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해주스님(海住, 1951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6일 (월) 16:1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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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해주(海住)스님은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서 불교학 연구와 후학 양성에 매진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51 경남 양산 출생
1972 운문사에서 성관(性錧)스님을 은사로 출가
1972 반야사에서 석암(昔岩)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77 동학사 강원 졸업
1978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2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졸업
1984 동국대학교 대학원 석사과정졸업
1987 동국대학교 대학원 박사과정수료
1987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 사감 겸 보타사 주지
1990 철학박사학위 취득, 동국대학교 조교수
1994 동국대학교 비구니수행원 혜광사 주지 겸 사감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
대한불교조계종 제11대 중앙종회의원
1995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고시위원[1]
1997 ‘대한불교조계종 기초교육개혁위원
1998 대한불교조계종 제12대 중앙종회의원
2000 불교학연구회 회장
2004 서울 부암동 수미400p정사 주지, 동국대학교 교수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 전국 비구니회 감사
2010 서울 부암동 수미정사 중건
2016 동국대학교 정년퇴임
2022 수미정사 주지
문중 청해문중(靑海)
수행지침 무슨 일이든 수행 아님이 없다.(불법문중(佛法門中) 불사일법(不捨一法))
저서 및 작품 『의상화엄사상사연구』, 『화엄의 세계』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자행(慈行)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의영(義永, 6)→지인(智仁, 7)→태구(泰具, 8)→성관(性觀, 9)→해주(海住, 10)

활동 및 공헌

출가의 계기

[해주스님]
사진출처:법보신문,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3557
[부암동 수미정사]
사진촬영:김은희 2018년

수미(須彌) 해주(海住)스님은 1951년 7월 10일 경남 양산군 양산읍 신길 333번지에서 아버지 전덕호(全德浩)와 어머니 오숙자(吳淑子) 사이의 5녀 중 둘째로 태어났다. 속명은 전호련이다.

스님은 어릴 때부터 책읽기를 좋아했다. 중학교 1학년 때 다양한 책을 두루 읽다가 불교 책을 접하게 되었다. 그러다가 어느 한 책에서 (한참 뒤에야 그 내용이 육조 혜능스님『육조단경』에 나오는 것임을 알게 된다.) 깃발이 바람에 움직이는 것을 보고 움직이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하여 두 스님이 의견을 나누는 대목을 만났다.

한 스님은 움직이는 것이 깃발이라 하였고, 다른 한 스님은 움직이는 것이 바람이라고 하였다. 한 스님은 ‘바람이 불어와도 깃발이 없으면 흔들릴 수는 없다.’고 하면서 깃발의 움직임에 초점을 맞춘 반면에 다른 한 스님은 ‘바람이 없다면 깃발이 있다고 해도 어찌 움직일 수 있느냐.’고 하면서 바람에 우선을 둔 것이다. 이때 곁에서 듣고 있던 혜능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이는 깃발이 움직인 것도 아니고 바람이 움직인 것도 아니다. 바로 자기 마음이 움직인 것이다.” 라고 하셨다는 내용이다.

내 주위를 감싸고 있는 만물 형상이 마음이 동하는 대로 보여지는 것이라는 그 지적은 스님에게 그야말로 크나큰 충격 그 자체였다. 그 일은 당시 스님의 마음에 가득 찬 생의 의문에 파문을 더하여 희로애락에 흔들리는 마음을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하는 한편 무의식중에 출가 의지를 키우게 되었다.

스님은 또 칭(稱)거사 이야기를 읽은 적이 있었다. 중국의 칭거사라는 사람이 자신의 식견이 높다고 자부하며 스님들과 법거량을 일삼고 다녔다. 어느 날 칭거사가 한 큰스님을 만났는데, 이름이 저울대 칭(稱)자를 쓴다는 것을 알고는 큰 소리로 ‘할’을 외치며 “몇 근이나 되는가?” 하고 물었다. 그러자 칭거사는 그만 말문이 막혀 버리고 말았다는 것이다.

이런 책들을 읽으면서 해주스님은 출가한 스님들은 일반인과 차원이 다른 세계에 살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어렴풋이 하게 되었다. 이런 생각은 훗날 자신의 인생 행로를 정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스님은 또한 과학에 대한 호기심이 남달랐다. 아폴로 1호에 대한 책이 도서관에 들어오자 제일 먼저 빌려볼 정도였다. 그래서 마음공부와 과학 탐구의 두 길을 오가며 중·고등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출가를 결심할 결정적 계기를 맞았다. 병원에 입원한 이모를 병문안 갔다가 자살을 시도한 한 청년이 병원에 실려 온 모습을 보게 된 것이다. 연세 많은 이모는 더 오래 살고 싶어 치료에 매달리는데 건장한 젊은이가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다는 사실에 큰 충격을 받았다. 이 일을 계기로 스님은 의술이 우리 삶에 혜택을 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인간의 생사는 결국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이 생각은 스님을 곧장 출가의 길로 이끌었다. 친구와의 반연으로 절을 찾아갔으나 인연이 없었던지 스님이 부재중이라 만나지 못하고 발길을 돌렸는데 돌아오는 길에 만난 한 스님한테서 청도 운문사로 가보라는 권유를 받았다.

출가

마침내 22세 되던 해인 1972년 스님은 운문사에서 도감 소임[2] 을 맡고 계시던 성관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였다. 당시 한 가지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스님이 출가를 할 즈음 운문사 주지로 계시던 노스님께서 꿈을 꾸셨는데, 호랑이 두 마리가 노스님 품안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그리고 은사스님 역시 꿈을 꾸었는데, 길을 가다가 좋은 신을 줍게 되어 신으려 했지만 도무지 발에 맞지 않아서 신을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 꿈을 꾼 뒤에 바로 해주스님이 들어오자 두 분은 더욱 관심을 가지고 지켜보셨다.

사리암에서의 행자생활

스님은 운문사 사리암에서 행자생활을 시작했는데, 절집 일을 익히는데 더디기만 하였다. 그럴 때마다 은사스님은 “꿈에 그 신발이 맞지 않더니, 일하는 게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탄식하시곤 했다.

염불과 사중 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행자의 하루가 반복되다 보니 책을 손에 드는 일은 꿈조차 꿀 수 없었다. 그럴수록 스님은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러던 중 큰절로 심부름을 갔다가 염불을 한번 외워보라는 노스님 말씀에 스님은 재빨리 줄줄 외워나갔다. 그러자 뜻밖에도 노스님은 “날래(빨리) 먹은 콩은 똥을 누면 온 콩 그대로 나온다.”며 호되게 경책하셨다. 다음 단계의 공부를 하고 싶어 서두르며 헐떡이는 마음을 훤히 들여다보셨던 것이다. 그때 노스님의 말씀은 지금까지도 문득문득 경책이 되고 있다.

운문사 강원과 동학사 강원에서 수학

그해 겨울 반야사에서 석암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운문사 강원에 입학하여 흥륜(興輪) 중강스님에게 『치문』 을 배우고 강주이신 명성(眀星)스님에게 『사집』[3] 을 배웠다. 곧이어 동학사 강원으로 옮겨 사교과[4]와 대교과[5]를 졸업하였다. 당시 동학사 조실스님 호경 노스님『화엄경』을 배웠는데, ‘약인욕료지(若人欲了知) 삼세일체불(三世一切佛) 응관법계성(應觀法界性)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만약 사람들이 과거 현재 미래의 부처(진실)들을 알고 싶거든 마땅히 법계의 근원을 꿰뚫어 볼지니 그것은 다름 아닌 마음으로 지어졌음이라!)’라는 게송이 마음속 깊이 새겨졌다. 해주스님은 졸업만 하면 선방에 가리라 다짐했으나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 게송을 접하고는 교학을 좀 더 공부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국대 불교학과 교수로 재직하며 후학을 양성하다

강원을 졸업한 해주스님은 이듬해인 1978년에 동국대학교 불교대학 승가학과에 입학하게 되었다.그 당시 어른스님들은 대학교에 가면 중물이 빠진다고 우려하였고, 유학을 가면 속퇴를 할까봐 걱정하셨다. 그것은 비단 환속을 의미하는 것만은 아니었다. 전통 없는 변화란 뿌리 없이 흔들리는 대로 나부껴서 언젠가는 좌초하지 않을까, 다시 말해 전통을 되돌아보는 법 없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변화에 편승하여 이도저도 아닌 것이 될까 걱정하셨던 것이다.

하지만 스님은 학부에서의 공부만으로는 양에 차지 않아서 다시 대학원 불교학과에 입학하여 화엄학을 전공하였다. 스님이 석사학위 논문을 호경 노스님께 바쳤을 때 노스님께서는 “네가 박사가 되면 내가 너에게 절을 하마.” 하고 기특해하셨으나 안타깝게도 박사학위 취득을 못 보고 열반에 드셨다.

스님은 1987년 2월 박사과정을 수료하고 그로부터 3년 뒤인 1990년 2월 마침내 철학박사 학위를 취득하였다. 석사학위 논문은 〈화엄경의 발보리심에 대한 연구>이며, 박사학위 논문은 〈신라의상(新羅義湘)의 화엄교학연구(華嚴敎學硏究) ―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의 성기(性起)사상을 중심으로〉이다.

석사학위 논문은 성불을 가능하게 하는 보리심으로 마음에 접근한 것이고, 박사학위 논문은 부처님 마음인 성기심으로 그 마음을 드러내고자 한 것이다. 두 논문 모두가 화엄의 마음에 관련된 내용으로 스님의 마음공부에 대한 관심도를 엿볼 수 있다. 학위 논문을 준비하면서 스님은 『화엄경』을 좀 더 면밀히 들여다보다가 마음공부를 하는 도량이 어디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성불의 수행 방편도 한 가지가 아니라 중중무진함을 깨닫고 그대로 대학에 남게 되었다고 한다.

불교방송의 ‘자비의 전화’진행

스님은 불교방송의 ‘자비의 전화’ 첫 번째 진행을 맡았는데 결코 서둘지 않는 침착한 설명과 깔끔하고 조리 있는 말솜씨로 단번에 불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스님은 방송 진행 소감을 1993년 4월 월간 〈해인〉에서 이렇게 밝히고 있다. “처음에는 어떤 질문이 나올지 몰라 어려움을 느꼈어요. 샤머니즘에서부터 심지 법문에 이르기까지 그 질문은 매우 다양했어요. 그러면서 느낀 점은 우리가 불교라고 인식하고 있는 것과 일반 대중들이 느끼는 불교는 거리가 너무 멀다는 사실입니다. 배운 이들의 반성을 요하는 일이지요. 한 1년쯤 ‘자비의 전화’를 진행했는데 그때의 보람은 불법을 알고자 하는 이들에게 작으나마 힘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불교학연구회’가 창립

부처님 제자로서 본분사를 지키며 경전을 탄탄하게 연구하고, 또한 불교정신에 입각하여 후학을 지도하면서 어려운 일을 도맡아 하다 보니까 스님의 주변에 뜻을 함께하는 학자들이 모이기 시작했다. 그러한 열기가 무르익어 2000년 봄에 ‘열린 학문마당’을 지향하는 ‘불교학연구회’가 창립되었고, 해주스님은 회장으로 추대되었다. 불교학연구회는 해마다 두 차례 (5월, 11월)의 정기학술발표대회를 위시하여 매년 10회의 학술발표회를 마련하고 강도 높은 토론을 통하여 불교학의 방향을 바로 제시해가면서 한국불교의 미래를 열어가고 있다.

특히 2004년 개최된 한국불교학결집대회는 국내외 불교학자 174명이 참여해 총 11개 분과에서 한국불교 사상과 역사, 천태, 화엄, 선, 밀교사상, 초기 인도불교, 응용불교 등 불교학의 전 분야를 망라하여 발표, 토론함으로써 오늘날 불교학의 흐름을 통합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뜻깊은 자리가 되었는데, 스님이 조직위원장을 맡아 그 대회를 준비하였다.

여러 소임을 맡다

그동안 스님은 중앙승가대학교 수행관 사감 겸 보타사 주지, 동국대학교 비구니 수행원 혜광사의 주지 겸 사감을 지냈다. 그밖에도 대한불교 조계종교육원 교재편찬위원, 고시위원, 기초교육개혁위원, 조계종포교원 포교위원, 전국비구니회 계단위원, 불교신문 논설위원,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학과장 등을 역임하는 등 수많은 일을 맡아 헌신하였다.

미국의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소 선임연구원 역임

또한 1997년에는 미국의 하버드대학 세계종교연구소(Center for study of World Religions, Harvard University, U. S. A)의 선임연구원(Senior Fellow)을 지내면서 세계 종교학의 흐름을 파악하기도 하였다.

스님의 저서와 논문

스님의 저서로는 『의상화엄사상사연구』(민족사, 1993), 『불교교리강좌』(불광출판부, 1993), 초역 『지송한글화엄경』(불광출판부, 1993), 『역주 원각경』(민족사, 1996), 『화엄의 세계』(민족사, 1998), 『사경본 한글역 대방광불화엄경』, 『해주 스님의 법성게 강설』외 다수가 있다.

또한 그동안 발표한 논문으로는 〈비구니교단(比丘尼敎團)의 성립(成立)에 대한 고찰(考察)―비구니 팔경계(八敬戒)를 중심(中心)으로〉(한국불교학 제11집, 한국불교학회, 1986)를 비롯하여 수십 편이 있다.

스님의 서원

이렇듯 바쁜 생활 속에서도 스님은 이즈음 두 가지 원력을 세우고 있다. 먼저 한 가지는 기초 선원과 평생토록 참선할 수 있는 제방의 선원이 있듯이 비구니스님들이 평생 동안 전문적으로 경학을 공부하면서 수행하는 도량을 만드는 것이고, 또 한 가지는 이 시대에 맞는 화엄 수행법을 개발하여 일반인들이 보다 쉽게 마음자리를 찾고 공덕을 지을 수 있도록 돕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일체법이 공하니, 모든 구하는 데에서 자유로운 무원(無願)의 원(願)이라고 한다.

스님은 어떤 행이든지 수행 아닌 것이 없으니 신심으로 온 마음을 다해 살자고 강조한다. 즉 불 법문 중에서 한 법도 버릴 게 없다는 것이다. 학인들에게는 대학에서 불교학을 하는 것 역시 수행임을 명심하고 한층 더 가행정진, 용맹정진하기를 자주 당부한다. 스님에게 직접 논문 지도를 받은 대학원 석사, 박사 제자가 수십 명이나 되는 것도 우연은 아니다.

해주스님은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역경위원과 전국비구니회 감사를 역임하였으며 2016년 동국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를 정년퇴임하고 2022년 부암동 수미정사 주지 를 맡고 있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자행(慈行)스님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해주(海住)스님 본항목 해주(海住, 1951~) 海住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해주스님(海住,_1951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해주스님(海住) 청해문중(靑海) ~의 일원이다
해주스님(海住) 성관스님(性錧) ~의 수계제자이다
해주스님(海住) 청도 운문사 ~에서 출가하다
해주스님(海住) 석암스님(昔巖)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해주스님(海住)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해주스님(海住) 동학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수학하다
해주스님(海住) 서울 보타사(중앙승가대학교비구니수행관)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학감
해주스님(海住) 동국대학교 대학원 ~에서 학위를 취득하다 철학박사(화엄학)
해주스님(海住) BBS불교방송 자비의전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상담법사
해주스님(海住) 서울 수미정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해주스님(海住) 불교학연구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초대회장
해주스님(海住)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포교위원
해주스님(海住)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교재편집위원, 역경위원, 고시위원
해주스님(海住) 불교신문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논설위원
해주스님(海住) 하버드대학교 세계종교연구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선임연구원
해주스님(海住) 동국대학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불교학과장
해주스님(海住) 전국비구니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감사위원

지도

  • 수미정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부암동 95-5



다른 비구니 스님

지식관계망




주석

  1. 『한국비구니명감』과 『한국비구니수행담록』에는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으로 되어 있으나 승가고시는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소관이다
  2. 사찰에서 돈이나 곡식 같은 것을 맡아보는 소임
  3. 선종에서 중시하는 것으로, 불교를 학습하는 데에 기본이 되는 네 가지 책. 곧 《서장(書狀)》, 《도서(都書)》, 《선요(禪要)》, 《절요(節要)》를 이른다.
  4. 여러 설이 있으나 보통 능엄경, 기신론, 금강경, 원각경의 4과목을 강원에서는 4교라고 한다.
  5. 강원에서 〈화엄경〉과 선에 대한 주요문헌을 공부하는 단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