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동성스님(東城, 1913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7일 (화) 21:05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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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옥봉(玉峰) 동성(東城)스님은 동양화가로서 국내외적으로 많은 활동을 펼쳐서 미술계의 발전에 기여하였으며, 독립운동에도 적극적으로 활동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13 함남 북청 출생
1931~1937 일주 김진우 선생 문하에서 사군자 사사
1951 대구 미공보원 토마스 원장 초대 개인전
1954 동학사에서 인정(仁貞)스님을 은사로 출가
1954 경봉(鏡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5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67 동학사 주지
1971 내원사, 윤필암, 대성암, 석남사 등 선원 안거 성만
1976 신세계백화점 개인전
1977 대만 화강박물관 초대 개인전
1981 롯데백화점 개인전
1982 심우헌회 회장
1985 한·중·일 문화교류협회 회원
1987 롯데미술관 초대전(화집발간)
1988 서울 프레스센터 갤러리 서화집기념 개인전
1993 서울 프레스센터 갤러리 팔순회고전
2010 2010.8.9 입적(세수 98세, 법랍 57세)
문중 삼현(三賢)문중
저서 및 작품 롯데미술관 초대전 화집 (1987).
동아일보 후원 ‘옥봉 조기순 서화전’ 서화집(1988)
상훈 조선 서도 진흥회 특선(1936), 한·중·일 삼국 제1회 흥아 서도 용맹전 입선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부현(富賢)·광현(廣賢)·송월(松月)[1]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경전(敬典, 6)→대은(大恩, 7)→도길(道吉, 8)→인정(仁貞, 9)동성(東城, 10)→부현(富賢, 11), 광현(廣賢, 11), 송월(松月, 11)

활동 및 공헌

동양화가 입문

죽난화(竹蘭畵)의 대가로 유명한 옥봉(玉峰) 동성(東城)스님은 1913년 나라 잃은 어려운 시절에 3남 8녀의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백천이며, 이름은 조기순이다.
스님은 15세 때 이웃에 사는 매계(梅溪) 유병기(劉秉紀) 선생 문하에서 한자와 서법을 배웠다. 17세 때 매계 선생님의 심부름으로 그의 일가인 유봉호 판사를 찾아 함흥에 가게 되었는데, 유판사가 첫 대면에 대뜸 이렇게 묻는 것이었다.
“서울서 명화가가 왔는데 배워보지 않겠느냐?”
스님은 그 즉시 호기심을 보이며 대답했다.
“네. 그럴게요. 소개해주세요.”
그 명화가가 바로 일주(一洲) 김진우(金桭宇)(1883~ 1951) 선생이었다. 그리하여 스님은 김진우 선생님이 묵고 계신 호텔로 찾아가게 되었다. 선생님은 '왜 왔느냐.'고 물었다.
“그림을 배우고 싶습니다.”
“그림은 배워서 뭐하려느냐?”
아무 대답도 못하는 스님에게 일주 선생님은 이것저것 몇 가지를 시험해보더니 서울로 올라오라며 주소를 주었다.
일주 선생을 소개한 유판사는 혜춘(慧春)스님(전 전국비구니회 회장)의 아버지였다. 동성스님은 이 사실을 출가한 뒤에 우연히 알게 되었고, 이후 혜춘스님과 동성스님은 좋은 인연이 되어서 자주 만나곤 했다.

옥봉(玉峰)이라는 호를 받다

1931년 18세에 스님은 일주 선생 댁에서 기숙하면서 선생님이 투철한 독립운동가인 것을 알게 됐다. 이때 스님은 조기순이라는 속명을 버리고 '옥봉(玉峰)' 이라는 호를 받아 난(蘭), 죽(竹)을 중심으로 한 사군자를 본격적으로 사사받기에 이른다. 1935년 스님은 한민족의 기개와 자존을 상징하는 사군자를 중심으로 '조선서화협회전'에서 처음으로 입선하며 작가로서 당당한 기량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항일독립운동

그 이듬해부터 스님은 일주 선생의 명에 따라 서대문 형무소에 수감된 안창호 선생의 옥바라지를 하면서 만해스님을 비롯하여 여운형, 명희 선생 등의 연락책과 김정호, 서정관 씨 등의 자금 조달책을 맡는 등 독립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이때 만주로 연락 임무를 띠고 가다 남양에서 일본 경찰에 연행되어 1개월간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1945년 8월15일 꿈에도 그리던 광복. 이름만 들어도 지긋지긋한 일본 천황의 연호인 소화(昭和)(20년)가 손들던 그날도 우리 집에는 일본 형사가 치근거리고 있었어요. 일제의 그물망에서 벗어난다 싶으니 독립만세 소리도 통곡으로 나오더라고요.”

출가

꽃다운 나이, 그것도 여자의 몸으로 애국지사들을 도와 피와 투쟁으로 얻은 조국 광복이 결국 좌우의 이념 갈등으로 동족상잔의 비극으로 치닫는 것을 보며 인생무상을 느껴 결국 붓을 놓고 말았다. 그리고 42세에 늦깎이 출가를 결심하여 1954년 인정스님을 은사로 동학사 미타암에서 삭발 염의하였다.
“이때 모든 속세 인연을 정리했어요. 사진을 비롯한 작품 등을 모두 불에 태웠지요. 평범한 신도로 다니던 동학사에서 강사이신 김경봉 스님의 법문을 듣고는 인정스님을 은사로 출가했지요. 옥봉이란 호를 그대로 법호로 주셨어요.”
출가한 후에도 부처님 가피로 붓을 놓지 않았던 스님은 개인전, 합작전 등을 통해 작품 활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1967년 동학사 주지

옥봉 동성스님

1966년 자운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1967년 동학사 주지로 취임하여 강설전 및 단청 불사와 종각 불사를 하고, 그로부터 1년 뒤인 1968년에 당국으로부터 계룡산 국립공원 인허가 승인을 받아냈다.
같은 해 대나무 병풍과 난초 병풍을 사중에 기증하는 한편 수행 정진의 고삐를 늦추지 않고, 1972년 윤필암을 시작으로 대성암, 석남사 등에서 6하안거를 성만하였다.

  •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p288

대한미술원 창립

더욱이 동학사 주지 소임을 맡을 당시 동양화의 대가 의제 허백련 화백과 '대한미술원'을 창립해 전통예술의 계승과 보존에도 남다른 원력을 보였다. 이러한 활동은 스님의 뼈아픈 경험에서 비롯됐다.
해방 후 우리 것을 쉽게 비하하고 버리는 세태에 오히려 외국인들이 동양화 특히 사군자를 '한국다운 예술문화'로 칭송하며 '왜 연구하지 않느냐?'고 되물을 때는 마음 깊이 부끄러웠다고 회고했다.
“나같이 미련한 사람이나 꿋꿋하게 한 길을 걸어가지요. 독립운동 하느라 제자도 못 키우신 일주 선생님의 유일한 제자이면서 내 뒤를 이을 제자가 아직 없네요. 시절이 좋아졌고 사군자가 생활인의 교양처럼 너나없이 배우는 그림이 되었지만 정통 서화법(書畵法)을 익히지 않아서 그림 아닌 그림을 그리는 꼴이 되었고, 점점 왜곡되는 경향이 짙어지고 있어요.”
죽난화의 대가인 원로 옥봉스님은 화단에 떨친 그의 명성과는 달리 좀처럼 언론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는 분으로 유명하였다. 다만 스승이신 일주 김진우 선생을 위한 일에만 뒷전에서 그림자처럼 조용히 움직일 뿐 자신의 일은 일체 드러내지 않았다.

수행인의 본분으로

이렇게 살아온 스님이 세상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이젠 붓대를 놓겠다.' 는 결심을 하고 나서였다. 늦게 출가해 불가에 몸담으며 지금까지 붓을 놓지 않게 한 부처님의 가피에 대한 진정한 보답은 수행인의 본분으로 돌아가는 '절필’ 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예술하는 승(僧)이기에 앞서 독립운동에 가담했던 애국지사로서 1m 50cm도 안 되어 보이는 왜소한 체구의 여성의 몸으로 독립군의 연락책과 옥바라지와 아울러 자금 조달 역까지 담당했던 스님은 일본 경찰의 혹독한 고문에 오른쪽 어깨뼈가 드러나게 안으로 오그라져 있다. 지금도 궂은 날이면 온몸이 쑤시고 결려 견디기 힘들어 한다.
“나는 고생도 무척 많이 했고, 이것저것 노력도 참으로 많이 했어요. 이제와 아무런 성과도 드러낼 것도 없지만 경험만큼은 많이 쌓았습니다.”

죽난화에 서린 선사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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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7년 오늘날 국전의 전신인 '조선 서도 진흥회'에서 특선을 한 것을 비롯하여, 중국·만주·일본 3국의 '흥아 서도 연맹 전람회'에 입선하여 널리 실력을 인정받았던 스님의 작품에는 속기라고는 전혀 찾아볼 수가 없다. 문인화 작품인 난죽화는 스님의 단아한 성품을 그대로 보는 듯하고, 또한 도도한 선사의 법문을 보는 듯하다. 스님의 작품은 국내는 물론 해외까지 널리 알려져 1977년 대만 화강(華岡)박물관에서 열었던 초대 개인전을 비롯하여 1987년 화집 발간 기념 롯데미술관 초대전, 1992년 서울 갤러리 회고전 등 수십여 차례의 개인전을 열었다. 2002년 5월 20일 서울 강남 신사동 심우헌 화실 생활을 접으시고 스님께서 젊으신 날 정진하셨던 동학사 관음암으로 내려갔다.

  • 사진출처: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p289

입적

옥봉 동성스님은 2010년 8월 9일 오전 9시30분에 세수 98세, 법랍 57년으로 입적했으며, 장례식은 건양대병원 장례식장과 연기군 은하수공원에서 봉행되었다.

수계제자

옥봉(玉峰) 동성(東城)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부현(富賢)·광현(廣賢)·송월(松月)스님이 있다.[2]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동성(東城)스님 본항목 동성스님(東城, 1913~2010) 東城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동성스님(東城,_1913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동성스님(東城) 삼현문중(三賢) ~의 일원이다
동성스님(東城) 인정스님(仁貞) ~의 수계제자이다
동성스님(東城) 동학사 미타암 ~에서 출가하다
동성스님(東城) 경봉스님(鏡峰)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동성스님(東城)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동성스님(東城) 일주(一州) 김진우(金振宇) ~(으)로부터 수학하다 동양화
동성스님(東城) 항일독립운동 ~에 참여하다
동성스님(東城) 공주 동학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동성스님(東城) 대한미술원 ~을(를) 건립하다
동성스님(東城) 안거 ~을(를) 성만하다 양산 내원사, 문경 대승사 윤필암, 대구 동화사 대성암(도학동), 울주 석남사 등

지도

  • 동학사 : 충청남도 공주시 반포면 학봉리 789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390. 참조
  2.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390.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