응민스님(應旼, 1923生, 비구니)
응민(應旼)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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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응민(應旼) |
법호 | |
속명 | 김경희(金敬喜) |
출생 | 1923.09.10. |
출가 | 1937년 |
입적 | 1985.02.04.(음12.15) (세수62세, 법랍48세) |
사찰 | 수덕사 견성암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응민(應旼)스님은 친가와 외가 등 41명이 출가하여 석가모니 부처님 가족 이후 가장 많은 스님이 출가했으며 출가자 모두가 후학들에게 수행의 본보기를 보여주신 승가 명문가문의 일원이며, 응민스님 역시 만공선사로부터 '정진제일 수좌'로 인정을 받았으며, 수덕사 견성암에서 수행정진하신 훌륭하신 대한민국 비구니 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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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3 | 충남 공주 출생 |
공주사범학교 졸업 | |
1937 | 금강산 신계사 법기암에서 대원(大願)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7 | 혜암(惠庵)현문(玄門)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41 | 수덕사 견성암 만공(滿空)스님 회상에서 정진 |
1946 | 대승사 윤필암, 김룡사, 봉암사 등 전국 선원에서 20년간 안거 수행 |
1966 | 자운(慈雲)스님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66~1984 | 수덕사 견성암 선원에서 수행 지도 |
1984 | 1984.12.15. 입적(세수 62세, 법랍 48세) |
style="width:120px" | 문중 | 법기(法起)문중 |
수계제자(『한국비구니명감』) | 묘행(妙行)·묘성(妙性)·묘안(妙岸)·묘현(妙現)·묘적(妙寂)·묘웅(妙雄)·묘견(妙見)·묘일(妙一)·은성(恩成)·묘진(妙眞)·정은·관우(觀愚)·동명(東明)·지현(智顯) | |
문중계보(『한국의 비구니문중』) | 의첨(義沾, 4)→지환(智幻, 5)→부영(扶榮, 6)→대원(大願, 7)→응민(應旼, 8)→묘행(妙行, 9), 묘성(妙性, 9), 묘안(妙岸, 9), 묘현(妙現, 9), 묘적(妙寂, 9), 묘웅(妙雄, 9), 묘견(妙見, 9), 묘일(妙一, 9), 은성(恩成, 9), 묘진(妙眞, 9), 정은(靜隱, 9), 관우(觀愚, 9), 동명(東明, 9), 지현(智顯, 9) |
활동 및 공헌
비장한 출가
응민(應旼)스님은 1923년 음력 6월 28일 충남 공주군 우성면 동대리 운천마을에서 아버지 법진 거사와 어머니 원만성 보살 사이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연안이며, 이름은 김경희이다. 응민스님의 출생과 관련한 삼생이야기는 아주 유명하다.
스님은 어려서부터 부지런하고 깔끔하여 매사에 스님의 손길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었다. 18세 되던 해, 공주여자사범학교를 졸업하고 일본으로 유학을 가려 했으나 어머니께서 혼자는 절대로 보낼 수 없다며 완강히 반대하셨다. 그러나 스님은 반드시 가겠다며 고집을 꺾지 않았다.
“차라리 강물에 빠져 죽든지, 아니면 빡빡 머리 깎고 중이나 되든지 해라.”하며 어머니가 호통을 치자 스님은 차라리 죽어버릴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공부에 대한 간절한 열망을 잠재울 수가 없었다. 하루는 불심이 지극한 외할아버지께 어떻게 하면 평생 공부만 할 수 있겠느냐고 여쭈었다.
“그야 스님이 되면 되지.”
외할아버지의 이 한마디에 스님의 인생행로는 곧바로 결정이 되었다. 스님은 그날로 아무도 모르게 집을 떠났다. “무상(無常)한 줄 알면 무상보리(無上菩提)가 되는 것이다.”
이미 출가하여 사문의 길을 걷고 있던 막내삼촌이 말씀해준 무상법문이 보이지 않는 인(因)이 되었을 터였다.
그러나 막상 출가하려고 집을 나섰으나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던 차에 운명인지 필연인지 수덕사 초대 방장이던 혜암스님을 만나게 되었고, 혜암스님은 이 당차고 영특한 처녀를 금강산 신계사의 법기암까지 친절하게 인도해주셨다. 그곳에서 스님은 대원(大圓)스님을 은사로 오계(五戒)와 십계(十戒)를 받은 뒤 집에 편지를 띄웠다.
'검은 머리 한 다발 한 생각에 끊은 일 아까울 것이 없나이다. 이 세상 모든 것 다 버릴 것인데, 구할 것 많은 복잡한 세상을 오늘 벗어나 부처님의 세계에서 법의 꽃을 피우는 일은 진실로 값어치가 있는 일입니다. 자타일시 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가족 중에서 41명이 불가에 출가
외가 식구들이 먼저 출가하고 친가는 응민스님의 출가 이후로 동곡(東谷) 일타(日陀)스님을 비롯하여 5년 사이에 부모님을 비롯한 동생 셋까지 일가족이 모두 출가하게 되었다. 그 당시 외가의 원근친척은 머슴까지 모두 합하여 41명이 출가했다고 하니 스님이 전생부터 심어온 선연이 얼마나 지극했던가를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이는 석가모니 부처님과 그 일족의 출가 이후로 가장 많은 숫자로 기록되고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이 41명의 출가는 우연하게 이루어진 것인가? 아닙니다. 나의 외증조할머니인 안성이씨 평등월(平等月) 보살의 기도와 입적(入寂), 그리고 방광의 이적(異蹟)이 그 밑바탕에 깔려 있습니다.’ 라고 말씀 하시던 일타스님은 말씀하셨다고 한다.
응민스님의 출가 이후로 1942년 사의(思義;일타스님 본명)가 초등학교를 졸업하자, 아버지(김봉수)는 수덕사 만공선사를 찾아가 출가하였고, 일타 역시 외할아버지 추금스님의 손을 잡고 양산 통도사로 향하면서 대가족이 모두 출가의 길로 떠난 것이다.
일타스님 친가의 출가에서 스님의 가계는 이 경이로운 숫자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분들 모두가 하나같이 아주 열심히 수행정진한 한 참된 수행자로 평가받고 있다.
[출처] 안산김씨(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yescheers/8599694)
만공스님과의 인연
계(戒)를 받은 지 1년 뒤 스님은 일생일대의 큰 변화를 맞게 된다. 스님은 법기암 큰방에 걸린 어느 선사의 사진을 보며 누구인지 항상 궁금해 하던 중 객(客)으로 오신 혜암스님께 여쭈어보았다.
“저 분이 누구십니까?”
“그 분이 바로 예산 수덕사 조실로 계시는 만공(滿空) 큰스님이시다.”
혜암스님의 말씀을 듣고 스님은 무릎을 치면서 속으로 생각했다.
'아차, 내가 잘못 왔구나. 공주에서 예산은 그리 먼 거리도 아닌데 가까운 곳에 선지식(善知識)이 계시는 줄도 모르고 이곳 금강산까지 오다니.......’
다음날 스님은 수십 길도 넘게 자란 무성한 수풀을 헤치면서 금강산을 떠나 수덕사로 향했다. 스님의 나이 19세에 불과했으니 그 뛰어난 안목을 짐작할 수 있다.
요즘 세대는 엄두도 못 낼 용맹심으로 오직 일대사를 해결하기 위한 일념만으로 꼬박 보름 밤 보름 낮을 걸어서 수덕사에 도착한 스님 모습은 봉두난발 그대로였다.
그 당시 만공 큰스님께서는 100여 명이 넘는 납자와 후학을 제접하시며 지도하고 계셨다.
“화두를 놓치면 생명을 잃는다. 다른 데서 찾지 말라. 스스로에게서 찾아라."
어느 날 만공 큰스님께서 대중이 모두 모인 자리에서 경허 선사의 임종게를 가지고 대중에게 물으셨다.
심월고원(心月孤圓) 광탄만상(光吞萬像)
광경구망(光境俱忘) 부시하물(復是何物)
마음달이 외로이 둥글어
그 빛이 만상을 삼켰도다.
빛과 경계를 함께 잊으니
다시 이 무슨 물건인고?
대중이 한참 동안 묵묵히 있는 사이 응민스님이 일어났다. 만공 큰스님께서 따로 부르시니 스님이 대답했다.
“빛이 비추는 바가 없으면 경계도 또한 있는 바가 없습니다. 마치 거울로 거울을 비추는 것과 같아서 상(相) 가운데에는 불(佛)이 없습니다.”
“그래. 응민 수좌가 공부를 열심히 하는구나.” 만공 큰스님은 스님을 정진 제일 수좌라 칭찬하시고 '방울대사' 라는 별호도 붙여주셨다. 스님은 번듯한 옷 한 벌 없어도 문제될 게 없었고 오직 화두일념이 되어야 한다는 마음에 한시라도 화두를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혹 도량을 거닐다가 멀리 도반이라도 보이면 왔던 길을 되돌아가 피해버렸다. 만나면 당연히 말을 하게 되고 말을 하다 보면 공부를 등한히 하게 될 것을 걱정한 것이다.
그 후 만공 큰스님께서 입적하시자 남방으로 향곡스님, 효봉스님, 동산스님 등 눈 푸른 명안대덕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점검했다.
생사를 무릅쓴 용맹정진
10여 년이 넘는 운수납자의 생활 속에서 한때는 비마(悲魔), 희마(喜魔)가 겹치기도 하고 상기병이 나서 공부가 산산이 부서질 때도 있었지만 거기서 좌절하지 않고 백척간두에서 다시 진일보하듯 더더욱 정진에 힘썼다. 만년에는 20년 가까운 납자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수덕사 견성암으로 와서 후학을 지도했다.
스님은 사월초파일에 연등을 만들고 난 뒤 색종이의 색깔이 풀에 번져서 색색의 풀이 남아 있으면 그것으로 풀떡을 만들고, 상한 음식이 있으면 당신이 먼저 맛있게 먹었다고 하니 무심(無心)으로 임한 수행에 한 치의 빈틈도 없었다.
아직 수행의 갈피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후학이 있으면 자상한 어머니처럼 너그러이 감싸주고 자비롭게 일러주어 많은 초심자의 의지처가 되어주었다.
스님은 후학들에게 '적적(寂寂)한 무념무상(無念無想)의 경지에 들어서도 그 신령스러운 성성한 앎이 있어야 평등지(平等智) 속에 차별지(差別智)가 나오는 것이며, 이렇게 공부를 지어야 제대로 공부하는 것이다.' 라고 당부했다.
입적
1984년 동안거 결제 중 납월 팔일 7일간의 용맹정진을 끝내고 12월 15일 아침에 깨끗이 씻고 옷을 갈아입은 다음, 그 자리에서 앉은 그대로 입적에 들었으니, 이때 스님의 세수 62세요, 수행정진에 든 지 48년 되던 해였다.
다비하던 날은 잔뜩 움츠린 하늘에서 진눈깨비가 날리고 추웠다. 그런 가운데 전깃불처럼 환한 광명이 3분 정도 발했으니 마지막 가는 순간까지도 가고 옴이 둘이 아님을 여실히 보여준 것이다.
응민스님의 임종게
無央劫數來虛舟 (무앙겁수래허주)
不借乾坤本虛舟 (부차건곤본허주)
廣度衆生滿虛舟 (광도중생만허주)
偶來偶去眞虛舟 (우래우거진허주)
한없는 겁수를 빈 배처럼 왔다가
건곤(乾坤)의 힘 빌리지 않고 빈 배처럼 떠났네.
중생을 제도하여 빈 배를 채움이여
이렇게 왔다가 이렇게 떠나노라.
- 평생을 오롯이 수행하다가 입적한 응민스님의 수계제자로는 묘행(妙行)·묘성(妙性)·묘안(妙岸)·묘현(妙現)·묘적(妙寂)·묘웅(妙雄)·묘견(妙見)·묘일(妙一)·은성(恩成)·묘진(妙眞)·정은·관우(觀愚)·동명(東明)·지현(智顯)스님 등이 있다.
관련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 pp. 419~424.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 p. 353.
- 안산김씨(다음 블로그, https://blog.daum.net/yescheers/8599694)
시멘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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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민(應旼)스님 | 본항목 | [응민스님(應旼), 1923~1984]] | 비구니 | 應旼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응민스님(應旼,_1923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속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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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민스님(應旼) | 동곡일타(東谷日陀) | ~의 누님이다 | |
응민스님(應旼) | 법기문중(法起) | ~의 일원이다 | |
응민스님(應旼) | 대원스님(大願) | ~의 수계제자이다 | |
응민스님(應旼) | 신계사 법기암 | ~에서 출가하다 | |
응민스님(應旼) | 혜암스님(慧庵)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사미니계 |
응민스님(應旼) | 자운스님(慈雲) | ~(으)로부터 계를 받다 | 비구니계 |
응민스님(應旼) | 안거 | ~을(를) 성만하다 | 예산 수덕사 견성암, 문경 대승사 윤필암, 문경 김룡사, 문경 봉암사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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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 수덕사 견성암 : 충청남도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3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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