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보각스님(普覺, 1904生, 비구니)

biguni
전영숙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12월 4일 (수) 09:01 판 (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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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보각(普覺)스님은 이화학교를 다니며 유관순열사와 3·1만세 운동에 참여하였고 후에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이바지하였고 해방 후 정화 운동에 참여한 후 계윤스님을 은사로 출가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04 충남 청양 출생
1923 이화여자대학교 영문과 졸업
1924 일본 동경소석천 제국전문대학 사회과 입학
1927 일본 동경소석천 제국전문대학 사회과 중퇴, 상해에서 독립운동가들에게 자금 제공
1950 한국전쟁시 대한부인회, 애국부인회, 국방부인회, 불교부인회, 마야부인회 회장, 국민당 부녀부장
1954 조계종 정화불사시 신도대표
1958 조계사에서 계윤(戒允)스님을 은사로 출가
동산(東山)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2002 통일정사 주석
2006 2006.4.24. 통일정사에서 입적(세수 103세, 법랍 49세)
문중 수정(水晶)문중
수행지침 무아無我(내가 없는 데서 희생봉사한다.)
생활신조 봉사
상훈 공창(公娼)폐지상, 치안계몽상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자원(慈源)·법성(法性)·원봉(圓峯)·법월(法月)·무애(無碍)·주현(住炫)·금련(金蓮)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응운(應雲, 3)→대순(大順, 4)→만각(萬覺, 5)→계윤(戒允, 6)→보각(普覺, 7)→자원(慈源, 8), 법성(法性, 8), 원봉(圓峯, 8), 법월(法月, 8)

활동 및 공헌

출생

2004년 세수 101세이며 한국 근세사의 산증인인 천외(天外) 보각(普覺)스님은 1904년 음력 7월 20일 충청남도 청양군 백금리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전주이며, 이름은 이정수이다.

스님이 아주 어렸을 때의 일이다. 어느 날 마당에 거적을 깔고 식구들이 옛날 차일을 들더니 거적 위에다 상을 놓았다. 그리고는 분향 대접에 물을 떠다놓고 할아버지와 삼촌을 비롯한 집안 권속들이 모두 머리를 풀어 산발을 하고 “아이고, 아이고.” 하며 곡을 하는 것이었다. 스님은 영문도 모른 채 어른들을 따라 같이 곡을 했다. 성장한 다음에 어머니에게 물어보니 한일합병이 된 것이 비통하여 서쪽에 물을 떠다놓고 통곡을 했다는 것이었다.

이화학당에서 유관순을 만나다

고향 경천 계룡산 밑에는 스님이 다닐 만한 마땅한 학교가 없어서 아버지가 남자학교에 입학을 시키자 스님은 매일 싸움을 일삼았다. 그래서 스님의 아버지는 공주 영명보통학교를 졸업한 노마리아라는 선생님을 모셔왔는데, 그 분이 바로 유관순의 사촌 올케였다. 노마리아 선생님에게 3학년 1학기까지 배우고 2학기 가을에 서울 이화학교로 전학을 하였다. 당시의 학제는 이화보통학교 4년, 이화여대 전신인 이화여자전문학교 4년제였다.

1914년 스님이 이화학당에 전학을 하자, 스님보다 나이가 두 살 위인 유관순은 스님의 아랫반에, 여섯 살 위인 유관순의 사촌 언니 유예도는 스님과 같은 반에 재학 중이었다. 당시 스님의 이름은 영어로 이도벨라였다. 그때 기숙사에서 유관순과 같은 방을 썼는데, 스님이 어려 유관순이 머리도 빗겨주고 옷 입는 것도 도와주었다.

당시에는 의형제를 만들어 나이 어린 사람과 나이 많은 사람을 서로 짝 지어주는 게 유행이었다. 스님의 의형님은 폐병을 앓고 열심히 기도하여 병이 완치된 그 유명한 핼런 김, 훗날 이대총장을 역임한 김활란 박사였다.

스님은 이화학당에서 아무런 의미도 모른 채 무작정 기독교를 믿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연과학 이론을 접하면서 천지창조를 하였다는 하나님에 대한 의문이 들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의형제인 김활란 박사에게 '어떻게 해야 하느님을 볼 수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자 김활란 박사가 날짜에 관여치 말고 지극 정성 기도를 하면 하나님을 볼 수 있다.'고 대답해주었다. 그 말을 듣고 하나님을 보려는 마음으로 간곡하게 기도를 했다. 그리고 기도 삼일만에 쏴 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러더니 저 먼 곳에서 큰 밤콩만한 빨간 빛이 점점 커지면서 태양 같은 광선이 사방에 비쳐 한 번에 다가오는 경험을 하였다.

유관순과 독립의 열망을 키우다

유관순과 기숙사에서 한방을 쓰며 나라 없는 설움을 토로하던 중 유관순이 “우리 대한 태극기를 만들어서 방방에 붙이고, 또한 교실에도 붙여서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여 우리나라가 독립이 된다는 인식을 시키자.”고 제안하였다. 이에 동조한 스님은 가지고 있던 20전을 내어 당시 한 장에 1전인 양지를 사다 적당한 크기로 잘라 밥공기를 엎어놓고 동그라미를 그려 태극문양을 그렸다.

이화학당 4층 큰 홀에서 어렵사리 패를 오려 붙이고 밥 짓는 식당 아주머니에게 부탁하여 밀가루를 얻어다 풀을 쑤어 모두 다 잠이 들기를 기다렸다. 그리고 두 사람은 서른여섯 개의 기숙사 방마다 어렵게 만든 태극기를 붙였다. 다음날 기숙사가 발칵 뒤집힌 건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며칠 후에 또 삐라가 돌았다. ‘아, 누이야, 누이야! 독립을 쟁취할 때까지는 우리가 공부가 뭐냐! 공부를 해 뭘 하냐! 나라 없는 서러운 우리가.'라는 내용이었다. 시국이 어수선하자 스님은 잠시 학교를 쉬기로 했다. 그날 밤 기차를 타고 가는데, 유관순이 물었다. “얘들아, 이 기차소리가 어떻게 들리니?" 어떤 전라도 아이 하나가 '동전 두푼, 동전 두푼, 칠푼, 팔푼 하는 소리로 들린다.’고 대답하자 유관순 은“야, 나는 대한독립, 대한독립하는 소리로 들려.”라고 말했다.

당시 열다섯 살이던 스님은 고향에 내려와 태극기를 만들어 만세운동을 준비하던 중 발각되어 경찰서에 끌려가 뺨을 맞는 등 곤욕을 치르기도 했지만 어린 나이라 곧 풀려났다.

그렇지만 며칠 뒤 스님은 천안에서 유관순이 구속되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고, 얼마 안 있어 유관순이 싸늘한 시체가 되어 아현동 공동묘지에 묻히고 말았다.

일본에서 공부하다

1923년 이화여자전문학교 영문과를 졸업한 스님은 다음해인 1924년 일본 동경소석천구(東京小石川區) 제국전문대(帝國門大) 사회과에 입학하여 2년을 다니다가 중퇴하였다.

인간 평등을 구현 운동을 하다

1927년 여름방학, 당시 스님의 학비를 대주던 숙부 집에서 쉬고 있을 때의 일이었다. 근처에서 비명 소리가 나서 뛰어가 보니 어느 중년부부가 죽도록 몽둥이로 두들겨 맞아 사경을 헤매고 있는 데도 때리는 사람이 매질을 멈추지 않는 것이었다. 이를 보다 못한 스님이 말렸더니 “너도 백정년인가?” 하면서 때리려고 하였다. 백정으로 태어난 것이 죄인이라 사람 취급을 하지 않고 갖은 욕설과 매질을 하는 것이었다.

이에 스님은 이러한 풍습을 고쳐야 한다고 결심하고 사회에 나가 인간 평등을 구현하고 직업의 귀천 타파를 실현하기 위하여 우리나라에서 맨 처음 충남 강경에서 운동을 시작하여, 전국적인 운동으로 확대하였다고 한다.

결혼 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스님은 원래 기독교 집안에 태어나 미션스쿨인 이화학당을 다녔지만 남편 장석철씨를 불교병원 건립관계로 만나 1928년 결혼을 하였고, 일본의 탄압을 받지 않는 국민으로 살기 위해 결혼과 동시에 중국으로 건너갔다.

스님은 상해에서 살면서 중국에 귀화를 하여 중국 국민이 되었다. 중국에서 김구 선생과 윤봉길 의사를 만나 9년 동안 자금을 지원해주기도 하면서 독립운동에 큰 힘을 보태주었다. 당시 스님 남편이 인삼을 취급하는 화동무역 회사를 운영했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그러나 보각스님은 남편과 종교가 달라 마음에 갈등이 일었다. 그런 스님에게 남편은 '진리는 한 길이지 둘이 아니다.‘라며 불교를 권하였다. 남편의 권유로 불교를 접하게는 되었지만 스님은 그저 믿는 시늉만 할 뿐 부처님을 진심으로 받아들이지는 않았다. 스님이 불교를 깊이 알게 된 것은 남편이 북경에서 세상을 떠난 이듬해, 스님의 나이 36세 때의 일이었다.

당시 보각스님은 상해에 거주하며 활발하게 독립운동을 펼치던 김구, 이범석, 이시영, 조소앙, 노백린 등을 막후에서 도왔다. 특히 이시영 선생과 스님의 관계는 각별하여 아버지라고 불렀을 정도였다.

윤봉길 의사를 대련에서 만나 상해까지 동행하여 김구 주석에게 직접 소개해주기도 하고, 해방 후 김구 주석 밑에서 부녀부장의 직책으로 2년간 보좌하기도 했다. 그러나 남편의 급사로 귀국하게 된 스님은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해 군에 입대, 만주에서 학도병과 어려움을 함께 하기도 하였다.

해방 후 정화 운동에 참여하다

스님은 대동아 전쟁 때 최초의 일본군 여 선무관으로 입대하였고, 6·25전쟁 때는 두 아들이 납북되는 등 파란만장한 세월을 보냈다. 특히 미군정 시절 공창(公娼)을 폐지하는 데 혁혁한 공로를 세우기도 하였다.

민족상잔의 피비린내 나는 6·25전쟁을 몸소 겪으면서 진실로 불교에 눈을 뜨게 되었고, 그 후 독실한 불자로서 1954년 이승만 정권 당시 정화불사에 신도 대표로서 깊이 참여하였다.

정부를 상대하게 되는 대외적인 일에 스님들이 나설 수 없는 부분을 당시 일반신도였던 보각스님(이정수 보살)이 담당했던 것이다. 그렇게 불교정화에 헌신한 스님에겐 요즘 조계종단의 모습이 반드시 곱지만은 않다. ‘이보살 하나면 천 명의 신도와 같다.'라는 평을 들을 정도로 이정수 보살은 동산 큰스님, 청담 큰스님, 효봉 큰스님, 금오 큰스님 등 당대 큰스님들을 음으로 양으로 외호하며 불교혁신에 동참하였다. 한편 조계종 신도회를 만들어 초대 신도회장를 역임했고, 마야부인회를 만들어 활동하기도 했다.

불자로서 생활하는 동안 대한부인회, 애국부인회, 국방부인회장, 불교부인회장, 마야부인회장, 국민당 부녀부장 등을 역임하였다.

정화운동 당시에 비구·비구니스님들도 애를 썼지만 스님은 기생들을 붙잡고 대처승을 몰아내는 데 힘썼다. 당시 보통 가정주부인 여성 불자들도 많이 참여했지만 특히 기생들도 큰 기여를 했다. 가정주부들은 가정의 살림살이로 많은 시간을 내기 어려웠지만 기생들은 모든 것을 내동댕이치고 적극 동참하였다. 그 인원은 300여 명에 다다랐다. 물질과 금전적인 부분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을 스님이 진두 지휘하였던 것이다.

출가

스님은 그동안의 공로로 공창폐지상, 치안계몽상, 치안선무관특별상을 수상했다. 그렇게 열과 성을 다하여 활약하던 스님은 마침내 1958년 계윤스님을 은사로 동산화상을 계사로 입산 출가하여, 같은 해 동산 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받았다. 1971년에는 팔당 검단산 통일정사에 거처를 정하였다.

출가 이후에는 모든 사회활동을 접고 오로지 남북통일을 위한 기도로 매진하고 있으며, 민족의 동질성을 회복하기 위한 국조 단군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사상을 고취시키고 있다. 한편 단군성전건립추진위원으로서 온 국민의 마음을 하나로 모으기 위한 단군성전 건립에 힘쓰고 있다.

2002년 이후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 산78번지 통일정사에 주석하고 있는 스님은 아무것도 없을 때 음이 먼저 생겼으므로 여자가 먼저 생겼고, 세상 만물이 다 음양으로 되어있다고 믿는다.

스님은 말년에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 정화운동 당시 비구니스님들이 싸움을 했는데 속이 상해서 한 달 사흘 동안 아무 것도 먹지 않은 것이 탈이 나서 그 이후로 귀가 잘 들리지 않았다고 한다.

스님의 수계제자로는 자원(慈源)·법성(法性)·원봉(圓峯)·법월(法月)·무애(無碍)·주현(住炫)·금련(金蓮)스님 등이 있다.

시 몇 수


         삼동 결제 중에 하늘에도 땅에도 홀로 나 하나
         석가문수 보현도 본래 이 자리
         풍산한산 습득도 본래 이 자리
                 - 44세 때 천성산 내원사에서

         수연 방광 임자재
         설중에 매화가 진 때 불이로다.
         태국 땅이 불교가 국교임에 내가
         지금 느낀 감상
         중중무진 마음도 탑
         시방세계 솟았는데
         나는 어이 방일하여 윤회 속에
         드나들어 무진보탑 이제 보네.
         허망한 나의 육신 애착에
         사로잡혀 좋은 약을 먹는다고
         남마저 괴롭혔네.
         마음에 진설미를 또 한 번 채달하네.
                 -46세 때 삼동에 해운대에서

          1992년 음력 10월 25일
         대주에 한 주인이 분심이 아니 나서
         천성산에 뛰어들어 대분심을 얻고 보니
         수마도 달아나고 괴로움도 다 잊었네
         천금을 준들 너를 사리? 만금을 준들 나를 주리?
         천하를 거머쥔 이런 주장자를 가진 이에게 내 주장(자)를 줄 것이나
         없는 이에겐 빼앗아 온 다.
         산호나무 가지마다 밝은 달이 주렁주렁 달렸는데
         쓰는 자가 하나 없네

                     ※ 대주(大晝) 밝은 대낮

          1996년 11월 8일
          황산에 발자취

          운해도 귀송도 귀석까지도
          모두 다 형상의 그림자라
          가져갈 수 없지마는
          보지 못한 이 마음은 쥐는 대로 닿는 대로
          영구히 뜻이 없어
          끊어질 줄 모르듯이
          황산의 대자연도 밉고 고움을 차별없이 모두 다 반겨주니
          우리 모두 다 자연으로 돌아가 용서하는 보살되어 덕과 복을 베풉시다.
          나무영산회상불보살
                      ※ 일부 글자는 원 의도를 짐작하여 적절히 맞춤법 정정

사진 자료

통일정사

경기 하남시 배알미동 78-1번지에 위치한 대한불교조계종 통일정사는 보각스님이 30여년 토굴생활 끝에 1970년 창건하였다.

보각스님은 구한말부터 현대까지 질곡의 근현대사를 온 몸으로 겪어온 시대의 증인이었다.1919년 이화학당 시절에는 친구인 유관순과 함께 3ㆍ1운동을 했다. 자신보다 한 학년 아래였지만 나이는 두 살 위인 유관순과 5년간 한방을 쓰며 절친한 친구로 지냈다.

보각스님은 생전이던 2004년 7월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이정은(50) 수석연구원이 펴낸 ‘유관순’(520쪽·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의 고증을 맡아 3ㆍ1운동 당시의 상황과 유관순의 활동상을 증언했다. 이때의 활동으로 그동안 논란이 있었던 유관순의 한자이름과 출생ㆍ사망일이 확정됐다.

출가 이전 국방부인회장, 불교부인회장, 마야부인회장 등을 역임하며 활발한 사회 활동을 했던 보각스님은 한국전쟁의 와중에서 두 아들과 남북으로 떨어져 살게 돼 이데올로기로 인한 생이별의 아픔을 겪기도 했다.

불가에 귀의한 보각스님은 암자 이름을 ‘통일정사’로 짓고 평생을 두 아들의 귀환을 기렸지만 결국은 통일을 보지 못하고 입적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보각(普覺)스님 본항목 보각스님(普覺, 1904~2006) 普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보각스님(普覺,_1904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보각스님(普覺) 수정문중(水晶) ~의 일원이다
보각스님(普覺) 계윤스님(戒允) ~의 수계제자이다
보각스님(普覺) 서울 조계사 ~에서 출가하다
보각스님(普覺) 동산스님(東山)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보각스님(普覺) 항일독립운동 ~에 참여하다 성명 : 이정수(李禎洙)
보각스님(普覺) 유관순 ~와(과) 함께하다 이화학당, 항일독립운동 (성명 : 이정수(李禎洙))
보각스님(普覺) 하남 통일정사 ~을(를) 창건하다

지도

  • 통일정사 : 경기도 하남시 배알미동 산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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