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원스님(智願, 1942生, 비구니)
지원(智願)스님 | |
---|---|
법명 | 지원(智願) |
법호 | |
속명 | 윤춘자(尹春子) |
출생 | 1942.10.02. |
출가 | 1960년 |
입적 | |
사찰 | 신흥사 경상북도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15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지원(智願)스님은 스님을 용주사에서 정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김천 신흥사를 불사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1942 | 경북 칠곡 출생 |
1960 | 용주사에서 정문(精文)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62 | 용주사에서 전강(田岡)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4 | 범어사 대성암 3안거 성만 |
1967 | 용주사 운수암 안거 성만 |
1972 | 인천 용화사 하안거 성만 신흥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74 | 신흥사 주지 취임 |
1983 | 김천 신흥사 전기 불사 |
1986 | 김천 신흥사 전화 불사 청도 운문사에서 제2차 비구니 수행교육 수료 |
1988 | 수원 봉녕사에서 제4차 비구니 수행교육 수료 |
1993 | 김천 신흥사 대웅전 20평 완공, 철불 봉안 |
1998 | 김천 신흥사 지장보살님 300분을 극락전에 모심 |
20016 | 김천 신흥사 주지 |
문중 | 봉래문중(蓬萊) |
생활신조 | 오로지 참선하자 |
특기 | 참선과 독경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상운(祥雲, 5)→본공(本空, 6)→경희(慶喜, 7)→정문(精文, 8)→지원(智願, 9) |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지원(智願)스님은 1942년 10월 2일 경북 칠곡군 약목면 동안리에서 아버지 윤순섭과 어머니 성산 배씨 배주순의 1남 3녀 중 첫째로 태어났다. 본관은 파평이며, 이름은 윤춘자이다. 국민학교 4학년 때부터 절을 내 집처럼 드나들었던 지원스님은 스님들이 마냥 좋았다. 그래서 스님들이 탁발하러 집에 들르면 한 되씩이나 되는 양식을 퍼드렸고, 스님들을 따라가면 안 되냐고 졸랐다. 하지만 그냥 돌아설 뿐 같이 가자는 스님은 없었다. 그러던 중 지원스님이 국민학교 6학년 때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 충격이 얼마나 컸던지 한 달을 땅만 보고 다녔다고 한다. 지원스님이 하도 땅만 보고 다니니까 주위 사람들이 “땅에 뭐 있느냐?”고 물어볼 정도였다. 당시 어린 소녀에 불과했던 지원스님은 “얼마나 죄가 많으면 아버지를 이렇게 빨리 잃어버렸을까?” 하며 스스로를 자책했다. 스님이 20세 되던 해 어느 날, 닭고기를 먹고 체해서 3일 동안 복통에 시달린 일이 있었다. 그런데 절에 가서 부처님께 절을 하고 나자 그토록 아프던 배가 감쪽같이 낫는 것이 아닌가. 그 일을 인연으로 출가의 마음을 내어 1960년 4월 16일 천년 고찰인 경기도 용주사에서 정문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스님의 행자 생활은 밥하고 염불하는 것이 일상이었고, 매일 쑥떡이나 찰떡을 만들어 구워 먹기도 하였다. 지원스님은 1962년 3월 1일, 용주사에서 전강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다.
수행
23세 되던 1964년에는 부산 대성암에서 3년간 안거를 성만하고, 3년 후에는 경기도 용주사의 운수암에서 1년간 안거를 성만하였다. 이후 1972년 8월 23일에는 용화사에서 하안거를 성만하였다.
김천 신흥사로 오다
31세 되던 1972년 9월 15일에는 강원도 신흥사에서 고암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계하였다. 스님은 그해 만행을 다니면서 늘 신흥사라는 이름의 사찰에서 살고 싶다는 생각을 하였다고 한다. 그러다가 1972년 12월 5일 현재의 김천 신흥사로 오게 되었는데, 신흥사라는 사찰 이름 자체가 좋아서 위촉장을 받았으며, 2년 뒤인 1974년 10월에 주지 임명을 받았다. 당시 신흥사는 1969년 9월 11일 자로 법화종에 등록된 상태였고, 스님은 이곳에서 많은 우여곡절을 겪었다.
1976년의 일이다. 한번은 새벽에 예불을 모시러 나가보니 유리관에 모셔놓은 지장보살님이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그날 새벽 2시까지 타작을 하고 법당문을 미처 잠그지 못한 채 잠시 쉬다가 새벽예불을 모시러 가서야 알게 된 것이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의하면 신흥사에서 예전부터 살던 어느 보살이 시기를 하여 부처님을 모시고 가버린 것이었다. 그때 너무 놀란 탓에 심장이 약해져서 조그만 일에도 잘 놀라게 된 스님은 이 일을 계기로 많은 부처님을 모시는 것을 원력으로 삼고 살았다. 신흥사는 원래 신라 42대 헌덕왕 9년(834년)에 도희선사가 세운 고찰이었으나, 1901년에 화재로 소실되었다가 1959년에 도설우(도봉환) 스님이 초대 주지로 부임해서 극락전을 세웠다. 이후 대처승이 3~4년 정도 살았고, 1962년에 대현스님이 임명장을 받고 주지를 역임했다. 그 후 백호(김창욱)스님이 주지로 재직하였고, 그 다음에 지원스님이 와서 신흥사 등기를 신청하여 주지에 임명되었다.
신흥사 불사
지원스님은 1983년 12월에 500만원의 경비를 들여 전기 불사를 하였으며, 1986년에는 전화 공사를 하였다. 1993년 음력 11월 4일에는 20평 정도의 대웅전 불사를 시작하여 1994년 3월에 극락전 완공과 함께 철불을 점안하였다. 이후 1998년에는 지장보살님 300분을 모셨다. 지원스님은 1974년 부임한 이래 2004년까지 김천 신흥사의 주지를 역임하고 있다.
김천 신흥사
대한불교조계종 제8교구 본사인 직지사의 말사이다. 834년(신라 흥덕왕 9) 도의(道儀)가 창건하였다. 도의는 구산선문 중 하나인 가지산문의 개조이다. 950년(고려 광종 1) 보조(普照), 1726년(조선 영조 2) 현각(玄覺)과 부암(浮岩)이 각각 중창하였다. 1901년에 불에 탄 것을 1959년 도설우(都雪牛)가 중창했다.
1993년에 윤지원(尹智願)이 대웅전을 새로 지어 오늘에 이른다. 건물로는 대웅전과 극락전·산신각·요사채 등이 있다. 극락전 안에는 철조비로자나불과 지장보살·옥석약사불이 있고, 후불탱화와 지장탱화·신중탱화 등이 걸려 있다. 모두 근래에 조성된 것들이다. 그밖에 1965년에 만든 소종이 보관되어 있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하권. 뜨란출판사, 2007, pp.73 ~75.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470.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 410.
- 유튜브, 171)김천 신흥사,전통사찰(조계종) (2021년) https://www.youtube.com/watch?v=7vY6kqFrOoY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
지원(智願)스님 | 본항목 | 지원스님(智願, 1942~ ) | 智願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안스님(지원스님(智願,_194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
지원스님(智願) | 봉래문중(蓬萊) | ~의 일원이다 | |
지원스님(智願) | 정문스님(精文) | ~의 수계제자이다 | |
지원스님(智願) | 화성 용주사 | ~에서 출가하다 | |
지원스님(智願) | 전강스님(田岡)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지원스님(智願) | 고암스님(古庵)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지원스님(智願) | 김천 신흥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지원스님(智願) | 김천 신흥사 | ~을(를) 중창하다 | |
지원스님(智願)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부산 범어사 대성암(청룡동), 화성 용주사 운수암, 인천 용화사(주안동) |
지도
- 신흥사 : 경상북도 김천시 농소면 봉곡리 15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