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화스님(淨華, 1922生, 비구니)
정화(淨華)스님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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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명 | 정화(淨華) |
법호 | 묘각당 |
속명 | 강삼인 姜三仁 |
출생 | 1922년 |
출가 | 1933년 |
입적 | 2015년 4월29일 |
사찰 | 수덕사 견성암(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0) |
특이사항 |
목차
정의
정화(淨華)스님은 비구니 최고 법계 명사 품수 받았으며 개심사 비구니스님 강원 주지등 후학 양성과 한평생 청정수행자로 수덕사 견성암 선원장등을 지낸 대한민국 비구니스님이다.
생애
연도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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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2 | 강원도 회양 출생 |
1933 | 강원도 고성군 표훈사 돈도암 에서 원각스님을 은사로 출가 |
1934 | 일우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 수지 |
1939~1944 | 고성군 외금강면 온정리 여여원에서 효봉스님을 모시고 사미니과 수료 |
1944 | 대원암 안거 |
1944 | 선학원에서 동산스님 [http://www.beomeo.kr/idt/idt03_2.php을 계사로 비구니계 수지 |
1950~1951 |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14XXE0002164 견성암 안거 |
1952 | 부산 범어사 [http://www.beomeo.kr/ 범어사 대성암 안거 |
1954 | 대성암에서 운허스님 문하에서 능엄경을 수료 |
1950년대 말 | 종단정화운동 동참 |
1961~1962 | 개심사 비구니 강원 총무 |
1962~1970 | 개심사 비구니스님 강원 주지[ 개심사 도감(주지) |
1970년대 초 | 수덕사 극락암에서 안거를 보내고 |
1970~1994 | 서울 광진구 화양동 광림선원 창건 |
1973~1994 | 20여년이 넘도록 화양동 광림선원에서 안거 |
1986 | 비구니 이부승 존중아사리에 추대 |
1994~1996 | 수덕사 견성암 안거 단일구족계단 비구니 증사(별소계단 6회 존증아사리) |
1996~1999 | 견성암 제일선원 선원장 |
2007 | 조계종 비구니 최고 법계인 명사법계를 품수 |
2016.4.29. | 수덕사에서 입적 (세수 95세 법납84세) |
문중 | 법기(法起)문중 |
수행지침 | 청정수행 |
수계제자 | 진우眞宇・진성眞性・진오眞悟 |
활동 및 공헌
출가의 동기
정화(淨華)스님은 1922년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이며, 이름은 강삼인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원래 경남 진주가 고향이었고, 어머니와 은사스님은 서울 출신으로 세 분은 친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불심 또한 깊었다.
서울에 살면서 삼남매를 낳은 스님의 부모님은 당시 은사스님이 계시던 표훈사 근처로 낙향을 하게 되었고, 이후 막내인 정화스님이 태어났다.
표훈사에 재가 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법문을 들으러 자주 다녔는데, 그때마다 어린 꼬마였던 정화스님 역시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
정화(淨華)스님은 1922년 강원도 회양군 내금강면에서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본관은 진주 이며, 이름은 강삼인이다.
스님의 아버지는 원래 경남 진주가 고향이었고, 어머니와 은사스님은 서울 출신으로 세 분은 친분이 매우 두터웠으며 불심 또한 깊었다.
서울에 살면서 삼남매를 낳은 스님의 부모님은 당시 은사스님이 계시던 표훈사 근처로 낙향을 하게 되었고, 이후 막내인 정화스님이 태어났다.
표훈사에 재가 있는 날이면 어머니는 법문을 들으러 자주 다녔는데, 그때마다 어린 꼬마였던 정화스님 역시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녔다. 그러나 재를 지내는 스님의 말씀을 도통 알아들을 수 없어 지루하기만 했고, 어린 소녀는 꼬박꼬박 졸기 일쑤였다.
어린 아이가 자리 하나를 차지하고 앉아 졸고 있는 모습을 어여삐 보신 한 스님이 하루는 “나 따라와서 잘래?” 하고 말씀하셨다. 어린 정화스님은 졸린 눈을 비비며 따라가서 목침을 베고 한 참 동안 달디 단 잠 속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그러다가 잠이 깨어 자신이 스님을 따라왔다는 생각은 까맣게 잊고서 깜짝 놀라 울먹이며 사방을 두리번거렸다.
그 사이 날은 이미 저물어 어둑어둑한데, 어머니의 모습은 보이지 않고 방안 풍경은 생경하기만 하였다. 설상가상 목침을 베고 잔 탓에 목은 떨어질 듯이 아파왔다. 문득 서럽고 두려운 마음에 큰 소리로 울자 스님께서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며 길을 나섰다. 그날 밤 집에 도착하였을 때 시계는 벌써 자정이 가까운 밤 11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날 어린 꼬마를 데려다 줬던 스님은 나중에 정화스님의 은사스님이 되셨고, 은사스님과의 운명적인 만남은 훗날 일대사 인연으로 다시 이어진다.
당시 원산에는 갈매수녀원이 있었다. 수녀원에서 수행하던 수녀님들은 병이 나면 수녀원 밖으로 내보내져 요양을 하였는데, 어느 날 건강이 악화된 수녀님 한 분이 스님의 집에 머무르게 되었다. 어린 정화스님은 수녀님을 가까이에서 직접 보고, 자상한 말씨와 다정한 모습에 자신도 수녀가 되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이 일어났다. 어린 딸이 수녀가 되겠다는 뜻을 거듭 나타내자 독실한 불교 집안이었던 스님의 집안은 실로 엄청난 파장이 일어났다.
이에 정화스님의 어머니가 절에 찾아가 스님에게 전후 사정을 이야기하기에 이르렀다. 스님께서는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그 아이를 자신에게 데려다놓으라 하셨다. 집으로 돌아온 어머니는 정화스님에게 말했다.
“수녀원에 가지 말고 너 절에 한번 안 가볼래?”
절에 가자는 어머니의 말에 정화스님은 불현듯 목침 때문에 고생했던 일이 생각나 얼른 베개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그런 정화스님을 보고 어머니가 이상하다는 듯 물었다.
“그건 뭐 하러 만드니?”
그러나 정화스님은 지난 일이 부끄러워 “그냥......”이라고 얼버무리고 말았다. 절에 도착하여 어머니가 “넌 여기 있을래?” 하고 말하자 당돌하게도 있겠어요.” 하고 대답하였다. 이에 스님의 어머니는 막내이면서 유별난 아이가 낯선 곳에서 하루나 제대로 견딜 수 있을까 염려하면서 어린 딸을 절에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러나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고 내린 이 결정은 곧장 스님의 출가로 이어졌다.
하루가 지나고 이틀이 지났다. 절에 스님을 데리러 간 어머니가 집으로 같이 가자고 손을 아무리 잡아끌어도 어린 정화스님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이 깜찍한 어린 소녀는 만약 자신이 집에 가게 되면 다시는 절에 오지 못할 것 같은 생각에 막무가내로 고집을 부리며 한 달 가까이 버텼다. 그러자 끈질기게 절에 찾아와 귀가를 종용하던 어머니도 포기하고 더 이상 오지 않았다.
막상 절에서 생활을 하다 보니 집과는 달리 끝도 없이 심부름을 해야 했다. 그러나 속으로 불평을 하다가도 문득 ‘이걸 해내야지 절에 있을 수 있다.’는 생각이 들어 입을 꾹 다물었다. 이리하여 스님은 어려운 중노릇을 포기하지 않고 계속하게 되었다.
교육
출가 이듬해인 1934년에 강원도 고성군 외금강면 신계사에서 김일우 스님을 계사로 사미니계를 수지하였으며, 1939년 강원도 고성 외금강면 온정리 여여원에서 효봉스님을 계사로 보살계를 수지했고, 1939년부터 1944년까지 온정리 여여원에서 효봉스님을 시봉했고 사미과를 수료했다. 1945년 3월 선학원에서 동산화상을 계사로 비구니계를 수지했다.
만주에서 독립운동에 참여하다
스님은 출가 직후부터 19살까지 표훈사에서 머물다 임대원스님, 성공스님, 은사스님과 함께 만주로 들어가셔서 백용성스님을 모셨고, 성공스님이 광명고등여학교를 설립한 뒤에도 꾸준히 독립운동에 참여했다. 이후 정화스님은 만주에서 신계사 입구로 돌아왔고 성공스님은 효봉스님을 조실로 모시고 여여원이란 선방을 개설하였다. 은사스님은 자족원(진여선원)을, 뒤이어 임대원스님은 신계사에서 십리정도 떨어진 곳에 법기암이라는 선방을 창건하였다.
정화스님은 어른스님들의 독립의지를 받들어 성심껏 시봉을 하며 살게 되었다. 그러던 중에 일제치하 당시 재단법인으로 인가를 냈던 여여원과 지족원이 해방 후에 적산재산으로 몰려 그대로 두고 나오게 되었다. 이 때가 스님 세수 23살 때의 일이었다.
피난을 나와 수덕사 견성암에서
스님은 6·25전쟁이 발발한 뒤, 한국전쟁 1·4후퇴 때 피난을 나와 수덕사 견성암에 머무시면서 2년여 동안 수선안거를 성만하는 등 참선수행에 전념했다. 정화운동 당시 큰스님들과 함께 단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31세 되던 해인 1952년 범어사 대성암에서 안거를 마친 후 정화의 거센 바람이 종단 안팎에 불어 닥쳤다. 정화운동 당시 큰스님들과 함께 단식에 들어가게 되었다. 당시 정화스님은 단식이라는 것이 물도 한 모금 먹으면 안 되는 것으로 생각하여 만 이틀하고도 반나절을 꼬박 굶었다.
신심을 다하여 후학양성에 전념을 기울였다.
정화가 끝난 후, 스님은 후학들의 학구의지를 드높여 부처님 법을 공부하는데 일익이 되고자 1961년 개심사 비구니 강원 총무로 2년간 재직했으며 곧이어 강원의 주지소임을 8년 정도 보았다. 열성적인 가람수호와 신심을 다하여 후학양성에 전념을 기울였다.
서울로 돌아와 광진구 화양동에 광림선원를 창건
1970년 개심사 비구니 강원 주지자리를 내놓고 서울로 돌아와 광진구 화양동에 광림선원을 창건하였다. 도량불사를 거듭하여 불국토의 가람으로 그 모습을 드러낸 1994년에 이르기까지 꼬박 24년의 긴 시간을 보냈다.
남은 여생을 선禪공부에 전념해야겠다는 일념을 세우다
이렇듯 오랜 시간 공을 들여 도량을 가꾸어낸 후 후임자에게 물려주고 스님은 여생의 남은 시간을 선공부에 전념해야겠다는 일념을 세워 소유욕에 걸림이 없이 일생을 보냈다. 1994년부터 2년간 수덕사 견성암에서 안거 정진을 한 뒤에 1996년~1999년에는 견성암 제일선원 선원장 소임을 맡았다.
입적
2016. 4.29일 원적에 들다. (세수 95세 법납 84세)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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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淨華)스님 | 본항목 | 정화스님(淨華, 1922~2016) | 淨華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화스님(淨華,_192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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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淨華)스님 | 법기(法起)문중 | ~의 일원이다 |
정화(淨華)스님 | 강원도 고성군 표훈사 돈도암 | ~에서 출가하다 |
정화(淨華)스님 | 원각스님 | ~의 제자이다 |
정화(淨華)스님 | 일우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정화(淨華)스님 | 동산(東山)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정화(淨華)스님 | 한국불교정화운동 | ~에 참여하다 |
정화(淨華)스님 | 개심사 | ~의 주지를 역임하다. |
정화(淨華)스님 | 광림선원 | ~을 창건하다. |
정화(淨華)스님 | 견성암 제일선원 | ~의 선원장을(를) 역임하다. |
정화(淨華)스님 | 명사 법계 | ~을(를) 품서받다 |
사찰
- 수덕사 견성암(☎041-337-6007 ): 충남 예산군 덕산면 사천리 22
참고자료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수행담록』 상, 뜨란출판사 (2007년) p328~332
- 한국비구니연구소 저, 『한국비구니명감』, 뜨란출판사 (2007년) p444.
- 출처 : 법보신문(http://www.beopbo.com/news/articleView.html?idxno=92345 ) ‘묘각당 정화 스님 다비식 봉행 ’ 2016.05.06 09:36
- 출처 : 불교신문(http://www.ibulgyo.com/news/articleView.html?idxno=148615) 비구니 명사 정화스님 수덕사서 다비식 엄수’2016.05.02 13:55
시맨틱 데이터
노드 데이터
식별자 | 범주 | 유형 | 표제 | 한자 | 웹 주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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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淨華)스님 | 본항목 | 정화스님(淨華,1922~2016) | 淨華 | http://dh.aks.ac.kr/~biguni/wiki/index.php/정화스님(淨華,_1922生,_비구니) |
※ 범례
- 범주: 본항목, 문맥항목
- 문맥항목 유형: 승려(비구니), 승려(비구), 인물, 단체, 기관/장소, 사건/행사, 물품/도구, 문헌, 작품, 개념/용어,
릴레이션 데이터
항목1 | 항목2 |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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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화(淨華)스님 | 법기(法起)문중 | ~의 일원이다 |
정화(淨華)스님 | 원각(圓覺)스님 | ~의 수계제자이다 |
정화(淨華)스님 | 고성군 표훈사 돈도암 | ~에서 출가하다 |
정화(淨華)스님 | 일우스님 | ~으로부터 사미니계를 받다 |
정화(淨華)스님 | 동산(東山, 1890~1965; 비구스님) | ~으로부터 비구니계를 받다 |
정화(淨華)스님 | 개심사 비구니 강원 | ~의 감원(주지)를 역임하다 |
정화(淨華)스님 | 비구니 증사 | ~ 존증아사리를 역임하다 |
정화(淨華)스님 | 서울 광림사 | ~을 창건하다 |
정화(淨華)스님 | 견성암 | ~의 선원장을 역임하다 |