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선스님(法船, 1899生, 비구니)
법선(法船)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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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법선(法船) |
법호 | 일오(一悟) |
속명 | 홍덕선(洪德善) |
출생 | 1899 |
출가 | 1960년 |
입적 | 1991.12.11 (세수93세, 법랍31세) |
사찰 | 보현사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47-12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법선스님은 한라산 관음사 중창불사(1941)와 보현암 창건의 주역이며, 청렴하시어 평생 사재(私財)가 없었고, 봉려관스님을 도와 제주불교발전에 기여한 대한민국의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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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 | 제주도 제주시 일도리 1261번지에서 출생 |
1931 | 봉려관스님과 인연을 맺고,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다 |
1931 | 제주 관음사에서 보살계를 받다. 계명은 원덕성. |
1937 | 국추(성해스님)보살과 인연을 맺다 |
1939 | 국채웅, 국추와 함께 제주 관음사 중창불사를 위해 래도(來島)하다 |
1940 | 국추와 함께 관음사 중창불사를 하다 |
1950 | 4.3으로 인해 관음사가 전소되자 제주로 돌아오다 |
1955 | 보현암(제주 도남동)을 창건하고 봉불식을 거행하다 |
1963 | 제주 관음사에서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65 | 부산 범어사에서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69 | 해원스님과 함께 관음사 재건 |
1981 | 혜국스님과 함께 관음사 번와 불사를 하다 |
1991 | 음력 12월 10일 04시 제주 보현암에서 입적하다 |
문중 | 두옥(斗玉)문중 |
수행지침 | 계율엄수, 법화경독송, 법화경 일장배례(一張拜禮)사경, 간화선수행, 일중식(日中食). |
수계제자 | 묘법, 제법. |
활동 및 공헌
재가제자 홍원덕성
법선스님은 1899년 2월 15일 제주시 일도리 1261번지에서 출생했으며, 부친은 홍석찬이고 모친은 강숙진이며, 속명은 홍덕선이다. 1931년 봉려관스님과 인연이 되었고, 같은 해 4월 8일 봉려관스님의 권유로 부처님께 귀의한다. 그 후 염불수행과 계율을 실행했으며 부처님의 재가제자로서 수행정진에 게을리 하지 않았다.
관음사 중창불사를 위해 국성해 집으로 가다
봉려관스님은 원덕성에게 이르기를 “관음사의 운명이 너에게 달렸다”는 말과 함께 한라산 관음사 대규모 중창불사를 위해 원덕성을 대동하고 담양 국채웅 집으로 간다. 국채웅 집에 도착한 봉려관스님은 국성적각(성해스님 보살명)에게 제주 관음사의 실정과 중창불사에 대한 자초지종을 말하며 대시주와 권선으로 대화주가 되어 줄 것을 정중히 요청한다. 국성정각은 거액의 시주는 부친 국채웅의 승낙이 있어야 해서 바로 답을 주지 못했다. 그러자 봉려관스님은 원덕성에게 이르기를 “제주 관음사가 장차 발전하고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너에게 달렸으니 법화경 공부도 열심히 하고 성정각보살을 잘 모시고 도와드려야 한다. 어떤 어려움과 고달픈 일이 있더라도 참고 불심을 연마해서 중생을 제도해야 한다.”고 하며, 국채웅 거사가 제주 관음사 불사를 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한다. 원덕성을 국성정각 집에 머물게 한 봉려관스님은 제주로 발을 옮기면서 성정각과 원덕성에게 “나의 상좌는 성정각이며, 성정각의 상좌는 원덕성이다”고 말한다. 원덕성은 봉려관스님과 작별한 후 굳은 결심으로 법화경 사경을 시작하였다. 한 장 쓰고 배례하고 한 장 쓰고 배례하기를 1년을 하여 1질을 완성하였고, 3년 동안 3질을 사경했다. 그리고는 곡성군 실상사 부처님 전에 사경한 법화경 3질을 올리고 점안의식을 봉행했는데, 당시 실상사 내 우물이 말라 대중이 불편을 겪었는데 우물에 물이 가득 고이는 기이한 현상이 있었다. 국성정각은 원덕성의 정성에 감동하였고, 부친인 국채웅거사에게 관음사 중창불사를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간정하기에 이르렀다. 국채웅은 딸의 간청을 받아들인다.
한라산 관음사 중창불사 원만회향하다
1938년 5월 29일 봉려관스님은 갑자기 입적한다. 이 비보를 들은 국성정각과 원덕성은 큰 충격을 받는다. 원덕성은 생전에 이르기를 “당시 하늘이 무너지는 심정이었다”고 말한다. 1940년 국성정각과 원덕성은 목수 32명을 대동하고 제주로 와서 한라산 관음사 중창불사와 관련된 일체를 감독하게 된다. 국채웅은 목수 32명의 일당을 목수에게 직접 주지 않고 육지에 있는 가솔에게 지불했는데, 이유는 제주에서 일하는 목수들이 외로움에 일당을 술로 탕진할 것을 염려해서다. 당시 제주도에는 고전 팔각포 법당을 지을 수 있는 목수가 없었다. 이때 대목수는 훗날 한라산 관음사 주지를 역임한 지선스님의 백부이다. 1941년 국성정각과 원덕성은 한라산 관음사에 대웅전, 선방, 해월각, 노전, 종각 등 6동을 완공해서 낙성식을 봉행하니 한라산 관음사는 육지사찰에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 대가람의 규모를 갖추게 되었다. 드디어 봉려관스님 생전에 원덕성에게 한 당부와 국성정각에게 부탁한 관음사 중창불사 숙원이 두 보살에 의해 성취된 것이다.
보현암을 창건하다
1948년 수많은 인명이 죽어간 제주 4.3이 발생했고, 한라산 관음사도 이를 피하지 못하였는데, 1949년 관음사는 전소된다. 우송선원에서 이 소식을 접한 국성정각은 원덕성과 의논 끝에 원덕성이 제주로 내려오게 된다. 제주에 내려온 원덕성은 제2관음사를 창건할 것을 결심하고 지금의 도남동 부지 900여평에 사찰을 건립하기 위해 제주불자들과 함께 시주권선에 나섰고, 드디어 1955년 성대한 낙성식과 봉불식을 봉행하였는데, 이 사찰이 바로 보현암이다. 보현암은 성내포교당과 함께 전소된 한라산 관음사가 수행했던 역할을 대신 해낸다.
국성정각(성해스님)이 삭발수계하자 원덕성도 삭발수계하다
봉려관스님으로 인해 부처님께 귀의한 원덕성은 국성정각이 아버지 생전에 삭발수계한 것을 불효라 하여 보살로서 부처님제자의 길을 걷던 스승을 기다렸다. 1960년 국성정각이 봉려관스님을 은사로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받고, 1963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받자, 드디어 원덕성도 1963년 성해스님을 은사로 고암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고, 1964년 동산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한다. 스승이 삭발수계하기까지 유발인 채로 수행하며 기다린 법선스님의 인성은 승가의 귀감이 된다 하겠다.
관음사 중흥이 나의 소명
봉려관 스님이 법선스님에게 당부한 ‘관음사의 운명이 너에게 달렸다’ ‘제주 관음사가 장차 발전하고 발전하지 못하는 것은 너에게 달렸다’는 이 말씀 때문인지 불분명하지만, 법선스님의 제주불교발전에 대한 생각은 남달랐다. 특히 관음사와 관련해서는 더욱 그렇다 하겠다. 4.3으로 전소된 관음사를 법선스님이 재건해야 한다는 의견이 당시 제주불자들의 생각이었고, 정대원각보살이 제주불자를 대표해서 법선스님을 제주로 다시 내려오도록 힘을 쓴다. 제주로 내려온 법선스님은 관음사 재건에 중추적 역할을 해서 1964년 관음사 재건을 기공해서 1969년 향운스님과 함께 준공시킨다. 뿐만 아니라, 혜국스님이 관음사 주지였을 때 관음사 대웅전 번와불사를 무난히 마치게 하였고, 관음사 크고 작은 불사에 늘 법선스님의 노력이 있었다. 그리하여 관음사 주지로 임명된 해원스님은 그동안의 법선스님의 불사공덕을 감탄하여 불자들과 협의하여 법선스님을 보현암에 주석할 수 있게 하고는 상좌인 묘법, 제법, 정법보살과 손상좌인 무용, 영운, 효일스님 등이 보현암에 거주하면서 수행하도록 했다.
신심이 절절한 자비로운 분
법선스님 손에는 늘 천주가 한 알 한 알 내려진다. 외출 시에는 목에 108염주가 있다. 심심으로 똘똘 뭉치고 신심이 절절한 자비로우신 법선스님은 1991년 12월 11일(음) 제주불자와의 인연을 정리하고 입적하셨다. 1931년 봉려관스님과의 인연으로 보살계를 받고 부처님 가르침에 귀의하였고, 봉려관스님의 당부를 잊지 않고 오로지 한라산 관음사의 중흥에 여념이 없었던 법선스님! 백양사 방장을 역임한 지선스님은 법선스님을 이렇게 말씀하신다.
“말없이 제주불교의 모든 불사를 도와주었지만 상은 절대 내지 않았다. 뒤에서 언덕처럼 도와주시는 분이고, 뵈면 머리가 저절로 숙여지는 분이다.”
“법선스님은 포교당 새벽예불에 항상 가장 먼저 나와 계셨다. 묻는 말만 대답하시지 먼저 말씀하신 적은 없었다. 불사에 한 푼도 내지 않고 빠진 적이 없다. 무슨 불사, 무슨 기도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제시도 하셨다.”
“내가 뵈러 갈 때마다 내가 볼 때마다 늘 좌선 중이셨고, 화내는 것도 못 보았다. 웃는 것도 어쩌다 한 번 웃으시지~. 중심을 잡고 계셨지 어디에도 치우친 분이 아니다. 늘 참선 수행하신 모습만 보았다. 무언의 지주였다.”
작성자: 혜달(사단법인 봉려관불교문화연구원장)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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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선(法船)스님 | 본항목 | 법선스님(法船, 1899~1991) | 法船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법선스님(法船,_1899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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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선스님(法船) | 두옥문중(斗玉) | ~의 일원이다 | |
법선스님(法船) | 성해스님(性海) | ~의 수계제자이다 | |
법선스님(法船) | 제주 보현사 | ~에서 출가하다 | |
법선스님(法船) | 고암스님(古庵)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비구니계 |
법선스님(法船) | 제주 관음사 | ~을(를) 중창하다 | |
법선스님(法船) | 제주 보현사 | ~을(를) 중창하다 |
지도
- 보현사 : 제주도 제주시 도남동 47-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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