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관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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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명 : 유관순(柳寬順)

1902년 12월 16일 충남 천안군 동면 용두리1) 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고흥이고 이명은 관순(冠順)이었다.
1915년경 공주에 감리교 여선교사로 있던 앨리스 제이 햄몬드(Alice J. Hammond Sharp)의 추천으로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이화학당 보통과 교비생(장학생)으로 입학하여 기숙사 생활을 하며 공부하였다.
1919년 3월 1일 민족대표들이 독립선언을 하였다. 탑골공원에서 시작된 학생과 시민들은 시가행진을 시작하여 덕수궁 뒤 이화학당 교문 앞에 이르러 이화학당 학생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이화 학생들은 교문으로 달려 나갔으나 프라이 교장과 교직원들이 학생들의 시위참여를 막았다.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위참여를 포기하였지만, 네 명의 친구들과 함께 뒷담을 넘어 거리로 나가 만세시위 대열에 합류하였다.
3월 5일 남대문역(현 서울역) 앞 학생단 시위 때도 참여했다가 붙잡혔다. 경무총감부에 구금되어 있던 중 이화학당 당국이 교섭하여 다른 학생들과 같이 풀려났다. 이후 학교가 휴교하자 3월 13일 사촌언니 유예도와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이튿날인 3월 14일 고향 동리에서 약 10㎞ 떨어진 목천공립보통학교에서 200여 학생들의 만세시위가 있었으나 곧 일본 헌병대에 의해 저지되었다. 고향 동리는 그때까지도 잠잠했다.
졸업반이었던 유예도는 선배들로부터 독립자금 모금 사명을 받았다. 가난한 시골 고향에는 돈이 없었다. 부형들은 차라리 만세시위를 벌이기로 했다. 아버지 유중권, 숙부 유중무, 이웃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이 나섰다. 이들은 4월 1일(3월 1일, 음력) 장날을 기해 만세시위를 일으키기로 했다.
이에 호응하여 머리에 수건을 쓰고 인근 지역을 돌며 유림대표와 큰 가문의 어른들을 찾아다니며 시위운동에 나설 것을 적극 설득하였다. 또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시위운동에 쓸 태극기를 만들었다. 3월 31일 밤에는 인근 각지의 지사들에게 다음날의 거사를 알리기 위해 집 뒤 매봉산에 올라가 횃불을 올렸다. 멀고 가까운 24군데 산봉우리에서 호응하는 횃불이 타올랐다.
1919년 4월 1일 오후 1시 병천 아우내 장마당에는 약 3천명의 군중이 모여들었다. 병천면은 물론이고, 서쪽의 목천 북면 방면, 남쪽의 성남면 ・ 수신면 및 연기 방면, 동쪽의 이동면, 진천 등 각 방면에서 모여든 사람들이었다.
아우내 장마당에 갈 때 옷 속에 자신이 만든 태극기들을 감추고 갔다. 지령리가 총본부격으로 아버지 유중권, 어머니 이소제, 지령리 감리교회 교사인 숙부 유중무와 조인원(조병옥 부친) 등과 앞장섰다.
성남면과 수신면 사람들은 자기 마을에서 독자적으로 만세시위를 하다 지령리 본부와 연락이 되어 연합시위를 벌이기 위해 이날 아우내장터로 모여 들었다. 아우내장터로 들어오는 세 방향의 길목에서는 책임을 맡은 사람들이 장터로 들어오는 사람들에게 태극기를 나누어 주고 있었다. 태극기는 유관순과 지령리 사람들이 만든 것이었다.
오후 1시 장마당 한가운데에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세우고, 지령리 교회 속장 조인원이 싸전 앞에 쌓아 놓은 쌀가마니 위에 올라가 독립선언서를 낭독하였다. 온 군중이 목이 터져라 “대한독립만세!”를 외쳤다. 만세소리는 산천을 뒤흔들며 메아리쳤다. 이렇게 하여 민족대표 선언서에 “일체의 행동은 가장 질서를 존중하여 우리의 주장과 태도가 어디까지나 밝고 정당하게 하라”고 한 높은 수준의 비폭력 운동에 부응하려고 했다.
시위행진이 시작되었다. 아버지와 유중무 숙부, 조인원 등의 지도자들과 함께 장대에 매단 큰 태극기를 들고 시위대열 앞에 섰다. 장터에서 약 30미터 거리에 헌병 주재소가 있었다. 주재소장 고야마(小山)는 진상부(溱相部) 헌병 상등병과 보조원 1명을 이끌고 현장으로 출동하면서 보조원 정수영, 맹성호에게 발포준비를 시켰다.
이에 군중들이 다시 돌아서 우렁찬 소리로 대한독립 만세를 일제히 외쳤다. 그러자 일제 헌병이 조인원을 향하여 방아쇠를 당겼다. 총알은 조인원의 심장 옆 반치 거리를 꿰뚫고 들어갔고, 다시 총검에 왼팔을 찔려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오후 4시경 천안철도엄호대의 키네(甲)대위 이하 6명이 자동차를 타고 병천으로 급히 달려왔다. 지원병의 무차별 발포로 다시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그 과정에서 매우 비참하게 사망한 사람들이 있었다. 김구응과 그의 어머니 최정철(崔貞徹)이 그 예로 일본군이 쏜 총에 맞고 쓰러진 후 총검으로 마구 찔려 모자가 한 자리에서 참혹하게 숨졌다. 일본군의 총격과 총검에 유관순의 아버지 ・ 어머니 등 19명이 목숨을 잃고 수십 명이 부상을 입었다.
이처럼 상황이 악화되자 아버지, 어머니 시신 앞에서 피신하라는 이웃의 강력한 권고를 듣고 어쩔 수 없이 몸을 피하게 되었다. 이후 정확히 언제 체포되었는지는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피신하여 다른 지역에서 시위운동을 계속하다 동생들이 걱정되어 집에 왔다 붙잡혔다는 기사가 있다.
공주재판소의 1심 재판에서 “제 나라를 되찾으려고 정당한 일을 했는데 어째서 군기(軍器, 무기)를 사용하여 내 민족을 죽이느냐.” “죄가 있다면 불법적으로 남의 나라를 빼앗은 일본에 있는 것이 아니냐?”고 하며 논리정연하고 당당하게 대항하였다. 일본 재판관은 격분하였다.
공주지방법원에서 유중무, 조인원 등 지도자급 인물들과 함께 각각 징역 5년을 언도받았다. 경성복심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당시 조인원은 56세, 숙부 유중무는 45세였음에도 불구하고 17세의 나이로 항소심 판결문 제1피고로 언급된 것은 가장 중심인물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총독부 판사들이 3 ・ 1운동 시위자들의 항소를 거의 대부분 기각했던 것에 반하여, 경성복심법원 형사부 재판장 조선총독부 판사 쓰카하라 도모타로(塚原友太郞)가 1919년 6월 30일 내린 판결은 공주법원이 내렸던 1심 판결이 지나치게 과중한 징벌이라며 공소 이유를 인정하고 징역 5년의 1심 형량을 3년으로 낮추어 언도하였다. 공주 1심 재판이 매우 감정적인 보복성 판결이었음을 말해 준다.
다른 사람들은 다시 최종심인 고등법원에 상고하였다. 그러나 “삼천리 강산이 어디인들 감옥이 아니겠습니까” 하며 상고를 포기했다. 서대문 감옥에 수감된 이후 계속하여 독립만세를 부르다 많은 고문을 당했다.
감옥 안에서 함께 옥살이를 했던 어윤희는 유관순이 배고픔, 외로움, 동생들에 대한 걱정으로 슬퍼했으며, 고문과 상처의 후유증으로 고통을 받았다고 증언했다. 1920년 3월 1일 3 ・ 1운동 1주년을 맞자 또다시 감옥 안에서 독립만세를 선도하였다. 이때 다시 많은 고문을 받아 방광이 파열되었다.
1920년 4월 28일 영친왕 이은(李垠)과 일본 왕실인 이방자와의 결혼식이 있자 일본정부는 한국 정치범 5천 명에 대해 사면령을 발표하여 형기의 1/2인 1년 6개월로 감형을 받게 되었다. 미결기간을 감안하여 빠르면 1920년 10월, 아니면 1921년 1월초에는 석방될 수 있었다. 그런데 감옥 당국은 중죄인이라고 하여 허리에 찔린 상처, 고문으로 터진(파열된) 방광도 치료해 주지 않고 방치하여 건강히 악화되었다. 마지막 이화학당 교사들과 오빠가 면회했을 때는 살이 썩어가고 있었다.
마침내 1920년 9월 28일 오전 8시 20분 서대문 감옥 안에서 숨졌다. 정동 제일교회에서 열린 장례식에는 가족 외에 같은 반 학생 몇 명만 참석이 허락된 가운데 쓸쓸히 진행되어 이태원 공동묘지에 묻혔다. 무덤은 얼마 후 일제 군용기지 확장으로 미아리 공동묘지로 이장하는 과정에서 가족과 연락이 닿지 않아 무연고묘로 파헤쳐진 후 유골의 행방을 알 수 없게 되었다.
광복이 되자 1946년 3월 유관순 영화가 제작되어 상영되었으며, 1947년 9월 유관순 기념사업회가 발족되었다. 1967년 지령리에 유관순 기념교회가 건립되었으며, 1969년 4월에는 탑원리에 유관순 사우 부지를 매입하고 1972년 10월에 추모각을 완공하였다. 2002년 유관순 열사 탄신 100주년을 맞아 유관순 사우 내에 유관순열사기념관을 착공하여 이듬해 개관했다.

※ 출처 : 한국독립운동인명사전 유관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