이켜봐도 정말 열심히 살았던 시절이었다. 그렇게 공부에 마냥 재미를 붙여 산신각 뒤편이든 숭모전 뒤편이든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책을 읽었다. 숭모전에 재향 온 사람들이 놀라운 듯 쳐다볼 정도였다. 그때는 강원이 지금처럼 4년제가 아니라 6년제였다. 당시 21살이었던 스님보다 나이가 어린 스님이 2~3명 있었다. 나이가 많은 스님들은 탁발해서 강원을 다녔을 만큼 모두가 형편이 어려웠다. 게다가 동학사의 불사까지 겹쳐서 더더욱 살림이 어려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중 스님 들은 배고픔도 잊은 채 공부에 열중했다. 그래도 참기가 힘들면 노스님들이 말려놓은 곶감을 몰래 갖다먹었다. 숭모전에 널어둔 곶감이며 미타암에 널어둔 곶감을 서리해 먹고, 심지어는 고추장 단지까지도 가져다가 배를 채우는 바람에 대중 공사를 할 정도였다.

특히 동학사는 일조량이 적어 농사가 잘 안 되는 편이었다. 스님이 원주 소임을 맡았을 때는 김장 농사마저 시원치 않았다. 이에 스님은 ‘내가 복이 없나 보다.’생각하고 그해 김칫거리 걱정으로 애가 탄 나머지 학인 도감스님[2] 과 같이 시장에 나가 탁발을 했다. 그렇게 탁발한 돈으로 시장을 봤고, 무시래기를 주워다가 국을 끓여 먹기도 했다.

석남사 선방 입실

1972년 동학사 강원을 졸업한 스님은 곧바로 위암으로 투병 중이던 은사스님에게 달려가 시봉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2년 뒤 안타깝게도 은사스님은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로부터 1년 뒤인 1973년 조계종 중앙교육원 제6기로 학업을 수료하고, 1980년 동국대학교 승가학과를 졸업하였다. 그리고 그 무렵 동학사 주지인 봉민스님한테 동학사 중강으로 와달라는 부탁을 받았다.

당시 조실이셨던 호경 노스님께서도 경제적 문제는 상관하지 말고 홀가분하게 와서 공부하면 좋겠다고 말씀하셨다. 이런 제의를 받게 된 스님은 스스로를 냉정하게 돌아보게 되었다.

‘이제 겨우 강원과 대학을 졸업한 것뿐인지라 자신을 추스르기도 힘이 드는데 도대체 이런 내가 어떻게 후학들을 가르칠 수가 있을 것인가? 섣불리 가르친다고 나섰다가 학인들 앞에서 실수나 하지 않을까?’

여러 가지 생각 끝에 스님이 내린 결론은 대중과 함께 살면서 소임도 살고 공부도 더 해야겠다는 것이었다. 스님이 이런 결정을 내리기까지는 도반인 대우스님과 정업스님의 영향이 컸다. 정업스님은 노골적으로 ‘스님이 무슨 실력이 그렇게 있다고 벌써 부터 학인을 가르치느냐?’ 하고 반문했다. 스님은 정신이 아찔했다.

석 달에 걸쳐 고민을 거듭하는 동안 이상하게도 옛날 선방에 다니러 갔다가 뵈었던 입승스님[3] 과 석남사 유나스님[4] 이 느닷없이 꿈에 나타나는 등 여러 가지 인연으로 스님은 동학사로 가는 대신 석남사로 향하였다. 그때가 1980년 여름 결제 사흘 전이었다. 15일이 결제인데 방부도 안 들이고 바랑을 메고 무작정 찾아간 것이다. 어째서 선방을 오게 되었느냐는 어른 스님의 물음에 스님은 자신의 처지를 자세히 말씀드렸다.

그러자 어른스님은 쾌히 승낙을 해주셨다. 스님은 석남사에서 안거에 들어가 공양주ref> 후원(부엌)에서 밥을 짓는 소임 </ref>를 자원해 맡으면서 해제 후에도 겨울까지 살았다. 그리고 뒤이어 내원사로 가서 두 철을 지냈다. 그 다음 해 석남사에서 삼년 결사를 했다. 스님은 절에 공부하러 왔다가 출가를 하였듯이 결사도 마찬가지였다. 그 당시 결사를 했던 것은 지금 생각해도 참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은사스님없이 산철을 2년 동안 왔다 갔다 하다 보니까 스님은 제방의 여러 아는 인연들에게 함께 살아주길 바라는 부탁을 받곤 했다. 그런데 그런 기대에 따르지 못하다 보니까 본의 아니게 서운한 마음을 안겨주게 되고, 또한 어느 한 곳에 소속하지 못하면 몸도 마음도 피곤하여 허송세월을 보낼 것 같다는 염려가 들었다. 그것이 스님이 결사를 하게 된 동기였다.

그러나 스님이 처음 선방에 갔을 때 전생에 참선을 하지 않았던지 다리가 너무 아팠다. 몸 조복도 안 되고 망상만 생겼다. 그래서 먼저 몸을 풀기 위하여 108배를 하고 또 하기를 되풀이했다. 그 것이 힘이 되어서 나중에는 삼칠일 용맹정진도 할 수 있었다. 칠일 용맹정진도 여간 아닌데 삼칠일 용맹정진을 할 때는 30분마다 한 번씩 포행을 돌았고 깜빡 졸면 혜암 큰스님의 경책을 받아가며 회향할 때까지 한층 더 분발했다.

용맹정진의 필요성을 절감한 스님은 삼칠일 용맹정진 결사를 두 번이나 하게 되었는데, 혼자서는 할 수 없었을 일을 함께 한 대중들의 뜨거운 관심과 격려 덕분에 이뤄낸 것이라며 지금까지도 대중들에게 고마워한다.

봉녕사승가대학 중강 소임

3년 결사를 끝낼 무렵인 1985년 당시 석남사에 주석 중인 인홍(仁弘)스님께서 강사로 머물러 있기를 바라셨으나, 스님은 참선하던 곳에서 그런다는 게 마음에 걸렸다. 마침 석남사에 계시는 범용스님께서 결사를 끝낸 스님에게 앞으로 무엇을 할 것인지 물으셨다. 스님은 대답했다.

“만약 제가 다시 공부를 한다면 봉녕사 강주로 계시는 묘엄스님 앞에서 하고 싶습니다.”

그러자 범용스님은 묘엄 강주스님에게 스님의 뜻을 전하게 되었고, 마침 봉녕사에도 중강이 필요했기에 그곳으로 가기로 결정하였다. 그러나 선방을 나오자마자 시작한 공부가 성글게 느껴져 스님은 1년 동안 사서와 일어를 더 공부한 뒤 동학사를 나와 대전에 머물고 계시던 호경 강주스님께 유식학을 1년간 배웠다.

이듬해인 1986년 스님은 봉녕사에서 중강을 맡았고, 묘엄 강주스님이 책을 펴신 지 7년 만인 1992년 전강을 받았으며, 1994년까지 봉녕사승가대학 강사를 역임한 후 1995년 동학사 강주 및 주지로 부임하였다.

한편 1980년부터 1990년에 이르는 동안 단일 계단 제1회부터 6회까지 행자교육 습의사를 역임하였고, 1994년과 그 다음해인 1995년에는 행자교육 제6기 및 제8기의 교수사, 그리고 행자교육 갈마사와 비구니 수계산림 갈마사를 역임하였다.

포교활동

또한 1991년부터 1994년에 이르는 동안 불교 방송 ‘자비의 전화’를 진행하면서 라디오를 통한 중생교화를 펼쳤다. 스님은 비록 교리 중심의 프로그램이지만 직접 전화를 걸어온 청취자들에게 사업이나 가족 문제에 관해 상담해준 일, 병원에서 수술을 받으러 들어가기 전 마지막으로 상담을 한 일 등이 기억에 남으며 무척 유익한 경험이었다고 회고한다. 자신의 수행이 남을 위하면 이타가 되며, 결국 그것이 남을 위한 것이 아니고 자기 자신을 위한 일임을 알게 되었을 때 너무나 감사했고 굉장한 수행이 되었다.

1994년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을 수료한 스님은 같은 해 조계종 개혁회의 위원을 역임하였으며, 1995년부터 다음해까지 불교방송국에서 『능엄경』을 강의하였다.

동학사로 부임한 스님은 곧바로 동학사 가람 수호에 전념하였다. 그러나 동학사 불사에 대해 한사코 자신은 한 일이 없고 먼저 주지스님과 강주스님께서 애를 많이 쓰셨다며 겸손해 하였다.

‘나는 다만 지어진 집을 쓸모 있게 고치는 내부 가람 불사만 했고, 굳이 의미를 부여할 일이 있다면 남매탑에 대한 발굴 조사와 남매탑 복원, 상원암 복원, 그리고 동학사지를 출판한 것뿐이다’고 애써 노고를 낮추었다.

심우정사는 원래 비구스님이 한 분씩 정진할 수 있도록 각종 편의를 봐주던 곳이다. 그런데 한 분이 너무 오랫동안 거주하다 보니 동학사에 속한 암자의 성격과는 다르게 인식되는 경향이 있었다. 더군다나 비구니 도량을 가로질러서 등산객들이 오고 가는 것도 경내 분위기에 이롭지 못해 정리를 하게 되었다.

남매탑 복원불사

스님은 동학사에 처음 부임하여 암자의 부처님들께 인사차 들렀는데 남매탑은 너무 멀리 있어 추석 산행 때 학인들과 함께 가게 되었다. 그런데 탑은 아주 좋은데 주변이 음습한데다가 불전함을 갖다 놓은 바람에 사람들이 초와 막걸리까지 올리고 도시락을 먹는 등 유흥장이 따로 없었다.

남매탑에는 오랜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백제가 멸망할 당시 왕족 중 한사람이 이곳에서 수도 중이었다고 한다. 그런데 어느 날 호랑이 한 마리가 나타나 괴로워하기에 자세히 살펴보니 목에 뼈가 걸려 있었다. 왕족이 뼈를 빼주자 며칠 후 호랑이는 여자 한 명을 데려다 놓고 갔다. 여자는 결혼한 사람으로 신방에서 잠을 자다가 잠깐 밖에 나왔는데 그만 호랑이 등에 업혀 온 것이다. 왕족은 겨울이 끝나고 날이 따뜻해지자 그 여자를 집에 데려다주었다. 그러자 여자의 부모는 딸의 목숨을 구해주었으니 둘이 같이 살기를 권유했다. 이후 두 사람은 오순도순 같이 살되 서로를 범하지 않고 깨달음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색욕을 이겨낸 도행의 승리라 하여 이를 기리기 위해 석탑 2개를 쌓은 것이다. 7층 석탑이 오라비 탑이고, 그보다 작은 5층 석탑이 누이 탑이다. 둘 모두 고려시대에 세워진 것이라지만 5층 석탑은 백제의 석탑 양식으로 알려져 있다. 일명 ‘오뉘탑’이라고도 불리며 현재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

당시 남매탑은 충청남도 유형문화재 제1호였다가 보물로 지정된 귀중한 문화유산이지만 동학사에서 관리하기에는 너무 멀리 떨어져 있었다. 30년 전에는 비구니스님이 살았다고 하는데 그 스님이 떠나자 일반인이 거주하고 무속인들이 끊임없이 드나드는 등 관리가 제대로 되지 않았다. 그래도 탑 주변만큼은 적멸보궁 같은 느낌을 주었다. 다행히 정부에서 3억의 보조금이 나와 불사를 할 수 있게 되었다. 스님이 거주하고 있던 사람에게 전후 사정을 설명하자 언제든지 불사를 시작하면 비워주겠노라고 약속했고, 마침내 1996년 겨울 눈이 펑펑 내리던 동짓달에 기공식을 하고 불사를 시작하기에 이르렀다.

이듬해인 1997년 두 차례에 걸쳐 발굴 작업을 벌였고 상원암 터를 닦아 현재의 상원암을 복원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탑 앞에 건물을 지으려고 했는데, 옛 문헌에 따르면 그곳에 석불좌상이 있었다고 하여 좌상을 만드는 계획을 세웠다. 역사 자료를 발굴하다 보니 자연히 사지(寺址) 작업을 병행하게 되어 남매탑 복원과 함께 동학사지도 완성이 되어 1999년 회향하게 되었다.

동학사 불사

이 밖에도 스님은 동학사 오수 정화 사업을 처리하였고, 당시 여러 사람의 명의로 되어 있는 숭모전 땅을 사들여 정리하였으며, 주차장 주변을 대대적으로 정비하였다. 또한 상원 인법당을 건립하였고, 경내에 있던 물레방아 휴게소를 폐쇄하여 도량을 정비하였고, 일주문을 건립하였다. 경내에 있던 심우정사를 35년 만에 환수하여 사중으로 등기를 하였으며, 아울러 남매탑과 심우정사를 오가는 등산로를 폐쇄하여 청정한 도량 수호에 전념을 다하였다.

그리고 동학사 경내에 있던 무허가 건물을 관할 구청에 신고하여 소유권 등기를 마쳤으며, 그동안 매년 3월 3일과 9월 9일 제사를 지내던 남매탑전다례를 1996년 초부터 초이튿날에, 부도재는 초사흘에 지내고 있다. 그리고 조사전의 제사는 9월 9일에 지낸다. 스님은 불사를 하면서 크게 느낀 바가 있다. 불사는 주지 개인이 마음을 내서 되는 것이 아니라 역사적 기운과 원력으로 이루어지는 것이었다.

신도 교육과 편찬 사업

스님은 신도들에게 『육조단경』 1년, 자비참 1년, 『천수경』 1년, 『금강경』 1년 강의를 해왔으며, 현재는 『유마경』을 가르치고 있다. 스님은 편찬 사업을 벌이고 있는데, 학인 스님들이 만드는 동학지에 연재했던 인도, 한국, 중국 불교사를 다시 교정 작업을 거쳐 『교양으로 읽는 불교역사』라는 제목으로 400쪽 정도 분량의 책을 발행할 예정이다.

천년이 넘는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동학사이지만 40년 전 초월스님이 동학사를 정리한 자료가 전부였다. 그래서 계룡산과 동학사에 대한 자료를 전부 발췌하고 다 모아서 추만호에 2권의 책으로 발간하여 빛을 보게 하였다. 제1집은 동학사 최초 창건부터 1920년대까지의 내용이 수록되어 있으며, 제2집은 1920년부터 근대사까지의 내용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서예

스님은 국민학교 때부터 글씨를 썼다. 출가 후 바쁜 생활 속에서도 붓을 놓지 않았는데, 동학사에 와서 학인들을 가르치게 되자 스님은 당시 사교를 배우면서 대중에게 서예 지도를 하였다. 잘 가르쳐야 한다는 마음에 대전에 계시던 백천 선생에게 채본을 받아 학인에게 전달해주다가 졸업하고 난 뒤에는 서울로 올라가 한글 궁체의 대가인 꽃뜰 이미경 선생에게 3년 동안 사사했다. 스님의 작품은 실력을 널리 인정받아 전국대학 미술전람회에서 서예 부문 은상 수상을 비롯하여 1977년 불교미술 전람회 장려상을 수상하였다. 동학사는 강주와 주지가 겸직이 아니었다. 그런데 종단 개혁 이후 스님이 취임할 때에는 총무원장 스님이 강주와 주지를 겸직하는 것으로 공포하였다.

스님은 20여 년 가까이 대부분의 시간을 후학들과 함께 하고 있다. 부처님 경전 공부를 천성적으로 좋아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로는 화를 내거나 잔소리를 하는 자신의 모습을 보면서 학인 들을 지도하는 사람은 특출한 면이 있어야 된다며 자성한다고 한다. 항상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자신이 부족하다고 여기는 스님은 요즘 부처님 제자들 가운데 어느 한 분의 글이 꼭 자신의 처지를 지적하는 것 같아 시간이 날 때마다 자주 읽는다.

   남을 지도하고 가르칠 때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를 다잡을 때다.
   남의 시봉을 받을 때가 아니라
   자기 홀로 무엇이든지 해야 할 때다.
   남의 이야기를 경청할 때가 아니라
   내 스스로 나를 살필 때다.

스님은 현각스님이 쓴 『하버드에서 화계사까지』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출가했을 때 저렇게 큰 고민을 했었던가?’ 하는 생각에 한동안 많이 부끄러웠다고 말한다. 스님은 학인들을 가르치는 일이 참으로 대단한 일이라는 것을 뒤늦게야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요즘 들어 자신을 낳아준 부모까지도 냉정히 떨치고 나선 일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고 한다. 출가한 자식을 10년 동안 가슴에 못박아둔 채 사셨을 부모님에게 효도하는 방법은 앞으로 더욱 열심히 수행하는 것뿐이라고 믿는다. 출가자로 살면 살수록 부처님의 은혜가 더욱더 막중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는 스님은 다음 글귀를 수행 지침으로 삼고 있다.

   ‘出家爲僧이 豈細事乎아 非求安逸也며
   非求溫飽也며 非求利名也라
   爲生死也며 爲斷煩惱也며
   爲續佛慧命也며 爲出三界度衆生也니라.’
   출가하여 중이 되는 것이 어찌 작은 일이랴. 몸의 편안함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며,
   따뜻이 입고 배불리 먹으려는 것도 아니며, 명예와 재물을 구하려는 것도 아니다.
   나고 죽음을 면하려는 것이며, 번뇌를 끊으려는 것이며,
   부처님의 지혜를 이으려는 것이며, 삼계에 뛰어나서 중생을 건지려는 것이다.

일연스님은 2004년 안심사 주지로 수행 정진 중이며, 수계제자로는 인목(仁牧)·인덕(仁德)·인성(仁性)·인욱(仁旭)·인호(仁晧)·인벽(仁碧)·인공(仁空) 스님 등이 있다.

다음은 스님이 쓴 몇 편의 시를 옮겨 온 것이다.

   원왕생

   그날 아주 먼 옛날
   스물아홉 해 전
   수백리 길 멀다 않고
   강원도에서 계룡산까지
   기차 타고 또 걸어서
   이 못난 손녀 찾으러 오셨던
   나의 외조모님 영전에 분향하며
   원왕생 원왕생

   스님의 엄중한 눈길 두려워
   가시는 길도 바라보지 못했던
   나의 외조모님
   내가 삼년 결사 마치던 해에
   그렇게 세상을 떠나셨습니다.
   사십구재에도
   가지 못했던 불효를
   어찌하면 다 갚을 수
   있겠습니까?
   평생토록 아미타불께
   원왕생 원왕생


   산목련

   풀 향기 하늘 가득한 오월
   가파른 산길을 오르고 또 올라
   한적한 골짜기에서
   만난 수줍은 네 모습

   긴긴 겨울의 시려움
   세찬 바람이 지나간
   흔적마저 소중했던
   꿈으로 가꾸어 온
   수행자 같은 네 모습

   사바의 근심과 기쁨
   그 어느 것도
   하이얀 꽃잎에 숨어들면

   폭풍우 지나가고
   햇빛 든 날처럼
   포근한 무명 빛으로
   피어있는 네 모습
 
  상원조사 탑전에서
   (눈 쌓인 어느 날 남매탑 복원 불사 기공식하던 날에)

   산 높고, 하늘 넓은 삼불봉
   이곳은 마치 연꽃 봉우리 같습니다.
   왜냐하면
   상원조사의 아름다운 전설이
   이 탑에서 피어나기 때문입니다.

   먼 곳 당나라에서
   계룡산에 오셔서 고행하시다
   열반에 드신 지
   천육백년이 넘는 오늘
   당신의 후학들이 두 손 모으고
   일주향 올립니다.
   스님께서 도량을 열고
   청량사라 이름 지은 것은
   중국 오대산 문수보살을
   상징함이 아닙니까?
   그래서 우리 큰방에 문수보살이
   지혜로운 미소를 하고 계십니다.

   아! 거룩하기도 하셔라
   어찌 인간의 상정(常情)을 넘어
   그렇게도 자비하시고 고고하셨습니까?
   천년이 지나고 또
   몇백 년이 흘러간 오늘에 와서
   이제 스님의 탑신을 옹호하는
   탑전을 짓고저
   첫 삽을 떴습니다.

   이 일은 여간한 인연으로 오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여
   두 손이 떨리고 가슴이 벅차오릅니다.
   스님의 지혜로운 후학이 되고저
   오직 산을 맑히고 도량을 다듬어서
   제불보살과 조사님 전에
   공양 올리겠나이다.
   스님의 법력으로 가피력을 주소서
   스님의 자비로움으로 인도하여 주소서

완주 안심사

[완주 안심사 전경]
사진출처:불교신문,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203364

안심사는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26번지 대둔산 자락에 자리하고 있으며, 대한불교조계종 제17교구의 본사인 금산사의 말사이다.전라북도 도립공원 대둔산 동쪽 자락에 위치한 안심사는 세월의 무상함을 한껏 느끼게 해주는 고찰이다. 이러한 안심사는 한국전쟁 이전까지만 해도 무려 30여 채의 전각과 13개의 암자가 세워져 있던 거찰이었는데, 이제 그 번성했던 사찰의 위용은 찾아볼 수 없고 불에 타다 남은 석재들만 여기저기 흩어져 있다. 때문에 현재의 안심사를 작은 사찰로 여기겠지만, 진신사리가 모셔진 계단과 1759년에 세운 사적비 및 1760년에 제작된 범종 등으로 미루어볼 때 고찰 안심사는 결코 작지 않은 사찰이 아닌 것을 알게 된다.

특히 안심사는 부처님 진리사리 10과와 치아사리 1과를 안치하고 있는 적멸보궁으로서 그 이름이 높다. 부도탑은 높이 175cm, 탑신 둘레 315cm의 석종형이며 지대석은 연화문으로 장식하였고, 상륜으로 보주를 올려 놓은 형식이다. 그런데 이 진신사리를 모신 석가모니 부처님 사리탑, 즉 안심사 계단의 사방에는 호위신장 역할을 하는 사천왕상을 각각 세워 놓은 매우 특이한 구조를 하고 있다. 이러한 진신사리탑의 미술사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여 근래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였던 데에서 승격되어 보물로 지정되었다.

성보문화재와 함께 안심사에는 아름답게 조성된 삼성각과 산신각이 인상적인 곳이다. 삼성각은 안심사 계단에서 그다지 멀지 떨어져 있지 않지만 계곡물이 흐르는 계류가 지나므로 석재로 조성한 무지개 다리를 건너 가게 되어 있으며, 뒤쪽에 위치한 나무와 매우 잘 어우러져 법열까지 느끼게 한다. 적광전 뒤쪽에 위치한 산신각은 잘 가꿔진 대나무 밭 위쪽으로 돌로 쌓은 계단 위에 규모가 작음에도 불구하고 참 아름답다는 생각을 갖게 한다.

단풍이 곱게 물들어 가는 가을녁의 안심사는 붉은 감이 반갑게 맞아준다. 이 때쯤 안심사를 찾아가면 마을 곳곳에서 흔하디 흔한 감나무에서 익어가는 맛있는 감 냄새가 코끝을 간지른다. 수도에 정진하던 비구니스님이 정겹게 맞아주면서 탐스럽게 익은 감이랑 빛깔 고운 곶감을 소담스런 담아 정성껏 내어주셔서 다시금 감마을 안심사를 오래오래 기억하게 한다. 가을을 진하게 느끼고 싶을 때, 부처님의 사리를 친견하며 마음의 안식을 찾고플 때, 은근하게 퍼지는 감맛을 맛보고 싶을 때 안심사를 찾길 바란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일연(一衍)스님 본항목 일연스님(一衍, 1947~ ) 一衍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일연스님(一衍,_1947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일연스님(一衍)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일연스님(一衍) 원담스님(圓潭) ~의 수계제자이다
일연스님(一衍) 계룡 용화사 ~에서 출가하다
일연스님(一衍)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일연스님(一衍)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일연스님(一衍) 명사법계(明師法階) ~을(를) 품수하다
일연스님(一衍) 동학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수학하다
일연스님(一衍)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을(를) 졸업하다 승가학과
일연스님(一衍) 동국대학교 불교대학원 ~을(를) 졸업하다
일연스님(一衍) 묘엄스님(妙嚴) ~(으)로부터 전강하다
일연스님(一衍) 봉녕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강
일연스님(一衍) BBS불교방송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능엄경 강의
일연스님(一衍) 호경스님(湖鏡) ~(으)로부터 수학하다 유식학
일연스님(一衍) 공주 동학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일연스님(一衍) 완주 안심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일연스님(一衍) 대한불교조계종 행자교육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습의사, 교수사, 갈마사
일연스님(一衍) 안거 ~을(를) 성만하다 울주 석남사. 양산 내원사

지도

  • 안심사 : 전라북도 완주군 운주면 완창리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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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강주를 보좌하는 소임
  2.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소임
  3. 사찰의 규율과 질서를 다스리는 소임
  4. 대중의 질서를 세우는 소임, 선원 수좌들의 공부를 점검하고 지도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