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구니 인명사전

본각스님(本覺, 1952生, 비구니)

biguni
이병두 (토론 | 기여)님의 2024년 9월 18일 (수) 07:16 판 (참고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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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보광(普光) 본각(本覺)스님은 동진출가하여 학자로서 중앙승가대학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수많은 불교 인재를 양성하였으며, 종무행정가로서 불교가 종교 본연의 역할을 다하도록 진력하고 제12대 전국비구니회회장을 역임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내용
1952 경남 합천 출생
1955~1965 인천 부용암에서 육년(六年)스님을 은사로 출가
1965~1967 석남사 인홍(仁弘)스님에게 사미니 습의를 지도받음
1966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1967~1969 석남사에서 사미과, 운문사에서 사집과 수료
1972~1976 동국대학교 철학과 졸업
1976~1979 봉녕사 강원에서 사교과 및 대교과 졸업
1977 통도사에서 월하(月下)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1980~1982 봉녕사 강원 중강[1] 역임
1986 일본 도쿄 릿쇼대학(日本 東京 立正大學院) 대학원 불교학 석사 취득(문학석사)
일본 도쿄 고마자와대학(日本 東京 駒澤大學院) 대학원 불교학 박사과정 입학
1991~2001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 관장
1991~2016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교수
1992 일본 도쿄 고마자와대학(日本 東京 駒澤大學) 대학원 불교학 박사 취득
1995~1996 미국 GTU의 IBS 객원 교수
1995 대한불교 조계종 제11, 12, 13대 중앙종회의원
1996~1999 BBS불교방송 ‘자비의 전화’ 상담법사
2004 제8회 세계여성불자대회 추진위원장
2004 (사)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 복지법인 승가원 이사
2004 금장사 주지
2004.6.29 제8대세계여성불자대회 개최
2010~ 고양 금륜사 창건, 주지
2013~2023 샤카디타 코리아 공동대표
2016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정년퇴임
2019~2023 제12대 전국비구니회 회장
문중 법기문중(法起)
저서및 작품 『華嚴觀法の基礎的硏究』, 『진리의 숲 법구경 이야기』 ,
『華嚴經十地品槪說』,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공저),
『한국 비구니의 수행과 삶2』(공저), 『화엄교학 강론』 ,
『비구니와 여성불자』, 『한국 비구니 수행담록』,
『한국 비구니 명감』, 『신문기사로 본 한국 근·현대 비구니 자료집』,
『불교 페미니즘과 리더십』(공저) 외 다수
상훈 사단법인 행원문화재단 제1회와 제7회 행원상,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 수행관 건립 공로패
중앙승가대학교 부속사찰 보타사 신도회 공로패, 제57보병사단 감사장(제6호)
BBS 불교방송 감사패, 중앙승가대학교 서화부 감사패, 전국비구니회 감사패
전국비구니회 공로패, 제6회 대원상 대상 외 다수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효공(曉空)·덕효(德曉)·효범(曉梵)·효욱(曉昱)·효장(曉暲)·효은(曉垠)·효근(曉根)·효중(曉重)·효석(曉昔)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부영(扶榮, 6)→심공(心空, 7)→만선(萬善, 8)육년(六年, 9)본각(本覺, 10)→효공(曉空, 11), 덕효(德曉, 11), 효범(孝梵, 11), 효욱(曉昱, 11), 효장(曉暲, 11), 효은(曉垠, 11)

활동 및 공헌

출생

보광(普光) 본각(本覺)스님은 1952년 2월 10일 경남 합천군 쌍백면 평지리 15번지에서 아버지 진준이(陳俊伊)와 어머니 신창 표씨 표복례(表福禮) 사이의 6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여양이며, 이름은 진영유이다.

아버지의 죽음

스님의 아버지는 훈장을 지낸 가난한 선비 집안의 막내로 태어나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을 한탄하여 자식 교육에 심혈을 기울이며 자상하게 가정을 돌본 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스님의 큰오빠(천제스님)가 당시 마산 지방의 명문인 마산동중학교에 합격하자 마산으로 이사했는데, 뜻 밖에도 아버지가 병을 얻어 돌아가시고 말았다. 갑작스럽게 가장을 잃은 집안은 큰 충격과 고통에 휩싸일 수밖에 없었다. 스님의 어머니는 과묵하고 점잖은 분으로 여섯 남매를 키우고 돌보는 것을 삶의 전부로 여긴 전형적인 이 땅의 어머니이셨다.

불교를 전혀 알지 못했던 어머니는 나중에 스님이 되신 고모 삼인스님의 권유로 한을 남기고 떠나셨을 아버지를 위하여 49재를 지내기로 하셨다. 그리하여 당시 고승으로 이름이 높으신 성철 큰스님을 찾아뵙고 부친의 천도를 부탁드린 것이 스님의 집안과 불교와의 깊고도 진중한 인연의 시작이었다.

큰 오빠 천제스님

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참담한 마음을 가눌 수 없어 침통한 나날을 보내고 있던 스님의 큰오빠는 49재를 마친 뒤, 집으로 돌아와서 자신의 주변을 정리하고 15세의 나이로 통영 안정사 천제굴에서 수행하시던 성철 큰스님께 귀의했다.

출가 암자인 천제굴의 '천제'는 나중에 그대로 큰 오빠의 법명이 되었다. 그때가 1952년, 부친이 사망한 해이면서 동시에 본각스님이 사바세계에 첫 발을 디딘 해이기도 하다. 당시 천제스님은 출가 직후 쓴 글에서 인생무상을 뼈저리게 표현하고 있다.

오호 애재라, 부세사(浮世事)여. 인생은 왜 앞길을 모르는가!
석화(石火)같은 인생의 한 평생, 인생은 죽음의 길을 행하면서
왜 공포심이 없으며, 왜 생로(生路)를 찾지 않는고.
슬프다 인생사여!
아무리 친해도 이별이 있고, 아무리 부귀영화를 누려도
사시死時가 있으니, 이 어찌 하련고?
벼슬이 높으면 죽지 않는가, 생사에 얽매인 부세인(浮世人)이여.
숨 한번 잘못 쉬면 가는 이 세상, 일시 속속 성불도(日時 速速 成佛道)

큰언니의 출가와 온 식구의 출가

이 글은 천제스님이 당시 친구에게 보낸 것인데 나중에 큰 언니가 읽게 되었다. 그로부터 1년 후에 큰언니까지 출가를 하자, 어머니도 스스로 출가를 결심하셨다.

이때 어머니는 다섯 명의 자식에게 출가에 대한 의견을 일일이 확인하셨다. 어린 스님에게도 출가 의사를 물으니 아무것도 모르던 스님 역시 ‘출가할 것’이라고 분명한 의사를 표명했다고 큰 언니 스님은 전한다. 이렇게 가족의 의견이 일치 되자 어머니는 과거 추억의 찌꺼기를 없애버리려는 듯 가족사진을 모두 불태우고 살림을 처분해 어린 자식들을 데리고 절로 들어가셨다.

스님의 어머니는 1955년 태백산 홍제사에서 출가를 앞두고 자운율사께 ‘성종’이라는 법명까지 받으셨지만, 뜻밖의 병을 얻어 출가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만 세상을 떠나셨다.

출가한 스님의 가족 6남매는 큰언니 혜근스님, 그 다음이 성철 큰스님의 맏상좌인 큰오빠 천제 스님, 둘째 언니 적조스님, 셋째 언니 보명스님, 둘째 오빠 삼소스님, 그리고 막내 본각스님으로 모두 여법한 수행자의 길을 걷고 있다.

본각스님의 출가와 수학

스님 가족이 출가하던 날 있었던 일이다. 아침 일찍 집을 떠나 태백산으로 향하던 스님의 가족은 부산 근처를 지날 즈음 날이 밝아 등교 길의 학생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당시 중학교 1학년이던 둘째 언니 적조스님은 출가하러 간다는 사실을 깜빡 잊은 채 어머니께 “오늘 학교를 결석해서 어떡해요?” 하고 걱정을 했다. 그러나 상황이 바뀐 것을 알아차리고는 곧 입을 다물고 말았다고 한다.

본각스님은 세 살의 어린 나이에 석남사 인홍(仁弘)스님과 권속 관계인 인천 부용암(현 부용사)의 부용당 성육년 스님을 은사로 의지하며 성장했다. 부용당 스님은 성격이 과묵하고 희생정신이 강하여 어린아이들을 잘 돌보셨고, 특히 스님을 아껴 언제나 뜻을 받아주셨다. 그러한 은사스님의 각별한 신뢰 속에 자란 스님은 기상의 나래를 마음껏 펴나갔고, 성인이 되어서는 스스로 부여한 역할을 해나가는 데 있어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안타깝게도 스님은 부모님을 일찍 여의었지만 부모님에 버금가는 훌륭한 은사스님을 만난 덕분에 어린 시절이 불행했던 것만은 아니었다.

은사스님은 세 살짜리 어린 스님을 어머니 못지않은 정성으로 소중하게 돌보고 키워서 승가대학 교단에까지 설 수 있도록 평생 뒷바라지를 해주셨다. 그 누구보다도 은혜로운 스승이셨다.

본각스님은 전생에 선근을 많이 심은 덕분인지 유난히 스승의 복이 많았다. 스님의 가족과 뗄려야 뗄 수 없는 성철 큰스님, 지족암 일타 큰스님, 인천 부용암에 자주 들르셨던 전강 큰스님, 수덕사 혜암 큰스님, 춘성 큰스님, 지산 큰스님, 승려의 기상을 확립하도록 가르쳐주신 석남사 인홍 노스님, 스님의 강원 시절 스승이신 봉녕사 묘엄(妙嚴)스님 등을 비롯하여 석남사 어른들을 두루 모실 수 있었던 것은 크나큰 행운이었다.

울주군 석남사 인홍스님 밑에서 사미니 습의를 받던 중 1966년 사미니계를 수지받은 스님은 1967년부터 2년 동안 석남사와 청도 운문사 강원에서 사미과와 사집과를 수료했다.

그러나 사집과 졸업을 앞두고 세속의 지식과 세상을 배우고 싶은 충동에 1969년 운문사를 나와 긴 여정을 통하여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72년 동국대학교 철학과에 진학했다. 그와 같은 모든 일들은 세상을 깊이 알고 싶어한 스님의 요청을 기꺼이 들어준 은사스님이 계셨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또한 은사스님은 스님에게 고등학교 3년과 대학교 4년 간을 재가자의 모습으로 다닐 수 있도록 허락해주셨다. 은사스님의 깊은 배려 덕분에 스님은 비로소 세상과 어울리고 동화되어 많은 것을 배우며 유익한 시간을 보낼 수 있게 되었다.

대학 졸업 후 재출가

1976년 대학을 졸업하고 문학사 학위를 취득한 스님은 재출가를 단행했다. 그것은 대학 4년간 폭넓고 값진 경험을 한 세상으로부터의 진정한 출가를 의미한다. 스님은 재출가를 하면서 절 집의 모든 시비로부터 초연 한 삶을 살고자 다짐하고 결심했다. 지금도 가끔 본의 아니게 시비의 와중에 서게 될 때면 재출가의 초심으로 돌아가려고 노력한다고 한다.

1977년 음력 3월 4일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비구니계를 수지한 스님은 1979년 봉녕사 강원에서 대교과를 수료하고, 다음해인 1980년 수원 봉녕사승가대학 중강으로 3년 동안 새로이 출가한 사미니 스님들에게 사미과와 사교를 혼신의 힘을 다해 가르쳤다. 이때의 일은 스님의 일생에 가장 보람되고 또한 최선을 다한 아름다운 추억으로 남아있다.

일본 유학

스님은 1983년 일본으로 유학을 떠나게 되었다. 유학을 결심한 데에는 여러 가지 사정이 있지만 가장 큰 이유는, 중강으로서 남을 가르친다는 현실에서 자신을 더욱 탁마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1986년 3월 일본 동경 릿쇼대학(立正大學) 대학원 불교학 전공 석사과정을 수료하고, 문학석사를 취득했다. 대학원을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일본 동경 고마자와대학(尙澤大學) 대학원 박사과정에 입학하여 1992년 3월 고마자와대학 대학원에서 화엄학 전공으로 불교학 박사학위를 취득했다.

8년간에 걸친 스님의 일본 유학 생활은 밤낮없이 공부를 하는 바쁜 가운데 새로운 것에 눈뜨고 한국에서의 삶을 되돌아보는 소중한 나날이 되었다.

중앙승가대학교 교수생활

1991년 3월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교수로 부임한 스님은 그해 4월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 관장 겸 수행관 부속 사찰 보타사 주지에 취임하면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하게 되었다.

1991년 스님이 비구니수행관 관장으로 부임했을 당시 대원암은 수행관이 너무나 협소하고 정리가 되어 있지 않아서 생활교육인 수행지도를 제대로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이 점을 안타깝게 생각하던 스님은 학인스님들과 힘을 모아 수행관을 새로 짓기로 결심했다. 1993년 12월 24일에 기공식을 갖고 1994년 2월 21일에는 기존 건물을 해체하고 공사를 시작했다.

수행관 공사에는 총 18억의 공사비가 필요했으나 당시 어른 스님들로부터 모은 1억 4천만 원이 스님이 가진 돈의 전부였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학교는 물론 주위의 모든 사람이 무모한 짓이라며 만류했다. 그러나 스님은 주장을 굽히지 않고 공사를 시작했다. 엄밀히 말하자면 1억 4천만 원이 공사비로는 턱없이 모자란다는 사실조차 깨닫지 못했다.

그해 4월 조계종 개혁운동이 전개되고 종단이 대혼란에 빠졌을 때 스님은 비로소 자신의 무모함을 깨닫게 되었다. 그때부터 스님은 오로지 부처님을 의지하며 혼신의 힘으로 수행관 불사에 매진했고, 불교방송 경전 공부를 진행하면서 전국의 불자들에게 수행관 불사를 알리고 도움을 요청하기도 했다.

중앙승가대학교 수행관 준공

1995년 3월 22일, 마침내 부처님의 가피로 수행관 준공식을 무사히 마친 뒤 미처 숨 돌릴 틈도 없이 스님은 수행관 불사 소임을 놓고 1년 일정으로 미국 버클리 GTU의 IBS 객원교수로 가게 되었다. 1년의 해외 연수를 마치고 돌아온 스님은 1996년 10월 4일부터 BBS 불교방송의 요청으로 생방송 ‘자비의 전화’ 상담 법사로 1999년 9월 20일까지 3년간 활동했다. 그 프로그램은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을 무사히 건립하게 한 전국의 불자들과 부처님에 대한 감사와 보은의 천일기도라고 생각하고 진행했다. 또한 수행관을 개방하여 5회에 걸친 여름 가족수련회를 개최하여 불자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1997년 3월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의 관장 소임을 다시 맡게 된 스님은 학인스님들의 생활지도와 보타사 신도 포교에 힘썼다. 그리고 2000년 학교가 김포 학사로 옮김에 따라 비구니 수행관도 김포로 이전하여 수행관의 초창기 어설픈 살림을 성심성의껏 보살펴 기틀을 다졌는데, 1991년부터 2001년까지 10년 세월 동안 맡아온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 관장 소임을 신병으로 인하여 마감했다.

스님은 1994년 종단 개혁을 기치로 일어난 법난의 와중에서 시종일관 종단 교육개혁을 중요 과제로 삼았다. 그리고 기본선원, 전통강원, 중앙승가대학교가 병립이 아닌 종단교육의 일원화를 이루어야 한다는 주장을 피력해 왔다.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에 비구니의원 역임

제11, 12, 13대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에 비구니의원으로 피선된 스님의 활동 중에는 2001년 교육원 주관의 승가교육진흥위원회 위원으로 위촉된 후 같은 해 6월 19일 회의에서 <법계법 개정안 재심 요청>을 문서로 제출하여 <법계법> 제3조 ‘비구와의 서열은 율장 소정에 준한다.’는 항목을 삭제 요청함으로써 <법계법>을 통과시킨 일이 있었다. 이는 비구니 불평등법을 최소화하여 통합종단 이래 총무원에 비구니 부장을 탄생시키는 데 종헌종법상의 토대를 마련한 것으로 평가되었다.

2004년 제163회 임시종회에서는 총림의 <임회> 제14조 2항 임회의 구성원에 ‘승랍 25년의 비구·비구니’를 명기할 것을 제안하고 본회에 통과시킴으로써 산중결의에 비구니가 참여하는 법적 권리를 획득했다. 비구스님들과의 의견 대립으로 고충을 겪긴 했지만 석남사 비구니 종립특별선원의 제정에 있어서도 도문스님과 함께 이 사안을 종회에 제안하여 성사시킨 일 또한 작지만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뿐만 아니라 ‘안암학사 고시원 대여의 부당함’을 지적하고 ‘종단 책임자의 정치적 편향 발언 금지’를 요청하는 종회 발언으로 한동안 당사자 비구 어른스님의 염려를 사긴 했지만 소신을 지닌 스님으로서는 종회의원 생활 가운데 보람으로 남는 일이었다.

승가고시 갈마위원 재임

스님은 계단(戒壇)에서는 2003년 제3회 3급 승가고시 갈마위원 및 특강교수, 2004년 제4회 3급 승가고시 갈마위원으로 위촉되어 참여하기도 했다.

화엄장학회 운영

또한 스님은 학인의 학업을 도우려는 취지에서 화엄장학회를 운영하고 있다. 화엄장학회는 1994년 본각스님이 진행하던 불교방송의 『화엄경』 십지품을 청취하던 불자들이 중앙승가대학교 부속 사찰인 대원암과 보타사에 모여 월례법회를 가지던 중 1994년 가을 학기부터 보시행의 실천을 서원하고 불교 지도자 양성을 위하여 결성되었다. 매월 법회 때마다 회원들이 자발적으로 5천 원 이상 회비를 내고, 이를 모아서 1학기 장학금을 지급했다.

장학회 이름에서 ‘화엄’이란 부처님의 꽃동산에 모여 보시행을 실천하자는 의미로 회원들의 뜻을 모아 명칭을 붙인 것이다. 화엄장학회 결성 10주년인 2004년에는 ‘원광화’ 불자가 일생 동안 모은 전 재산 1억 원을 장학금으로 기탁함으로써 그동안 기금이 없던 화엄장학회에 뜻깊은 장학기금을 적립하게 되었다. 원광화 불자님의 장학금은 기증자의 이름을 따서 ‘화엄오향(華嚴五香) 장학금’으로 불리며 더욱 폭넓은 장학활동을 펼치는 밑거름이 되었다.

비구니 스님 자료집 발간

1999년 대한매일 신문사에서 ‘여성종교지도자명감’ 편찬을 위해 당시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수행관장이었던 스님에게 불교계 인사의 원고 정리를 부탁해온 일이 있었다. 스님은 우리나라 각 종교의 지도자를 수록하는 명감에 불교계 인사만 빠질까 염려하여 그 일을 맡게 되었다. 스님은 그해 중앙승가대학교 97학번 비구니 학인스님들과 명감에 실을 인명자료를 만들기 위하여 전국 곳곳의 사찰로 스님들을 일일이 찾아다니며 취재를 시작했다. 이 일이 계기가 되어 한국비구니 자료 정리의 지속적인 작업을 하기 위하여 ‘한국비구니연구소’를 설립하게 되었다. 그동안 학인스님들과 밤낮을 잊은 꾸준한 작업 끝에 2003년 마침내 결실을 맺게 되었는데, 한국비구니에 대한 자료를 모은 총서 『비구니와 여성 불교』(전6권)와 『신문기사로 본 근·현대 비구니 자료집』(전6권)의 출판이 바로 그것이다. 책자들은 한국 비구니에 관련된 최초의 자료집으로 그 의의가 매우 크다.

또 학인스님들이 전국 각지의 사찰을 직접 방문해 수백 개의 테이프에 비구니 어른스님들의 행장을 녹취하여 이를 바탕으로 5백여 비구니스님들의 면면을 정리한 『한국비구니 명감』, 어록 및 발자취를 담은 『한국비구니 수행담록』을 출판했다. 앞으로 고문서에서 여성 및 비구니 관련 자료를 발췌하여 ‘고문서 자료집’을 만들 계획이다.

2004년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 유치

‘한국비구니연구소’ 설립이 계기가 되어 스님은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8th Sakyadhita’의 한국 유치에 대한 총책임을 맡게 되었다. 스님은 2002년 7월 대만 7차 대회를 다녀오면서 2004년 6월 27일~7월 5일까지 열린 ‘제8차 세계여성불자대회’의 추진위원장을 맡아 장장 3년간 대회를 준비했다.

그동안 스님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만큼 많은 일을 경험했다. 가장 어려웠던 것은 대회가 시작되기 1개월 전에 대회장 렉쉐 쏘모스님을 금장사에 맞이하면서 전개된 복잡다단한 일들이었다. 대회 내내 가장 걱정했던 세 가지는 참가 인원과 대회 자금 그리고 여름 장마였다. 그러나 이 세 가지 고민이 모두 원만히 성취된 대회를 치르면서 부처님의 가피를 마음 깊이 절감했다.

큰언니 혜근스님이 이 대회의 성공을 위하여 3년간 매일 능엄주 21편을 치면서 기도를 해주셨기에 더욱 그러한 마음이 들었다. 큰 대회를 치르다 보면 여러 가지 잡음과 갈등이 생기고 때로는 서운한 마음도 들기 마련이다. 그러나 새벽예불 시간에 미소 짓고 계시는 부처님 얼굴을 바라보면서, ‘부처님이 하신 일에 괜히 자신이 공을 얻으려 했다.’는 깨우침이 들어서 깊이 참회하고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졌다고 한다. 이제 허공처럼 빈 마음으로 세계 각국 비구니 승단의 재건을 염원하고 있을 뿐이다.

스님은 중앙승가대학교 초대 비구니 교수로서 비구니수행관 관장을 맡은 것을 비롯하여 수행관 부속 사찰 보타사 주지, 미국 버클리 GTU의 IBS 객원교수, 대한불교 조계종 제11, 12, 13대 종 회의원, 중앙승가대학교 기획위원회 위원, 동 대학교 대학원 주임교수,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승가교육진흥위원회 위원,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교육위원회 위원, 사단법인 행원문화재단 이사, BBS 불교방송 ‘자비의 전화’ 상담법사를 역임했다. 그리고 사단법인 생명나눔실천본부 이사, 화엄장학회 회장, 사단법인 승가원 이사, 대한불교 조계종 교육원 교재편찬위원, 대한불교 조계종 포교원 포교연구실 연구위원, 한국비구니연구소 소장, 문화관광부 전통사찰지정 자문위원회 위원, 중앙승가대학교 불교학과 과장, 서울 서대문구 홍은3동 금장사 주지, 불교 여성개발원 특별자문 위원 등으로 활동 하였다.

고양 금륜사 창건

스님은 2010년에 서울 서대문구 금장사를 고양으로 이전하여 금륜사를 창건하였다. 2016년에는 중앙승가대학 교수직을 정년퇴임하였다.

2019년 제12대 전국비구니회 회장 역임

본각스님은 2019년 제12대 전국비구니회 회장으로 당선되었다.

또한 스님은 각계각층에서 많은 상을 수여받았는데, 사단법인 행원문화재단 제1회와 제7회 행원상, 중앙승가대학교 비구니 수행관 건립 공로패, 중앙승가대학교 부속사찰 보타사 신도회 공로패, 제57보병사단 감사장(제6호), BBS 불교방송 감사패, 중앙승가대학교 서화부 감사패, 전국비구니회 감사패, 전국비구니회 공로패 등 다수가 있다.

제18차 샤카디타 세계대회개최(2023년)

제18차 샤카디타 세계대회는 2023년 6월 23일-27일 까지 서울 코엑스에서 개최되었다. 6월28일부터 29일까지 참가자들은 강원도 사찰 순례에 참여하여 월정사, 백담사, 낙사사를 순례했다. 이번 행사에는 세계 30여개국에서 온 외국인 약 600명을 포함해 2천800명 정도가 참가한, 한국비구니의 위상을 세계에 알린 대회였다. 본각스님은 대회장으로서 이 행사의 모든 것을 기획하고 진행했다.

본각스님은 중앙승가대학교에서 15년간 재직하면서 많은 비구·비구니 학인 제자를 두었고, 수계제자로는 효공(曉空)·덕효(德曉)·효범(曉梵)·효욱(曉昱)·효장(曉暲)·효은(曉垠)·효근(曉根)·효중(曉重)·효석(曉昔)스님 등이 있다.

참고자료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범주 유형 표제 한자 웹 주소
본각(本覺)스님 본항목 본각스님(本覺, 1952~) 本覺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본각스님(本覺,_1952生,_비구니)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항목2 관계 속성
본각스님(本覺) 보명스님(寶明) ~의 자매이다 동생
본각스님(本覺) 법기문중(法起) ~의 일원이다
본각스님(本覺) 육년스님(六年) ~의 수계제자이다
본각스님(本覺) 인천 부용사(부용암) ~에서 출가하다
본각스님(本覺) 자운스님(慈雲) ~(으)로부터 계를 받다 사미니계
본각스님(本覺) 월하스님(月下) ~(으)로부터 계를 받다 비구니계
본각스님(本覺) 서울 금장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본각스님(本覺) 고양 금륜사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감원)
본각스님(本覺) 고양 금륜사 ~을(를) 창건하다
본각스님(本覺) 봉녕사 강원(승가대학)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강
본각스님(本覺) 중앙승가대학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교수, 기획위원회 위원
본각스님(本覺) 서울 보타사(중앙승가대학교비구니수행관)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주지
본각스님(本覺) 버클리대학교 불교학연구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객원교수
본각스님(本覺) 행원문화재단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이사
본각스님(本覺) BBS불교방송 자비의전화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상담법사
본각스님(本覺) 생명나눔실천본부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이사
본각스님(本覺) 화엄장학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회장
본각스님(本覺) 승가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이사
본각스님(本覺) 한국비구니연구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소장
본각스님(本覺) 불교학연구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회장
본각스님(本覺) 문화관광부 전통사찰지정자문위원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자문위원
본각스님(本覺) 불교여성개발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특별자문위원
본각스님(本覺) 제8차세계여성불자대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행사유치 총괄책임
본각스님(本覺) 대한불교조계종 중앙종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중앙종회의원
본각스님(本覺) 대한불교조계종 교육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교육위원, 교재편집위원, 승가교육진흥위원
본각스님(本覺) 대한불교조계종 포교원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포교연구실 연구위원
본각스님(本覺) 전국비구니회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제12대 회장

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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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강주를 보좌하는 소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