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륜스님(相侖, 1929生, 비구니)
상륜(相侖)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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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상륜(相侖) |
법호 | 무아(無我) |
속명 | 성영의(成永毅) |
출생 | 1929.12.30. |
출가 | 1955년 |
입적 | 2007.12.28. (세수 78세, 법랍 60세) |
사찰 | 승가사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상륜(相侖)스님은 견성암에서 법희스님을 은사로 출가하여 승가사를 중창하고 용인 법륜사를 창건한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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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9 | 경남 진양 출생 |
1945 | 일신여자고등학교 졸업 |
1955 | 견성암에서 법희(法喜)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58 | 통도사에서 경봉(鏡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2 | 진주 연화사에서 성능스님을 강사로 대교과 졸업 |
1966 | 범어사에서 고암(古庵)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내원사 3안거, 견성암 10안거, 보덕사 2안거 성만 | |
1972 | 서울 삼각산 승가사 주지 취임 |
1985 | 전국비구니회 부회장 |
1990 | 비구니 목련회 회장 |
1992 | 불교방송국 후원회 회장 |
1994~1995 | 심우회 이사장 |
1995 | 서울시 양천구민체육센터 관장 |
1996 | 용인 법륜사 창건 |
1999~2004 | 천구민체육센터 이사장, 승가사 20안거 성만 |
2007 | 용인 법륜사에서 입적 |
문중 | 삼현(三賢)문중 |
수행지침 | 애국, 화합, 자기를 돌아보자. |
상훈 | 총무원장상 외 다수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정호·정엽·정공·선혜·계현·명화·현담 외 9명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원열(元悅, 5)→경전(敬典, 6)→귀완(貴完, 7)→법희(法喜, 8)→상륜(相侖, 9)→정호(精晧, 10), 정엽(精葉, 10), 정공(精公, 10), 계현(戒賢, 10), 명엽(明曄, 10), 현담(炫潭, 10), 정현(精玄, 10), 진묵(鉁黙, 10), 현암(鉉庵, 10), 진황(桭煌, 10), 현봉(玄奉, 10), 현무(玄務, 10), 운서(雲棲, 10), 현규(玄圭, 10), 현오(玄悟, 10), 현수(玄修, 10), 현성(玄性, 10), 현산(玄山, 10), 현각(玄覺, 10) |
활동 및 공헌
출가
천년고찰 삼각산 승가사를 크게 중창하여 대가람으로 변모시킨 무아당(無我堂) 상륜(相侖)스님은 1929년 12월 30일 아버지 성인식과 어머니 정씨 사이의 2남 3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창녕이며, 이름은 성영의이다.
스님의 어머니가 100일 동안 기도를 하여 스님을 낳았는데, 태몽으로 큰 보름달을 안는 꿈을 꾸셨다고 한다. 어머니는 '태양을 받았으면 아들이었을 텐데 보름달을 안아서 딸을 낳았다.‘고 하시며, 늘 상(賞)을 타고 큰일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고 당부하셨다.
스님의 어머님은 매우 지혜로웠고 신심이 깊었으며, 굶주린 사람에게는 자신이 굶는 한이 있어도 죽 한 그릇이라도 쑤어서 주고, 옷 없는 사람을 보면 자신의 옷을 내줄 정도로 가난한 사람을 위해 자비를 많이 베풀며 사셨다. 모두가 살기 어렵던 그 시절에 이웃 사람들과 어려움을 같이하고, 손수 작은 절을 지어서 기도를 하던 분이셨다. 상륜스님의 어머니가 100일 기도를 시작한 데 는 이유가 있었다. 스님의 큰 오빠는 서당에서 책거리를 하면 하루에 보통 2~3권 정도 읽을 만큼 머리가 좋아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런데 그 아들이 일찍 죽고 말았다. 상심 속에서 어머니는 다시 아들을 얻기 위해 기도를 하던 중 태몽을 꾸고 스님을 나은 것이다.
상륜스님이 19세 되던 해에 일제 식민지 치하에서 해방이 되었다. 해방 직후 할아버지와 어머니를 비롯하여 큰오빠, 큰올케까지 연이어 사별을 하는 아픔을 겪게 되자 상륜스님은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어머니는 스님에게 귀한 말씀을 수시로 들려주며 각별한 사랑으로 키웠다. 어머니의 사랑을 듬뿍 받고 자란 스님은 어머니에 대한 애정이 남달랐으며, 지금도 어머니 생각만 하면 저절로 눈시울이 붉어진다.
어머니의 돈독한 신심 때문에 스님은 어린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절에 드나들면서 청담스님 법문은 물론 고암스님 같은 큰스님들의 법문을 들을 기회가 많았다.
스님은 진주 연화사에 다니면서 새벽 예불과 저녁 예불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혹시 일이 있어 아침 예불을 빠뜨리는 날에는 ‘오늘 할 일을 하지 못했으니 무슨 밥을 먹으랴!'하며 아침을 굶었다. 예불과 참선을 하던 스님은 그 절에 주석하고 계시던 유명한 강백인 성능스님께 화엄경을 배웠다. 일 년간 꼬박 화엄경을 보고 난 뒤 마음 가득 차오르던 환희심을 스님은 도저히 말로 표현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화엄경을 끝마친 스님은 열반경을 보기 시작했다. 부처님 팔상록을 읽을 때는 마치 구름 위를 둥둥 떠다니는 듯한 기쁨과 솟아오르는 신심으로 열반경을 달달 외우고 다녔다. 그리고 스님은 발심을 하였다.
이 세상에서 아무리 잘 산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부처님 도량에 가서 부처님 법을 공부해야겠다. 그러나 출가가 쉽게 용납되던 시절이 아니어서 곧바로 집을 떠날 수는 없었다. 대신 열반경을 읽고 부처님 법의 무변광대함과 깊은 맛에 깊이 매료되어 매일 해인사로 새벽예불을 다녔다.
몇 도반과 함께 지프차를 빌려 타고 진주를 떠나 밤새 달려가면 새벽 두시 반 전후에 해인사에 닿았다. 그렇게 꼬박 100일을 하루도 거르지 않고 새벽예불 기도를 다녔다. 스님은 장엄한 새벽예불을 드리며 더욱 신심을 다져갔다. 27세 되던 해인 1955년, 날마다 쉼없이 타오르던 신심을 더 이상 주체할 수 없던 스님은 마침내 수덕사 견성암으로 출가를 하였다.
"충청도 수덕사에 가면 한국 제일의 비구니가 살고 있다. 그분을 은사로 삼아 공부하도록 해라.” 스님이 출가의 뜻을 비치자 청담 큰스님이 하신 말씀이다. 마침내 상륜스님은 청담스님의 소개로 수덕사 견성암에 계시던 법희선사를 은사로 출가하였고, 은사스님과 사형인 수옥스님을 모시면서 본격적인 구도의 길을 걷게 되었다.
이후 1958년 경남 통도사에서 경봉화상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그로부터 4년 뒤에 진주 연화사에서 성능화상으로부터 대교를 수료하였다.
수행과 수학
화엄경을 볼 때는 얼마나 환희심이 났는지 뒷산 방광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다. 1958년의 일이었다.
그 후 1962년 내원사 수선 안거를 시작으로 견성암, 보덕사, 승가사 등 33여 안거를 성만하는 동안 스님은 잠시도 정진을 멈추지 않았다. 스님은 1966년 범어사에서 고암화상을 계사로 구족계를 수지하였다.
스님의 행자 시절 이야기다. 한창 보릿고개였던 초여름, 날마다 보리밥으로 공양을 해야 했던 스님은 보리밥만 먹으면 배탈이 나서 보리밥 공양을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노스님은 물론 고참 스님들 모두 보리밥으로 공양을 하는데 행자인 스님이 감히 다른 방법을 모색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그렇다고 굶을 수는 없어서 방편으로 감자를 삶아 한 끼에 한 개씩 하루 세 개를 먹고 살았다. 참기 힘들 정도로 배가 고프면 우물 가에서 물로 허기를 달래곤 하였다. 그렇게 어렵게 보릿고개를 넘기던 중 여름 기도가 들어왔다. 쌀밥을 지어 부처님께 마지를 올리고 노스 님들께 쌀밥으로 공양을 드렸다. 그런데 스님의 사정을 잘 알고 계신 은사스님이 당신의 밥그릇에서 밥을 덜어 스님에게 주는 것이었다. 은사스님의 공양도 얼마 안 되는 적은 양이어서 스님에게 퍼주는 것이라야 고작 몇 숟가락에 불과했다. 이것을 보고 대중스님들이 이런 저런 걱정의 말씀들을 하였다. '아! 어찌 스님들이 저리도 인정이 없으신가!’ 스님은 잠깐 서운한 마음이 들기도 했으나 그저 잠시뿐, 물로 배를 채우면서도 참선 공부하는 즐거움에 배고픈 줄 모르고 살았다.
지금이야 과일이 지천이지만, 그때는 일 년에 몇 번 그것도 특별한 날이나 되어야 과일 구경을 할 수 있었다. 그런 날이면 주먹만 한 사과, 그나마 한 개도 아니고 육분의 일쯤 겨우 입맛만 다실 수 있었다. 그래도 많이 먹으면 공부가 안 된다는 생각에 더 먹을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다. 그저 부처님 법이면 족하던 시절이었다.
행자 시절이나 지금이나 스님은 잠자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지 않는 것을 철칙으로 여기고 산다. 하루 두세 시간 잠을 잘 뿐이다. 본래 잠자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던 까닭도 있지만 은사 스님의 공부하시는 모습을 보고 좀 더 열심히 공부에 정진해야겠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분명히 잠자리에 드시는 은사 스님을 보았는데도 새벽에 얼핏 보면 어느새 깨어 앉아 있곤 하셨던 것이다. 그런 은사스님을 보면서 스님은 '나도 어서 정진해 우리 은사스님처럼 도인이 되어야지.'하는 마음뿐이었다.
승가사 주지가 되다
1972년 7월 삼각산 승가사 주지로 부임하면서 스님은 누구보다도 탁월한 안목과 원력으로 그 당시 허물어져가는 천년고찰 승가사를 오늘날의 대가람으로 바꾸어 놓았다. 스님의 대불사는 마애석불에 오르는 백팔계단의 화강석 조성을 시작으로 30여 년간 거듭되었다.
구미 도리사의 진신사리탑을 복원하다
스님은 1977년 신라 최초의 사찰이자 신라불교 초전 성지인 태조산(太祖山) 도리사(桃李寺)에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발견하여 1979년 7월 사리탑 불사를 준공하기도 하였다. 도리사는 신라 최초의 사찰로서 눌지왕 2년 (418년)에 아도화상이 창건한 유서 깊은 사찰이다. 경내에는 세존 진신사리탑 아도화상 사적비 등이 있다. 신라는 삼국 중 불교를 가장 늦게 받아들였는데, 527년(법흥왕 14년) 이차돈의 순교로 인해 비로소 공인을 받아 전국에 포교되었다. 이보다 100년 앞선 눌지왕 때 아도화상이 이곳에서 불교 포교 활동을 벌여 신라로 하여금 불교문화에 눈뜨게 하였다.
아도화상이 선산 도개부에 있는 모례의 집에 굴실을 지어 거처하다가 시봉자가 늘어나게 되어 진기승지(眞奇勝地)를 찾아다니던 중, 눈 속에 오색 도화(桃花)가 피어 있는 것을 보고 그곳에 절을 짓고 이름을 도리사라고 지었다고 한다.
스님은 승가사 주지로 부임한 직후, ‘선객이면 도리사는 가봐야지.'하는 향곡선사의 말을 듣고 몇 년 뒤 무작정 입승스님과 신도와 함께 길을 떠나 새벽 2시 경북 구미시 태조산 아래 위치한 도리사에 도착했다.
스님 일행이 새벽예불을 마치고 아도화상이 좌선하던 좌선대에 참배하러 새벽길을 걷던 중 칠성각 동북쪽 돌담 곁에 초라하게 쓰러져 있는 사리탑을 보게 되었다. 자세히 보니 석종부도(石鍾浮屠) 형태로 조성된 사리탑에 '세존사리탑(世尊舍利塔)' 이라는 한자가 선명하게 쓰여 있었다. 놀란 스님은 같이 걷던 도리사 주지 법성스님에게 물었다. “왜 사리탑을 제대로 조성하지 않으세요?" 법성스님이 한숨을 쉬면서 대답했다. “가난한 절이라 불사할 능력이 없어요. 스님이 복원해 주실래요?" 이에 상륜스님이 무심코 대답했다. "그럼 제가 부처님 제자 된 도리로 불사를 해보지요.” 이렇게 하여 사리탑 복원의 계기가 마련된 것이다. 당시 스님이 주석하던 북한산 승가사도 퇴락하여 곧 무너질 것처럼 어려운 때였다. 그렇지만 스님은 부처님과 한 서약을 지키기 위해 된장과 고추장을 팔아 불사금을 마련하는 등 어렵게 공사에 착수했다.
부처님 진신사리가 발견된 것은 사리탑 착공 후 1년이 지나 상륜스님과 신도들이 탑대를 복원 하던 중의 일이었다. “무너진 탑을 해체하다 보니 낡은 사리함과 오색의 영롱한 진신사리가 나타났어요. 그 모습이 꿈인지 생시인지 모를 정도로 아름다웠습니다.” 스님의 말처럼 도리사에서 발견된 사리는 지금까지 발견된 부처님 사리와 달리 크기도 제일이며 타원형 투명체이다. 때문에 아도화상이 신라에 불교를 전하고 부처님의 심지(心地)를 도리사에 심기 위해 모셔온 진신사리가 확실하다고 고증 학자들은 밝히고 있다.
성균관대 불교학생회를 돕다
1993년 8월 성균관대 불교학생회에서 봉안하고 있던 불상을 기독교 동아리에서 훼불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이 때문에 새로 부처님을 모셨는데, 당시 부천 석왕사 철불을 모시고 와서 캠퍼스에서 점안식을 봉행했는데 이 때 승가사 주지로 계셨던 상륜스님이 모든 일을 도와주셨으며, 특히 점안법사로 석주정일(昔珠正一,1909~2004) 스님을 모실 수 있도록 해주셨다.
승가사 중창
승가사는 756년(신라 경덕왕 15년) 수태(秀台)대사가 창건한, 서울에서는 보기 드문 유서 깊은 사찰이다. 특히 승가사는 국내 여느 사찰과 달리 수태스님이 중국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생불(生佛)로 칭송받던 서역 출신 승가대사(僧伽大師)의 거룩한 행적을 듣고 그를 경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이름을 지은 독특한 역사를 갖고 있다.
승가사는 창건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해 기도를 드렸고, 그 외에도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스님과 조선 후기의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이던 성월(城月)스님도 모두 이곳에서 수행하는 등 예로부터 기도 도량으로 널리 알려져왔다. 이는 다름 아닌 승가사 마애불과 약사불의 영험, 그리고 약수의 효험때문이었다.
승가사는 그동안 역사의 모진 풍파를 견뎌내고 지금에 이르렀다. 고려시대에서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중창 중수를 거듭하며 수많은 왕들이 행차해 참배했던 승가사는 임진왜란 때 크게 소실 됐고, 다시 병자호란 때 북한산 일대 사찰들이 화란을 입으면서 승가사도 자취를 감추게 됐다.
이후 1780년(정조 4년), 성월선사가 폐허로 남아있던 이곳에 돌을 고르고 전각을 재건하면서 승가사의 법등은 다시 이어졌으나 6·25전쟁을 겪으면서 또 다시 모두 소실되고 대처승이 살게 되었다. 그리고 정화 후 1957년 비구니 도원스님이 주지로 임명되었다.
1972년에는 상륜스님이 주지로 취임하여 마애 석불에 오르는 108계단 조성을 시작으로 30여 년에 걸친 중창 불사를 통해 1979년 대웅전, 명부전, 영산전, 종각, 적묵당(대중 큰방), 향로각, 산신각, 일주문, 서래당(요사채), 원주실 등을 갖춘 현재 가람이 형성됐다.
통일기원 호국대보탑에 부처님을 조성할 당시에는 조성을 맡은 3형제에게 만 8년간 산문 밖 출입을 금하고 일체의 오신채도 금하게 할 정도였다.
현재 대한불교 조계종 직할교구 조계사의 말사인 승가사는 비구니 사찰로 30여 명의 비구니스님들이 거처하며 수행 정진하고 있다.
호국 청룡사에 대종 조성
상륜스님은 1978년 나라를 위해 돌아가신 호국 영령들을 위해 해병 호국 청룡사에 1,600관의 대종을 단독으로 시주하여 조성하였다. 타종식 날에는 3천 명의 장병들에게 수계식을 봉행하였으며, 현재도 군인들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관심으로 육군, 해군 등 군인 포교에 지극한 관심을 갖고 지속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
승가사 호국대보탑
1994년에 완공된 통일기원 호국대보탑은 8년에 걸친 대불사로 상륜스님의 승가사 30여 년 불사의 결정체라 할 수 있다.
국내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높이 73척의 호국대보탑은 후손에 길이 남을 대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이 대탑은 인도 기원정사 복원을 발원한 인도스님으로부터 부처님 진신사리 1과를 기증받아 봉안해 그 의미를 더하고 있다. 또한 승가사의 불상은 모두 양각으로 된 부조형식을 띄고 있으며, 탱화도 그림이 아닌 은행나무 부조로 이뤄져 있어 그 화려함과 신비함을 더하고 있다. 승가사에는 보물 제1000호인 승가대사상과 거대한 바위에 새겨진 보물 제215호 마애불상이 있다.
용인 법륜사 창건
이 밖에 상륜스님은 1985년 전국비구니회 부회장을 지냈고, 1990년 목련회 회장을 역임하였다. 1992~1996년까지 불교방송국 최초 후원회장을 맡기도 하였으며, 1995년 양천구민체육센터 관장을 거쳐 2004년 이사장으로 재직하였다. 승가사에서 오랫동안 주지 소임을 맡으며 스님은 남다른 꿈을 키웠다. 그 꿈은 용인에 창건한 법륜사이다.
“죽는 날까지 마음 편하게 수행하고 싶습니다. 이를 위해 노스님들의 노후를 위한 정진 기도도량이 필요합니다. 그리고 스님들의 노후 대책뿐만 아니라 불교수련관도 만들어 대중과 가까이 지낼 것입니다.”
비구니스님들의 노후 복지시설인 용인 법륜사는 4만여 평 규모로 지난 1995년에 공사를 시작하였다. 요사채는 1층이 주방과 식당이고 2층~4층은 스님 방과 신도 방으로 되어 있으며, 각 방마다 주방, 화장실, 침구가 마련돼 있다.
스님은 청춘을 다 바쳐 28년이 넘도록 승가사에서 한평생을 보냈다. '수행자로 살길 잘했다.’고 하며 항상 감사하는 마음으로 '정진하는 그 자체로 입적에 들고 싶다.'는 상륜스님은 살아온 날들을 후회하지 않고, 불자로서 하루하루의 삶을 매우 귀하게 여기며 살고 있다.
또한 스님은 ‘불교계에 무슨 일이 생기면 비구니들이 적어도 몇십 명 이상 모여서 회의를 해야 한다.' 며 비구니회를 잘 조성하여 불교계의 발전에 더욱 힘써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아무리 못난 사람이라도 3명 이상이 모이면 문수보살의 지혜를 가질 수 있다.'는 부처님 말씀을 깊이 새겨야 한다며 삶의 용기를 가지고 폭넓게 살아야 한다고 거듭 당부한다.
상륜스님은 2007년 용인 법륜사에서 입적하였고 예산 수덕사에서 다비식이 엄수되었다. 수계제자로는 정호·정엽·정공·선혜·계현·명화·현담 외 9명의 스님들이 있다.
승가사
대한불교조계종 직할교구 본사인 조계사(曹溪寺)의 말사이다. 756년(경덕왕 15)에 수태(秀台)가 창건하여 당나라 고종 때 장안 천복사(薦福寺)에서 대중을 교화하면서 생불(生佛)로 지칭되었던 승가(僧伽)를 사모하는 뜻에서 승가사라 하였다.
그 뒤 1024년(현종 15)에 지광(智光)과 성언(成彦)이 중창하였고, 1090년(선종 7)에는 구산사(龜山寺)의 주지였던 영현(領賢)이 중수하였으며, 1099년(숙종 4)에는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이 왕과 왕비를 모시고 참배하면서 불상을 개금(改金)하고 불당을 중수하였다.
1422년(세종 4)에 왕이 7종을 통합하여 선교양종(禪敎兩宗)을 통합할 때는 선종에 속하였으며, 그 뒤 여러 차례의 중건·중수를 거쳐 고종 때 민비와 엄상궁의 시주를 얻어 일신, 중건하였다. 1941년에 도공(道空)이 다시 중수하였으나, 6·25전쟁 당시 소실되었으며, 1957년에 비구니 도명(道明)이 중창하여 대웅전과 영산전(靈山殿)·약사전(藥師殿) 등의 당우를 갖추었다. 그 뒤를 이어 비구니 상륜(相侖)이 불사(佛事)를 계속하여 현재는 산신각(山神閣)·향로각(香爐閣)·동정각(動靜閣)·범종각(梵鐘閣)·대방(大房)·요사채 등의 당우들이 좁고 가파른 지형을 이용하여 알맞게 배열되어 있다. 비록 규모는 작으나 창건 이후 여러 왕들이 행차하여 기도하였고, 조선 초기의 고승 함허(涵虛)가 수도했던 곳으로도 유명하다. 조선 후기에는 성월(城月)이 이절에서 배출되어 팔도도승통(八道都僧統)의 직책을 맡아 쇠잔하던 불교를 크게 진작하는 등 불교사상 중요한 위치를 점하는 사찰이다. 또한 예로부터 기도처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절의 유물로는 보물 제1000호로 지정된 석조승가대사상이 있으며, 서북방 100m 지점에는 보물 제215호로 지정된 거대한 마애석가여래좌상이 부각되어 있다. 이 마애불과 약사전에 모신 약사여래의 영험, 그리고 약수의 효험 등은 이 절을 기도처로서 유명하게 만들었다. 절의 뒤편 비봉에는 진흥왕순수비(眞興王巡狩碑)가 있었는데 국립중앙박물관으로 옮겨졌고, 그 자리에는 유지비(遺址碑)가 세워져 있다.
용인 법륜사
법륜사는 무아당 상륜스님이 2005년에 창건한 사찰이다. 상륜스님이 1996년 서울 삼각산 승가사에서 정진하던 중 관세음보살을 현몽하고 용인시 문수산 자락에 절을 창건하니 바로 지금의 법륜사다.
법륜사의 지형이 연꽃이 아름답게 핀 곳에서 선인들이 고요히 명상에 잠겨있는 형국이라 해서‘연화반지 선인단좌형’이라고 한다. 이곳에 백두산 홍송으로 집을 짓고 익산의 황등석으로 불상을 조성하였다. 다른 곳에서는 보기 힘든 아자형 대웅전과 석굴암 부처님의 세 배에 달하는 대웅전 본존불은 규모와 예술성이 뛰어나다고 평가 받는다.
민족의 소중한 문화유산으로 후세에 길이 남았으면 하는 바람으로 불사했다는 상륜스님 말씀처럼, 법륜사는 창건한 지 10년이 지난 지금‘자비와 행복이 넘치는 문수산 법륜사’라는 운영 기조를 앞세운 중부권의 새로운 관음성지이자 수행도량이 되었다.
관음전 앞마당에는 법륜사 유일의 지정 문화재인 용인 법륜사 삼층석탑(경기도 문화재자료 제145호)이 있다. 이 석탑은 서울 구로동 이덕문 씨 집에 있던 것을 법륜사에 보시해서 옮겨 온 것이라고 하는데 조성연대는 알 수 없지만 통일신라시대 석탑 양식을 계승한 것으로 보인다.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중권. 뜨란출판사, 2007, pp. 358~367.
- 한국비구니연구소.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234.
- 하춘생. 『한국의 비구니 문중』. 해조음, 2013, p.186, 391, 398.
- 불교신문, 승가사 상륜스님 (2002년) 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8619
- 용인시민신문, 원삼 문수산 기슭의 법륜사(法輪寺) (2005년) https://www.yongin21.co.kr/news/articleView.html?idxno=12752
- BBS, 북한산 승가사 중창 상륜스님 원적 (2007년) http://news.bbsi.co.kr/news/articleView.html?idxno=189375
- 법보신문, ‘원력보살’ 상륜 스님 원적 (2007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49307
- 전국비구니회, [기획특집Ⅰ] 전국비구니 선원 탐방_③ 법륜사 제일선원 (2007년) https://kbhiksuni.org/비구니회보sub/?mod=document&uid=1484
- 월간해인, 서역의 향기 승가사 제일선원 (2014년) http://haein.or.kr/contents/?pgv=p&wno=404&ckey=1
- 법보신문, 1. 목련회 (2020년) 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2113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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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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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相侖)스님 | 본항목 | 상륜스님(相侖, 1929~2007) | 相侖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상륜스님(相侖,_192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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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륜스님(相侖) | 삼현문중(三賢) | ~의 일원이다 | |
상륜스님(相侖) | 법희스님(法喜) | ~의 수계제자이다 | |
상륜스님(相侖) | 수덕사 견성암 | ~에서 출가하다 | |
상륜스님(相侖) | 경봉스님(鏡峰)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상륜스님(相侖) | 고암스님(古庵)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상륜스님(相侖) | 서울 승가사 | ~에서 직임을 수행하다 | 주지(감원) |
상륜스님(相侖) | 서울 승가사 | ~을(를) 중창하다 | |
상륜스님(相侖) | 용인 법륜사 | ~을(를) 창건하다 | |
상륜스님(相侖)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양산 내원사, 예산 수덕사 견성암, 예산 보덕사, 서울 승가사(구기동) |
지도
- 승가사 : 서울특별시 종로구 구기동 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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