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주(一州) 김진우(金振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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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명 : 일주(一州) 김진우(金振宇)
  • 생애·업적

근현대기에 활동한 서화가이다. 자는 군협(君協), 호는 일주(一州)이다.
일주의 본관은 강릉이며 호는 일주(一洲), 또는 금강산인(金剛山人)이다. 1883년 3월 10일 강원도 영월군 서면 후탄리에서 아버지 김준경과 어머니 전주 이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894년에 12세의 나이로 아버지 김준경과 함께 의암 유인석(柳麟錫, 1842~1915, 이하 ‘의암’) 문하에 들어가 의병 활동을 하였다. 그 후 만주로 옮겨가 항일운동에 참여하며 유년 시절을 보냈다.(이우정,「一州 金振宇의 생애와 작품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2021). p.1.)
일주는 16세인 1898년 3월 혼인하고 망명하는 의암을 따라 의병에 다시 합류하였다. (최완수는 혼인 후 6년 가까이 지난 1904년 장남이 출생하였으므로 결혼 직후 의암을 따라 망명하였을 것으로 추정한 바 있다. (「일주 김진우 연구」, 『간송미술』40(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91). p.44.))
그의 아내는 淸州 韓明姬로 1882년 3월 8일에 태어나 신묘년 10월 14일에 세상을 떠서 충북 중원군 살미면 재오개에 잠들어 있다. 그는 1874년 7월 25일 태어나 신축년 11월 28일까지 살았던 9년 년상의 星州 裵雲堂과 재혼하였다. 두 번째 아내는 서울 망우리 가족묘지에 묻혀 있다. 그는 일경의 감시와 탄압 속에서 삶을 이어갔다. 또한 장손 김남흥은 그가 창씨개명을 극구 반대하였다 밝힌 바 있다. 여기에서 조국의 독립을 염원하였던 일주 내면의 한 단면을 살펴볼 수 있다.
(일주의 제자인 조기순(동성스님(東城, 1913生, 비구니)은 국내외적으로 불안한 조짐이 있거나 3·1절, 6·10 만세사건, 11·3 광주학생사건 기념일 등 민족운동의 재발 우려가 있을 때마다 김진우를 검속하여 서대문 형무소에 일주일에서 길면 보름까지도 구속하다가 석방하곤 하였다고 회고하였다. 장손 金南興은 경복중학교에 합격했을 때 창씨개명 문제로 입학이 불허되자 김진우에게 하소연하였는데 오히려 걱정을 들었다고 증언하였다. (「일주 김진우 연구」, 『간송미술』40(한국민족미술연구소, 1991). p.51.)
※ 유인석 : 본관은 고흥(高興). 자는 여성(汝聖), 호는 의암(毅菴). 유인석은 화서 이항로(華西 李恒老, 1792-1868)의 문하생이다. 화서학파는 조선을 성리학적 이상 국가로 보전하려는 위정척사 운동의 선봉에 있었다. 그는 한말 서양 및 일본 제국주의 침략에 철저히 반대하면서 유교적인 이념으로써 통치되는 독립된 나라를 구상했으며, 국내와 해외에서 초기 항일 의병을 주도했다. 그는 학문적 기반에 따라 1895년 을미의병을 거행하였고, 친일 내각에 반발하여 이듬해 원주에서 호좌창의진을 성립하기에 이른다. 그는 대한제국기 정미7조약 체결 후 연해주에서 13도 창의군의 도총재로 활약하였다. 그가 일주와의 만남은 제천 봉기를 시작으로 충주까지 기세를 이어 나가다 제천 전투에서 수세에 몰려 단양으로 잠시 퇴각하였을 때로 추정된다.
※ 출처 : 네이버 지식백과 김진우 [金振宇] (한국 역대 서화가 사전, 2011. 11.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